# 7
7화. 영웅은 기대지 않는다 (3)
클랜 영입 건은 성사되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메르키에게 후원과 클랜의 차이를 듣고서 납득했다.
아직은 내 몸값이 내 빚보다 못하다는 건, 쓰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으음.”
메르키가 침음을 흘린다.
나 역시 그랬다.
뭐라 말해야 할까? 참담한 기분이다.
“이건, 후우.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리 네 빚이 많다고는 해도…….”
그 비싼 축복을 그냥 내려 주시고, 왜? 메르키가 중얼거린다.
불경하다 생각하긴 했지만, 나 역시 서운한 마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5푼이라.”
5%.
비다르께서 내게 약속하신 후원금이다.
모든 수당에 5%를 추가 지급하신다 약속하셨다.
상위권 투사라면 퍼센트 계약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말단 투사인 내게 5%는 너무 빈약하다.
“…보통 승리 수당이 얼마쯤 나오지?”
“까악. 10만 코로나쯤이다.”
“그럼 뭐… 이기면 5천 크로나를 더 받는단 소리 아닌가?”
이겼을 때 이야기다.
나는 긍정적인 면을 보려 했다. 저 역시 지금의 내게는 큰돈이 아닌가?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1만 크로나짜리 금화가 10개에 1천 크로나짜리 은화가 3개다.
한 번만 이기면 이것보다 많은 10만 5천 크로나를 받을 수 있다.
“아무래도 위쪽에서 뭐가 얽힌 모양이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고개를 젓자 메르키가 의아한 눈으로 날 본다.
“윗분들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내가 그만큼 값어치를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닌가.”
“…으음, 그건…….”
“괜한 위로는 필요 없다, 메르키.”
나는 투기장 문을 향했다.
몸을 움직이고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리라.
이 좁고 허름한 대기실이 아니라, 더 위쪽을 바라보고 정진하겠다.
“어딜 가나? 갈 곳도 없다면서!”
“아무래도 몸을 좀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인다. 세흐림니르 고기가 더 필요해.
“세흐림니르 고기라면, 식당에서도 팔고 있을 텐데…….”
“식당?”
고개를 갸웃하자, 메르키가 한숨을 내쉰다.
“설명할 때 안 듣는 것 같더라니. 깍깍.”
메르키가 예전 투사 등록을 할 때 한 설명을 되풀이했다.
되풀이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에 들은 기억이 없다.
“…식당뿐만 아니라, 훈련장도 있다고?”
“뭐, 이쪽은 아무래도 지원이 없어서… 그냥 너른 땅이 있을 뿐이지만.”
상위권 대기실에는 온갖 마법으로 떡칠 된 훈련 기기들도 있다고.
메르키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냥 너른 땅? 그것만 해도 내게는 훌륭한 곳이다. 길거리에서 훈련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으리라.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일단, 식당으로 가 볼까?”
“…지금 시간이 몇 시라고 생각하나?”
메르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새벽이다.
일단은 자야겠지.
나는 딱딱한 투기장 바닥에 몸을 누이고, 다짐했다.
나중에 대단한 사람이 되어도, 비다르 클랜에는 들지 않겠노라고.
불경하다 여기실 줄 알지만, 복수의 눈과 복수의 피를 받았는데 복수하지 않을 순 없었다.
* * *
Under500. 속칭 U500이라 불리는 곳에 이상한 남자가 등장했다.
사실 그곳에 있는 놈들이 이상한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그 붉은 머리 남자는 유난히 이상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메뉴판을 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화를 냈다.
[오늘의 정식/3,0-Kr]
[세흐림니르 수육/5,0-Kr]
[칼리돈가스/4,0-Kr]
[헤이드룬 미드/2,0-Kr]
(칼리돈 제외, 모두 발할라산.)
“이그나르, 이 비열한 장사치 같으니……!”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이는 없었지만, 모두가 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그쯤이라면 그냥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수준이다.
하지만 이후에 하는 행동들이 모두 기괴했다.
“세흐림니르 수육!”
그의 첫 주문에 주방 직원들과 투사들이 모두 인상을 와락 구겼다.
U500 식당에 있는 암묵적 합의.
세흐림니르 수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
그 쉬쉬하던 분위기를 그가 단숨에 깨트렸다. 그걸 왜 시키면 안 되느냐고? 주문한 음식을 받고 나면 바로 알아챈다.
“음, 세흐림니르는 생각보다 지독하군.”
하지만 붉은 머리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웅성웅성, 주방 직원들이 경악했다.
바깥 식당보다 싼 이유가 뭔가? 질 낮은 고기를 쓰기 때문이다.
