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큰 그림 (1) >
팀원들뿐만 아니라 해설들 또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 1위 팀의 자리를 지켜왔던 KAO가 3:0으로 완패한 것이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정명이 오자 처음부터 경기를 보고 있던 에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한 경기랑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어. 1경기는 꽤 팽팽했는데, 2, 3경기가니까 맥을 못 추더라.”
한국 커뮤니티는 이미 멘붕 상태였다.
정명은 반응이 궁금하여 커뮤니티에 들어갔는데, 수도 없이 올라오는 글 때문에 서버가 삐걱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미친, 다른 놈들도 아니고 중국 팀한테 지다니.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 하지 마라.
?중국 팀이니까 진 거지. 거기 인재 풀이 얼마나 넓은데.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우리에게는 최종 병기가 남아 있으니까.
?그게 뭔데?
?뭐긴 뭐야, 전승으로 결승까지 올라온 레전드지. 차라리 잘 됐음. 한국vs한국이면 대회 흥행이 덜 될 테니까 ㅇㅇ;
커뮤니티는 끓어오르긴 했지만 넘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 NHG라는, 한국 1위 팀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해설들 왜 저렇게 호들갑이냐? 누가 보면 트롤 해서 진 줄 알겠네.”
“엄청 까일까봐 미리 선수 쳐두는 거지 뭐. 근데 저 팀이 저렇게 잘 했었어?”
“일단 중국 1위 팀이긴 하니까...”
쿠론과 얘기하던 석진이 말을 흘렸다. 본인도 중국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저팀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자신의 수첩을 꺼내어 다시 한 번 과거의 기록을 살폈다.
‘팀 오리엔탈이라...저런 팀이 있었던가?’
하지만 수첩에는 오리엔탈이라는 이름은커녕 이미 자신이 꺾었던 TAC가 우승을 했다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역시 없어. 저렇게 잘 했으면 기억에 어렴풋이라도 남아 있었을 텐데 내 기억에도 없고.’
팀 오리엔탈은 요즘 유행하는 한국인 용병이나 한국인 코치가 일절 없는, 오직 중국인만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중국이 세계 최고라는, 입에 말하기도 민망한 중화사상에 기초하여 이러한 팀 구성을 짠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처음 와보는 메테오는 그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듯 했다.
“그거 뭐랄까. 듣기에 좀 이상한데? 인종차별 뭐 그런 거야?”
“그런 개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민족이 세계 최고의 민족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자부심이 대단하지.”
“아...그래?”
중국에서 생활해본 적 있는 석진이 말을 보탰다.
“뭔 소리냐 싶죠? 사실 진짜 그래요. 중화사상이 얼마나 짜증나는지는 굳이 지금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적당히 이해한 메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구단주가 별로 오픈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됐어, 그 놈들 처발라주면 중화사상이고 뭐고 집어 치우겠지 뭐. 우리가 더 잘 해.”
상대팀을 욕하는 쿠론을 뒤로 한 채, 정명은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리고 4강전 승리로 얻었던 보상을 확인했다.
[4강전 승리 보상으로 50만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잔여 포인트 : 83만 2340]
‘하, 포인트 83만이라. 이 정도면 나라도 살 수 있겠어.’
퀘스트 보상은 이미 봤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즐겁다.
83만이면 모든 스탯을 100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일단은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니. 북미에서 끙끙 대던 시절에 50만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면 리그를 아예 부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일찍 알아 봐야 어쩔 수 없기는 했다. 지난날은 실력이 안 되어서 못 받았던 것이니까.
.........
[여당 국회의원 김칠성, 한국 대표팀 NHG에게 응원 메시지 보내다]
‘아 진짜 이건 좀...이렇게 엮지 마 제발.’
정명이 한 뉴스 기사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팀의 유명세에 한 숟갈 얹어보려는사람들이 워낙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지 진짜 안 좋은 사람이 응원해 봐야 도움 안 된다고.’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에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담되겠어.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네.”
