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만남 (4) >
‘나쁘지 않네. 단기 과외의 효과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정명은 ATX의 연습실에서 쿠론과 함께 에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만난 지 며칠 만에 상당히 친해진 쿠론 또한 함께였다.
쿠론은 정명의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며 딴 짓을 했고, 제 엄마의 모습이 화면이잡힐 때만 경기 화면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언제 나와요?”
“금방 나올 거야.”
애초에 초등학생 정도의 애들은 집중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30분 이상의 경기를 집중해서 보기엔 좀 힘들기는 했다.
-꽉 막힌 경기를 탈주닌자가 숨통을 틔워주네요.
-정말 경기 전만 해도 당연히 BIT가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ETH가 의외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쿠론은 제 엄마가 활약하는 게 기분이 좋은지 그 모습을 보며 헤헤 웃었고, 정명은 그런 쿠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엄마, 잘 하고 있구나. 다행이네.”
“아자토스가 마법을 걸어 준 덕분인 것 같아요. 고마워요!”
“별 말씀을.”
아자토스는 정명의 게임 내의 아이디였다.
예전에는 다른 아이디를 썼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이 아이디를 쓰고 싶어서 이것으로 결정했다.
“엄마가 아자토스 칭찬 많이 했어요! 되게 실력 좋은 사람이라고요. 근데 가끔 짜증난대요.”
“짜증난다고?”
“네. 게임할 때 옆에서 계속 훈수 두니까 짜증난대요. 그러다간 결혼 못할 거라고도 했어요.”
“어, 그래. 이번에도 결혼 못 하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
그냥 엄살 부리는 게 아니라 그랬다간 정말로 큰일이었다.
정명은 내심 위기감을 느꼈지만, 쿠론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계속 마법 타령을 해댔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자토스 정말 마법사에요?”
“....어, 응. 뭐 비슷한 거야. 그런데 어디 가서 말 하면 안 된다?”
“엄마한테도요?”
“엄마한테도. 그러면 마법이 풀리거든.”
“헉! 정말요?”
연습실에서 시덥잖은 소리를 하고 있으려니, 다른 팀원들이 주위로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명의 무릎 위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꼬마가 무척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오오, 완전 귀엽다. 인형 같아!”
예은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쿠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남자 팀원인 형배가 쿠론에게 손을 뻗었을 때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명백하게 거절의사를 표시했다.
형배가 시무룩해하며 떠나자, 정명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저 녀석은 마음에 안 드니?”
“엄마가 남자 어른은 조심하랬어요.”
“음....나랑은 친하잖아?”
“아자토스는 조금 달라요. 언제 만난 적 있는 사람인 것처럼 뭔가 익숙하거든요.”
“그러니?”
“엄마도 그랬어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고요.”
‘믿음이 간다라. 하긴, 아무리 내가 타 팀의 멤버로 신원이 보장되어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애를 맡기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긴 하지.’
생각해보면 에리와 쿠론뿐만 아니라 하니도 꽤나 단시간에 친해진 케이스였다.
정명은 그들에게 무언가 예전의 기억이 남아있는 건가 추측했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에리의 팀이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정명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안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정확히는 정명이 아니라 ATX라는 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한국 팀이었던 ATX가 북미의 1위 팀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결국 8강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 씨 진짜. 내가 그러니까 백작 치지 말자고 했잖아! 누가 쳤어 대체?”
“거기서 안치면 다른 방법이 있나? 어차피 지는 게임, 도박이라도 한 번 해 봐야지!”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팀원들도 오늘 만큼은 티격태격하며 노골적으로 짜증을 드러냈다. 남 탓을 함으로써 자신의 멘탈을 보호한다는 인간의 추잡한 본성일지도 몰랐다.
정명은 격하게 말다툼을 하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 마음속에 꿍쳐두고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게 낫다. 치고 박고 싸워라. 대신 뒤끝만 남기지 마라.’
아쉬운 것은 정명도 마찬가지였다. 4강까지만 가도 얻을 수 있는 포인트가 어마어마한데, 8강에서 떨어지면 별 거 없었으니까.
‘에이씨, 우승하면 포인트가 100만이 들어오는데 힘 좀 더 써보지 그랬어. 그럼 좀 더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싸우던 팀원들은 이내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리그에서 떨어진 이 시점에서 연습실에 갈 이유는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연습실에 돌아온 것은, 작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정명뿐이었다.
“안녕하....어라?”
평소 북적거렸던 연습실이 텅텅 비어있었기에 쿠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정명을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조르르 달려왔다.
“아자토스! 오늘은 왜 아무도 없어요?”
“리그에서 떨어졌거든.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가 안 좋게 나와서 다들 실망이 무척 커.”
“그렇구나.”
쿠론은 리그에서 떨어졌다고 했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명을 제외한 사람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떨어지건 우승하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명은 씁쓸하게 웃으며 쿠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뭐...아무튼 그렇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자주 연락할게.”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돌아가다니요?”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제 경기에서도 떨어졌는데 여기에 더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런.....”
쿠론은 충격이라도 받았다는 표정이었다.
영상통화로 종종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쿠론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쿠론이 전혀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
정명의 팀인 ATX가 8강에서 떨어진 후, 뜻밖의 사람이 정명을 찾아왔다.
정명이 훈수를 두면 항상 짜증만 냈던 에리가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정명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2:0이라. 경기 내용도 썩 좋지 못 하던데.”