세흐림니르는 거대한 멧돼지고, 부위에 따라 가격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고급 부위일 경우에는 1Kg에 5만 크로나가 넘지만, 저급한 부위는 정육점에 가서 공짜로 달라고 해도 주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 애완동물 사료로도 잘 쓰이지 않는 부위들이다.
그런데 투기장은 자체적으로 세흐림니르를 도축하며, 배분한다. 당연히 상위권부터 부위를 선택할 수 있다. 주방과 투사들의 실력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호가호위가 심한 편이다.
관리자들 역시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는 편이고.
“저걸 어떻게 먹어.”
“아르테미스 축산이 사업을 접으면서 들어온 칼리돈이 질도 좋고 맛도 좋던데…….”
“칼리돈 공포증이 아닐까?”
“그 광돈병 소문? 그거 우리 쪽 축산업계에서 낸 소문이라던데……?”
“쯧쯧, 저 남자가 바로 그 소문을 만들어 낸 사람이잖아. 아주 호되게 치이던데!”
붉은 머리 남자, 오디슨은 칼리돈에게 짓밟혔던 투사다.
그가 칼리돈가스를 기피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흐림니르 수육을 시킬 건 없지 않은가?
“그냥 오늘의 정식을 먹는 게 좋을 텐데…….”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주방 직원들.
그들은 오디슨이 세흐림니르 수육을 먹다 남기면 다행이라 여겼다. 먹다가 토하지만 마라- 생각하며 보고 있자니…….
우걱우걱! 열심히 잘도 먹었다.
“혀가 이상한가?”
“아니, 표정 봐. 죽으려고 하는데?”
오디슨의 평가가 한 단계 떨어졌다.
혀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정신이 이상한 게 틀림없다는 여론이 생겼다.
개중 한 사람은 생각했다.
‘세흐림니르의 재생력을 노리나?’
아무리 냄새나고 질긴 부위라고 해도 재생력은 있다.
그렇다면 재생력을 노리고 싼 부위를 많이 먹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럼 차라리 헤이드룬 미드(Mead, 벌꿀술)를 같이 시켰겠지?’
역시나 머리가 이상한 남자다.
“으으… 몸에 좋은 건 역시 입에 쓴가…….”
접시 바닥까지 핥아먹은 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주방 직원들이 모두 기겁했다.
저걸 다 먹은 것도 모자라, 저런 모자란 소리를 하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디슨은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식당을 나섰다. 느긋하게 앉아 있거나 차를 한잔하는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 일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게다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그의 몸에 걸친 옷이 엉망이 되었다.
분명 멀쩡한 옷이었건만 피와 땀, 먼지로 더러워지고, 해지고, 찢어졌다. 겨우 며칠 만의 변화라고 보기에는 극적인 면모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 덕에 오디슨은 ‘빨간 거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근데 대체 뭘 하는데 저런 꼴이 되는 거지?”
누군가의 의문이 모두에게 번졌다.
몇 가지 소문이 돌았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한다, 노숙자들과 싸움이 붙어 밀려난 거다 등등.
개중 가장 많은 이들이 내놓은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냥 미쳐서 떠도느라 저 꼴이 된 거지.”
미쳤다는 말이 가장 깔끔하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주방 직원들이 빨간 거지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자, 그 꽃가루가 식당을 이용하는 투사들에게까지 번졌다.
“빨간 거지, 대체 뭐 하는 거지?”
“식당 말고는 투기장 구석에 있는 이상한 데로 가던데…….”
“투기장 구석? 그… 훈련장이던가, 거기?”
누군가 겨우 떠올린 명칭에 투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U500에 훈련장이 있다고?”
“아무것도 없어. 아니, 아무것도 없지도 않을 정도로 엉망이야.”
훈련장을 가 봤던 투사가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바닥이 고르지도 못하고, 별 쓸데없는 돌이 잔뜩이야.”
“그딴 데서 무슨 훈련을 해?”
“훈련을 하려고 가는 게 아닌 거 아닐까?”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지 않으면? 모두의 눈에 물음표가 서렸다.
의문을 제기한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뭐냐, 투사들은 식당과 훈련장 사용이 가능하잖아. 대기실에서 죽치고 있으면 눈치 보이니까, 훈련장에서 살고 있는 거 아냐?”
생소한 규칙이었다.
식당은 누구나 사용하기에 잊을 수 없지만, 훈련장을 쓰는 이가 없기에 잊어버린 규칙.
그 규칙에 따르면…….
“여기서 이렇게 뭐지, 뭐지- 할 필요가 없단 거잖아? 우리도 투사니까.”
그들은 훈련장에 가서 빨간 거지가 뭘 하는 건지 볼 수 있다.
주방 직원들과 달리 그들은 투사였으니까.