“조금 그렇긴 해요. 한 판만 져도 워낙 죽일 듯 물어뜯으니까. 그보다 석진이는요?”
“아직 얘기 중.”
그 말을 들은 정명이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슬쩍 훔쳐보니, 휴게실에서 석진과 조이슬 아나운서가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애가 잘 안 풀린다고 하더니, 이렇게 급진전 될 줄이야.’
KAO가 패한 다음 날, NHG가 머물던 호텔에 조이슬 아나운서가 찾아왔다.
명목상으로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국 팀을 응원하겠다고 온 것이었는데, 잠깐 이야기 할 게 있다며 휴게실로 들어간 둘은 30분이 지났는데도 담소를 나누며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아직 얘기 안 끝났네?”
“아이씨, 깜짝이야. 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정명은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정명의 뒤에서는 쿠론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석진이 있는 휴게실을 훔쳐보고 있었다.
“뭐야, 둘이 아직 안 했어? 30분이나 지났는데.”
“하긴 뭘 해, 이게 발랑 까져가지고.”
“흐음, 아쉽네. 재밌는 구경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쯧쯧. 괜히 남의 연애사업 방해하지 말고 할 거 없으면 솔로랭크나 한 판 더 돌려라.”
정명의 말에, 쿠론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불가. 새로운 아이디가 나올 때 까지는 어림도 없겠어.”
“이런, 아직도?”
이번 경기는 무려 전승 진출 팀vs전승 진출 팀의 대결이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빅매치였다.
당연히 팬들의 모든 관심이 쏠리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에 대한 열기와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조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승전에 대한 열기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중국팀이 이기길 바라는 몇몇 극단적인 플레이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명은 솔로랭크를 돌리고 있는 메테오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플레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아나 진짜 이것들이 미쳤나. 일부러 저격 트롤을 해?”
“아직도 그래?”
“어. 아무래도 다른 팀 사람의 아이디를 빌려야 할 것 같은데. 게임사에 문의라도해 봐야겠어.”
프로들이 받은 슈퍼계정은 참 찾아내기가 쉽다. 상당히 높은 랭크에 있음에도, 판수가 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랭크의 사람들은 NHG의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각종 트롤을 일삼았다.
물론 모든 중국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만난 9명 중 1명만 트롤을 해도 경기 자체가 엎어지기 때문에 NHG는 제대로 된 솔로랭크를 해 나갈 수 없었다.
자신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트롤 때문에 메테오는 결국 게임을 강제 종료 시켜버렸고, 작게 욕을 하며 말했다.“
“젠장, 할 수 없지. 솔로랭크는 버리는 수밖에.”
“그래, 별로 아쉬울 거 없지. 솔랭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이제 연습 게임위주로 하자고. 연습할만한 팀이 얼마나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는 중국 사람들 있지 않아? 그 왜, 지난번에 같이 중국 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말이야.”
“연락이야 한참 전에...그러니까 2개월 전에 중국 오자마자 해 봤지. 그런데 지금은 다들 은퇴했다고 하더라.”
기존에 있던 선수들은 넉넉한 시간과 수입,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하여 인터넷 방송국으로 이적했다고 한다.
중국 팀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정명이 기둥으로 있었기에 다들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나갔을 것이라고.
트롤 소동은 NHG가 솔로랭크를 포기함으로써 무력화되는 듯 했지만, 악성 중국인들의 공격은 더욱 심해졌다.
몇 시간 뒤, 연습게임을 하던 도중 이상함을 느낀 에리가 경기를 중지시켰다.
“어라, 이거 핑이 너무 튀는데? 이래서야 연습이고 뭐고 안 되겠어.”
“잠깐만요, 내가 내려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정명은 호텔의 IT 담당자에게서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을 받았다.
외부로부터의 디도스 공격 때문에 아예 호텔 전체 인터넷이 먹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석진은 이를 갈았다. 그야 이 짓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했으니까.