“네, 아쉽게 됐어요. 다들 열심히 준비 했거든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지금 시점에서 열심히 준비한 게 의미가 있냐? 0 아니면 1. 패배 아니면 승리. 여기는 그런 곳이잖아.”
“하하....”
“거기 감독도 참 아쉽겠어. 네가 라인업에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8강이 뭐야, 결승까지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에리가 진지하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그동안 에리는 정명의 조언을 받으며 실력을 쑥쑥 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가르쳐 주는 척 하면서 스탯을 올려주었을 뿐이지만.’
하지만 그것을 알 길이 없는 에리는 정명 덕분에 자신의 실력이 급성장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다른 사람들처럼 정명이 정말 천재적인 플레이어라고 굳건히 믿게 되었다.
“그래, 그래서 언제 떠나는데?”
“글쎄요. 일주일 내로 가지 않을까요? 경기에서 처참하게 졌는데 어디 놀러가지도 않을 거고요.”
“디즈니랜드 표 공짜로 준다던데. 내가 들었어.”
“디즈니랜드 가봤자 뭐 흥이 나겠습니까. 집에서 잠이나 자고 싶지.”
“그것도 그러네. 그럼 그동안 애나 좀 봐줘. 내가 바빠서 놀아주기 힘들어. 게다가 쿠론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니까....”
평소 같았으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이제는 조금 문제가 있다. 쿠론이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처럼 정명의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음, 글쎄요. 요즘 얌전히 있던 애가 점점 말썽이 늘어 가는데 잘 돌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아, 이제는 너한테도 그러는구나. 요즘 네 말을 잘 듣길래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에리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한다.
평소에는 말을 잘 듣지만, 어느 때는 이상할 정도로 말썽을 피운다고.
잠깐 고민하던 에리는 상쾌한 얼굴로 황당한 소리를 했다.
“그럼 그럴 때는 엉덩이 때려 줘. 그럼 말 잘 들어.”
“예?”
“엉덩이 때리면 된다고. 너무 아프게는 말고.”
“아니, 잠깐. 제가요?”
“너는 믿을 수 있으니까.”
“아니아니 잠깐만요. 믿어 주시는 건 고마운데요...”
말 안 듣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려준다.
부모가 하면 훈육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했다간 성추행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그런 행위였다.
그리고 아이를 상대로 성추행 혐의를 받으면 ‘조금 곤란하다.’ 라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정명은 정말 드물게도 허둥지둥거리며 당황한 티를 역력히 내고 있었다.
“훈육이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휴....그래요, 그랬더니 애가 말을 잘 듣던가요?”
“아마도?”
“아마도는 뭔가요?”
“말을 듣는 게 일시적이었거든.”
때문에 주기적으로 때려줘야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명은 에리도 참 주먹구구식으로 아이를 키운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일을 하며 혼자 애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아, 그리고 앞으로는 말 편히 해.”
“예? 아니 잠깐만요, 그 얘기는 벌써 끝난 겁니까?”
“그럼 하루 종일 엉덩이 얘기나 하고 있을래?”
“아뇨, 아닙니다. 아니, 아니야. 그럼 누나라고 부를게.”
“.....그래, 그러던가.”
정명은 에리와 좀 더 친해졌다는 것을 느끼며 에리와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곧바로 사건이 터졌다.
쿠론이 실수인 척하며 정명의 키보드에 음료수를 쏟았던 것이다.
실수인 척을 했지만 연기를 하도 못 해서 누가 봐도 고의인 것이 눈에 보였다.
“으악! 내 키보드!”
“베에, 싸구려 같은 데 하나 더 사!”
그렇게 말하며 도발하듯 혀를 내밀고는 보란 듯이 킥킥 웃었다. 예전의 말 잘 듣던 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정명은 애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으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콩알 만 한 게 진짜 엄청 속 썩이네. 그보다 저거 30만 원짜리 키보드였는데하나 더 주문해야겠군.’
그냥 물도 아니고 설탕이 들어간 찐득찐득한 음료수라면 답도 없다. 버려야 한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정명은 소리치며 화를 내는 대신, 쿠론을 따로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니?”
“몰라 이 바보야!”
그리고는 정명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치며 대들었다.
꼬마가 때리는 것이기에 당연히 아프지는 않지만, 정명의 인내심을 끊어놓는 데는 충분한 일격이었다.
정명은 에리가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닌가 했지만, 결국 엄마의 양육방식을 그대로 이어나가기로 했다.
애초에 정명 본인도 애를 키우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니까.
“쿠론, 따라 와.”
“.......”
정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연습실 대신,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으로 쿠론을 데려갔다.
아무리 정명이 육아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는 해도,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체벌을 하는 것이 무척 안 좋은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잘못했으니까 엉덩이 맞을 거야. 알았어?”
엄하게 말을 했지만 우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론은 정명이 침대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릎에 엎어져서 엉덩이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다.
정명은 이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자주 연락할게.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정명은 화가 나서 체벌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쿠론과 사이가 안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쿠론은 웃는 얼굴로 정명에게 먼저 다가와 줬다. 그것도 말을 잘 듣던 평소의 그 모습으로.
쿠론은 공항으로 떠나는 정명에게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잘 가요! 아빠 생긴 거 같아서 기분 좋았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정명은 그렇게 두 모녀의 배웅을 받으며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제 자신의 첫 데뷔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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