우르르, 투사들이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끄윽……! 전사느은…….”
땀을 뻘뻘 흘리는 빨간 거지.
놈은 커다란 돌덩이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온몸에서 진땀을 흘리며 돌을 놓는다.
“헙! 기대지, 않는다아……. 크윽!”
그리고 다시 들어 올린다.
울룩불룩한 팔뚝에 힘줄이 지렁이처럼 솟고, 보기만 해도 허리가 아릴 정도로 무리한 자세였다.
게다가 팔과 어깨, 허리만 가지고 들어 올린 것도 아니었다.
“왜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돌을 드는 거야?”
돌을 잡고, 굽혔던 무릎을 편다. 그리고 난 뒤에야 허리를 펴고 돌을 든다.
투사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으로 보였다.
“역시, 미친놈이었군.”
“설마 힘을 키우려고 하는 짓은 아니겠지?”
“미드 한 잔을 마시는 게 저 헛짓보다 나을걸? 게다가 하계에서도 저런 무식한 짓은 안 했어.”
“관절이 다 박살 날 테니, 저런 짓을 하는 게 이상한 거지.”
몸을 단련하는 훈련에 익숙한 이들이다.
발할라에 오고 난 뒤에는 전혀 할 필요 없는 훈련이었지만, 지식은 녹이 슬었을지언정 멀쩡했다.
저런 식으로 몸을 굴리면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전사는! 끙! 으으윽, 기, 기대지 않는다악! 끄헉!”
기어코 사달이 났다.
빨간 거지의 몸에 묻은 피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쿵!
혹사당한 몸이 돌을 놓쳤다.
몸을 따라 구른 돌이 바닥에 떨어졌다.
“끄어어어!”
울룩불룩, 팔다리의 근육들이 통제를 벗어나 경련했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이 쯧쯧 혀를 찼다.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저딴 짓을 하다니…….”
그렇게 투사들이 어이없어 할 때,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U500 투기 경기를 관리하는 메르키였다.
“까악까악! 여기서 뭣들 하나!”
메르키의 등장에 투사들이 반색했다.
“오! 메르키 공!”
“싸움이야? 여자를 안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도 껴야지! 쉬운 놈으로 부탁해!”
투사들의 너스레에 메르키가 고개를 저었다.
‘쉬운 싸움만을 바라고, 조금만 다칠 것 같으면 항복을 해 버리니……. 쯧.’
현명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언제까지나 밑바닥 투사일 수밖에 없다.
메르키는 피와 땀으로 범벅된 채 쓰러진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끄흐흐, 끄윽! 저, 전사는… 기대지 않는다아……. 헙! 끄윽…….”
돌덩어리에 기대앉은 채 저런 소리를 하다니.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사정을 아는 메르키마저도 그렇게 생각할 꼴이었다.
‘근성 하나는 발할라 최고가 아닐까?’
메르키가 생각했다.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 메르키는 오디슨에게 물었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느냐고. 힘을 기르고 싶다면, 그냥 헤이드룬 미드를 마시라고.
그가 답했다.
‘헤이드룬 미드, 좋지, 알아. 그것만 마시면 힘이 세지니까. 그런데 말이야. 왜 오딘이나 토르, 티르께서는 근육질이실까? 헤이드룬 미드는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데 말이야.’
오디슨은 헤이드룬 미드가 주는 힘이 근육과 섞였을 때 완벽하리라 믿었다.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믿음으로 저런 처절한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다.
메르키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라면 언제든지 경기를 주선할 수 있지만…….’
눈앞에서 쉬운 경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주선할 경기가 있을까?
쯧- 혀를 차고, 투사들에게 말했다.
“알았다! 경기를 만들어 주겠다!”
“오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흐흐, 쉬운 놈이지? 그렇지? 패배 수당만 받아서는 술 한잔하기도 힘들단 말야.”
이들은 말하는 술은 일반적인 술이었다. 아무런 이능도 담기지 않은 술은 엄청나게 쌌다.
U500에 오래 있던 투사들은 일정 수준의 힘을 얻고서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았다.
오디슨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끄윽…….”
관절과 근육이 아파 신음하는 오디슨과 희희낙락하며 웃는 투사들.
지금은 오디슨이 빨간 거지니 뭐니 놀림을 받지만, 상황이 바뀌는 건 머지않았으리라.
메르키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오디슨이 훈련을 시작한 지 5일째.
“…더는 안 되겠는데.”
훈련이 끝났다.
오디슨이 고통을 더 이상 못 버텼느냐고?
아니,
“돈이 떨어졌어.”
그의 주머니 사정이 훈련을 견디지 못했다.
빨간 거지가 다시 창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