“와, 이 꼴통새끼들 진짜...아니, 중국이 원래 이런 나라였던가?”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중국에서 활동할 때 좋은 사람들 참 많이 만났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좀 심하긴 하네.”
“으으...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죠? 인터넷이 아예 먹통이 됐는데. 이 게임은 오프라인 모드도 지원 안 하잖아요.”
“다른 네트워크를 쓰던가 해야지 뭐. 방법이야 많지. 귀찮지만.”
인터넷이 막혔어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은 어쩔수 없었고, 팀원들은 어떻게든 이 경기에서 이겨 보이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그 때, 그런 극우 성향의 중국인들을 한 방에 잠재우는 사람이 등장했다.
........
[모든 게임 팬들에게 간곡히 전한다.]
*나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 이렇게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나를 믿어라. 믿는다면 싸워 이겨서 우리를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승리의 트로피를 바치겠다!
.....
정명이 길게 적혀 있는 SNS를 번역하여 다른 팀원들에게 들려주자, 팀원들은 어이없다는 듯 자신들의 감상을 말했다.
“헛소리를 길게도 적어 놨네.”
“근데 왜 말투가 저딴 식인 거야?”
“우음...”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 SNS 한 방으로 방해꾼이 순식간에 줄어들었으니까요.”
중국의 1위 팀인 팀 오리엔탈은 기존의 인기선수를 다 꽃아 넣은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은 단연, 라이언이라는 혜성같이 등장한 게이머였다.
? 적을 도와주다니, 대인배다 대인배...
?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기다니, 중국인답군.
? 대체 없는 게 뭐야? 재벌 2세에다 잘생긴 얼굴, 예쁜 애인까지. 그야말로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뭐죠...이거 혹시 사람 동원한 건가요? 엄청 오글거리는 댓글이 많이 보이는데요.”
“원래 그런 동네다.”
짧게 자신의 감상을 말한 석진과는 달리, 쿠론은 인상을 쓰며 대놓고 욕을 했다.
“재수 없는 새끼...진짜 마음에 안 든다.”
“누구?”
“뭘 물어봐. 저거 빨아주는 놈이랑 저 놈 본인, 그냥 다 x같아.”
자신이 할 말을 쿠론이 대신하자, 정명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동감이다. 저딴 말 할 거였으면 진작 좀 말하지, 이제 대책 다 세워 놓으니까 슬슬 입 터는 거 정말 열 받는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인정할 부분이 있기는 했다.
저 글을 쓴 라이언이라는 게이머는 댓글의 말대로 꽤나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정명은 조 추첨식에서 저 선수와 마주칠 수 있었고, 그 때 능력치를 관찰하여 수첩에 적어두었다.
‘평균 능력치가 나랑 비슷한 녀석은 정말 처음 본다.’
[라이언]
피지컬 (91/92)
정신력 (90/92)
오더 (92/93)
판단력 (99/99)
‘판단력 99라. 진짜...사람도 아니다. 괴물이다 괴물.’
라이언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저 선수에게 붙은 수식어는 참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타이틀은 어린 나이에 바둑계를 평정한 천재 중의 천재.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비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바둑에서도 그랬지만 프로게이머도 정상에 오른다면 곧장 은퇴할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조금 삐딱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진가는 KAO와 펼친 경기의 모니터링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운영 참...”
“잘 하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해야 한다. 운영능력이 지금껏 봐왔던 팀 중에서 최강이라는 것을.
-큰 그림 그리나요?
-토끼몰이 시작합니다, 아 이거 위험해요!
“으음, KAO가 이렇게 당했군. 당할 만하다.”
“고민은 나중에 하고 우리도 일단 이동하죠?”
“그래, 그러자.”
팀원들이 다음 호텔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사실 이렇게 자꾸 돌아다니는 게 귀찮기는 한데, 조별리그, 8강, 4강, 결승은 치러지는 지역이 전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관람 기회를 주겠다는 주최측의 의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승은 당연히 베이징에서.
정명은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결승전이 펼쳐지는 장소인 베이징으로 향했다.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