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위기를 기회로 (1) >
월챔이 끝나기는 했지만 정명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ATX의 탑 라이너가 다른 팀으로 떠나며 공석이 된 자리를 정명이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망의 첫 연습 날.
연습을 시작하기 직전, 감독이 근엄한 표정으로 정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부터 네가 ATX의 탑 라이너다. 요즘 팀의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한 거 알고 있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후, 상투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열심히 해라, 다른 사람들하고 잘 지내라 등등의 뻔한 말이었다.
사실 감독으로써도 새로 주전이 된 선수를 위하여 의미 있는 조언을 건네고 싶었지만, 이 나이 어린 선수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겨우 고3이라고 하지 않았나? 가끔 보면 이 녀석은 행동하는 게 무슨 프로게이머 경력 10년쯤 되는 사람처럼 보인다니까.’
딱히 할 말이 없는 감독과는 달리, 코치는 무척이나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정명의 옆에 붙어 있던 전직 프로게이머 코치는 뭐가 그리 불안한지 정명에게 끊임없이 당부의 말을 건넸다.
“지난번처럼 또 형들 구박하지 말고. 요즘 보니까 진성이가 아주 기죽은 것 같던데.”
“내가 뭐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하나요? 진성이 걔가 워낙 답답하게 플레이 하니까 그렇죠. 잘 하면 아무 말도 안 할 거 아닙니까 잘 하면.”
정명이 주전으로 올라간 후 공식적인 첫 연습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정명이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정명은 기존의 1군 팀원들을 비롯하여 2군, 연습생 등 ATX 팀 내의 모든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보았고 그럴 때마다 정명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유는 팀원들이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용덕이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잘하긴 뭘 잘해요? 완전 노답이구만. 형만 아니었으면 진짜...어휴.”
“윽박지른다고 실력 안 오르는 거 알고 있지? 이제부턴 조금 부드럽게 말 해 봐.”
“뭐...알겠습니다. 저도 같이 잘 해보자는 거지, 싸우자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잔소리를 줄여보겠다는 정명의 다짐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지켜지지 못 했다.
잠시 후 이뤄진 연습 경기에서 팀원의 실책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라인을 커버하겠답시고 탑으로 올라온 정글러가 라인을 밀고 가자 얼굴을팍 찌푸렸다.
“아이 씨, 이건 진짜....라인을 이따구로 만들어놓으면 난 뭐 갱 당해서 죽으라는 거예요 뭐예요?”
“.....”
“갱킹 올 거 같으니까 근처에서 있어 봐요. 그리고 핑와도 좀 박아 주시고.”
“어, 그래...”
‘이러니까 월챔 8강 정도에서 탈락하지. 이 팀은 더 빡세게 굴려야 쓸 만해지겠어.’
정명은 자신보다 나이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도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어려졌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새파랗게 어린 녀석들이 너무 못하는 것을 볼 때면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잔소리를 듣는 팀원들 또한 정명이 에이스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곳은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은 혀를 쯧쯧 찼다.
‘저 녀석, 다음 주 인터뷰에서도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지?’
다음 주에는 기자와의 인터뷰가 있다.
공식적으로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이니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감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명에게 몇 가지를 당부해두기로 했다.
“야, 너 다음 주에도 그렇게 하다간....”
“네? 다음 주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차라리 이참에 크게 한 번 데이는 게 낫겠지.’
한국에서 저런 태도로 인터뷰 했다가는 커뮤니티에서 몰매 맞기 딱 좋다. 괜히 선수들이 ‘열심히 하겠다, 최선을 다 하겠다.’ 따위의 인터뷰만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의 인터뷰에서 정명은 평소의 태도대로 인터뷰를 했다.
평소의 태도란 마치 월챔에서 3번쯤 우승한 것 같은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태도는 커뮤니티에서 큰 욕을 먹기에 충분했다.
감독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미래에서는 사라지게 될 윈터리그가 지금은 아직 남아 있었고, 덕분에 정명은 꽤나 빨리 데뷔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긴장하지 말고. 알았어?”
“네.”
“다른 애들이 욕하는 건 신경 쓰지 말고. 네 실력을 보여 주면 다들 입 다물 거야.”
“걱정 마세요. 신경 안 써요.”
“자, 심호흡 한 번 하고 가자. 들이쉬고, 내쉬고....”
“아휴, 저 긴장 안 하니까 걱정 말고 이만 들어가세요.”
꼭 그런 선수들이 있다. ‘연습실에서만 잘 하는 연습실의 제왕’ 같은 선수들이.
연습실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지만 막상 무대로 나오면 긴장 따위로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은 그동안 수도 없이 많았고, 감독은 그 부분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걱정하고 있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정명은 처음 카메라를 보는 생 초짜가 아니라 방송 경험이 무척이나 많은, 베테랑중의 베테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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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막 시작되던 그 시각.
아역배우로 방송생활을 시작한 송하니는 방송국 대기실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딱히 한가해서 TV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다음 촬영을 위한 대기 시간이 엄청나게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대기실을 혼자 쓰는 것도 아니었다.
-경기를 시작 합니다!
“오, 한다한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 때우기 딱 좋겠네.”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는 게임의 인기를 반영하듯, 방송국 대기실에서도 방송 경기가 켜져 있었다.
다른 단역 스태프들은 그 모습을 두며 훈수 두기에 바빴다.
“쟤는 근데 왜 전기 쥐를 골라놓고 시작 아이템으로 칼을 산거야? 전기 쥐는 AP 캐릭터 아냐?”
“글쎄. 뉴메타 해보겠다고 이상한 거 꺼내든 것 같은데?”
“신인이라고 했지? 압살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우이씨...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하니가 알기로는 지금 혀를 차며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초등학생인 자신보다 게임을 못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인 정명에게 혀를 차고 있으니, 하니의 기분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게임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광역 궁극기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조금 성급한 것 아닌가 했는데, 들어가는 타이밍이 예술이네요!
경기가 클라이막스로 진행되자 사람들의 눈이 TV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경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곧바로 송하니씨 들어가실게요!”
“앗, 넵!”
경기가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하니는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보더라도 승패가 명확하게 갈린 상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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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대박 신인이 나왔는데요?
-어쩐지 ATX에서 고스트를 너무 쉽게 내보내줬다 싶었는데, 이런 선수를 데리고있었군요!
정명의 첫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름 실력 좋은 팀을 상대로 수월하게 캐리를 했고,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자신의 플레이를 각인시켰다.
그 덕분에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상당히 좋았다.
대형 커뮤니티 언벤에서는 정명이 거만하다 뭐다 했던 평가가 이미 싹 들어간 상태였다.
정명은 핸드폰으로 게시물을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입 털만 하네.
-저 정도면 성격 더러워도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님?
-ㅇㅇ. 저 정도면 패드립 쳐도 인정이지.
?헉, 저놈이 패드립까지 치고 다녔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ㅎㅎ.
웃으며 핸드폰을 보고 있던 정명은 감독이 다가오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불안해하던 감독도 정명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오늘 수고 했어. 기념으로 회식이라도 한 번 해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안 되네. 주말에나 보자고.”
“네. 들어가세요 감독님.”
정명 또한 들뜬 마음을 품은 채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다른 팀원들은 팀 연습실 내부에 마련된 숙소에서 자지만, 정명은 혼자 생활하고 싶다며 근처에 오피스텔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숙소가 불편하다는 건 아니지만...아무래도 혼자 쉬는 게 좋지.’
사실 몇 몇 사람들은 팀워크를 해칠 수 있다며 무척이나 반대를 했다.
하지만 정명은 계속 좋은 성적을 내주다 보면 토를 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의견을 밀어붙였고, 결국 3번 이상 지각하면 숙소에 들어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나가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뭐.’
정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떠나려던 그 때, 정명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잠깐만 이쪽으로 와 바!]
밤 10시에 온 문자는 스마트폰도 없이 어린이용 핸드폰을 쓰고 있는 하니의 문자였다.
다짜고짜 방송국 근처로 와달라는 하니의 말에, 정명은 한숨을 폭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
“오빠 피곤해 이것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톡으로 보내.”
[조은 선물 줄께!]
‘선물?’
.......
“오빠빠빠빠!”
결국 정명은 방송국 근처로 가서 하니를 만났다.
하니는 오래 서있어야 해서 힘들었다던가 그런 얘기를 늘어놓았고, 정명은 그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하니의 볼을 쭉 꼬집었다.
“어, 하니야. 인사는 됐고 선물이나 빨리 내 놔. 오빠 빨리 쉬고 싶으니까.”
“으아아앙, 알아써. 놔저!”
정명에게서 풀려난 하니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돈이라도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정명이 슬쩍 보니 종이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종이였다.
“뭐야? 그냥 종이 아냐?”
“기다려바. 이제 이 종이가 100만 원짜리 종이가 될 거니까! 엣헴!”
그러더니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정명에게 종이를 다시 건넸다.
“자!”
“뭔데 이게?”
선물의 정체는 송하니의 싸인이었다.
그것도 겉멋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사인이었다.
“열심히 연습해써! 첫 승리 기념으로 주는 거야!”
정명은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멈칫했다.
나중에 유명한 아이돌이 되는 송하니의 첫 번째 싸인 정도라면 나중에는 가치가 엄청나게 오를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명은 의기양양해 있는 송하니에게 혹시나 하고 물었다.
“혹시 이게 1호 싸인인 거냐?”
“아아니? 한 5호 쯤?”
정명은 아직 거의 무명인 아역배우임에도 싸인을 많이도 해줬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많이도 받아 갔네. 누구누구 줬는데?”
“엄마랑 아빠랑 언니랑...어...몽이도.”
“몽이?”
“우리 집 강아지 이름.”
“아, 그래. 아무튼 고맙다.”
그 후, 하니는 어디서 본 건 있는 모양인지 정명에게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정명은 윗사람이 악수를 건네는 거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피식 웃으며 조그마한 손을 맞잡았다.
“힘내서 꼭 우승해. 오빠 요즘 욕 마니먹던데 대신 내가 팬 해줄께!”
“오냐, 너도 힘내라.”
그 말을 끝으로 정명은 하니와 헤어졌다.
조금 어이없는 일로 불려 나오긴 했지만, 정명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았다.
데뷔전에서 멋진 승리를 했고, 덤으로 귀여운 소녀팬까지 얻었으니까.
아직 자그마한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번에도 또다시 전설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그로부터 30분 뒤.
정명은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우편함부터 확인했다. 우편함에는 여러 개의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뭐지 또 돈 내라는 건가?’
요즘 시대에 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광고 아니면 돈 내라는 고지서.
정명은 또 내가 무슨 돈을 썼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온 편지를 손에 들었지만, 편지를 뜯을 것도 없이 발신인을 보자마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병무청]
“아 나 이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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