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해외 진출 (4) >
“뭐요? 내가 눈맵을 했다고?”
외부에 설치된 이 무대는 조금 부실하게 설치되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결함 때문에, 선수들이 고개를 조금만 내밀면 팬들이 보는 대형 스크린을 살짝 볼 수 있는 그런 구조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좀 억울하네. 내가 뭐 하러 눈맵을 해. 열 번 싸우면 열 번 다 이길 자신 있는 팀한테.’
정명은 거두절미하고 영상 확인을 요청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조금 어이가 없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정명은 팀의 유일한 스태프인 에리와 함께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이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저건 햇빛이 눈 부셔서 잠깐 고개를 돌렸던 건데. 조금 애매하게 보이긴 하네.’
정명이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눈맵으로 보일 수도 있었고, 눈맵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 각도도 애매해서 정확히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으므로, 몇 번을 돌려봐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진실은 저 너머에’ 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자꾸 끌리자, 에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맵이고 뭐고 의미가 있나요? 정 그러면 재경기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KS측에서는 라인스왑 의도를 들켜서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몰수패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별 리그는 3전 2선승제가 아닌, 단판 승부로 펼쳐진다.
그리고 8강에 진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승리는 최소 3승.
특히 조 1위 진출이 유력한 NHG에게 1승을 따내면 8강 진출이 무척이나 긍정적이게 되므로, KS는 건수가 잡히자마자 작정하고 물어뜯기 시작했던 것이다.
‘KS가 대만 때문에 자력진출이 좀 힘들어 보이기는 하니까.’
이후 심판들은 물론이고 상대 감독까지 합세한 지루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30분 후, 마침내 결정이 났는지 에리가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에리는 오랜 토론에 지쳤는지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결론 났어요? 저쪽에서는 뭐래요?”
“재경기 하는 것으로 합의 봤어.”
회의 결과 심판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KS의 감독은 처음에 몰수패를 주장했지만 여의치 않자, 밴 카드 1장을 지우는 정도까지는 해야 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0 아니면 1이다.
정말로 눈맵을 했으면 몰수패를 받고, 잘못이 없다면 경기 속행해야지, 애매하게밴카드 1장 지우고 이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안한데, 그래도 구두 경고는 받았어. 나도 최대한 항의했지만 거기 감독이 꽥꽥 소리 지르고 난리 피우고 하니까 그렇게 결정하더라.”
“당신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애초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정명이 안도의 한숨을 휴,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밴 카드는 문제가 아니에요. 한 장 주던 말던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니까. 그것보다는...”
정명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메테오가 말을 받았다.
“우리가 눈맵 했다고 소문나서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 그게 더 문제지.”
“맞아요. 그게 문제죠. 다행이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요.”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경기가 재개되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전해들은 한국 해설들은 KS를 가차 없이 까 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객관적인 클래스 차이가 있는데 정명 선수가 왜 굳이 눈맵을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KS측에서 한국의 실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NHG가 이번 경기에서 제대로 한 번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NHG 선수들 꽤나 열 받았을 것 같은데, 잘 하면 퍼펙트 경기가 나올 수도 있겠어요.
해설들의 밴픽 예측은 틀렸지만, 그 다음으로 한 예측은 맞았다.
정명은 이번 경기에서 정말 이 악물고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더블 킬! 이거 아니겠습니까!
-컨트롤 차이가 이 정도로 나면, 사실 운영이고 뭐고 소용이 없어요.
-해설들은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도 선수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시해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KS 입장에선 정말로 할 게 없습니다.
개나소나 피지컬 90이 넘는 건 한국 리그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다른 지역 같으면 80만 넘어도 1부 리그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온다.
때문에 지금 상대하는 KS에서는 피지컬 넘는 선수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에이스마저도 상대가 정명인 탓에 평소보다 오히려 똥 싸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쿠론은 경기를 거의 잡았음에도 분이 안 풀리는지, 거침없이 욕을 했다.
“아오, x도 아닌 것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정명! 이거 바로 끝내지 말자. 좀 더 가지고 놀게.”
“그럴까?”
팀원들은 일부러 경기를 질질 끌며 재미있게 놀기 시작했다.
결국 2만 골드 차이까지 벌어졌을 때, 상대측에서 항복 선언이 나왔다.
-GG!
-이건 뭐,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이겼다. 근데 이겼는데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건 참 드문 일인데.”
“나도.”
“그래도 일단 나가자. 인사는 해야 하니까.”
그 말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쿠론이 얼굴을 폈다.
“어, 그래. 악수강간 빼먹으면 안 되지.”
월드챔피언십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 승자가 패자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진다.
어떤 한국 선수가 악수를 건네는 것을 인상 깊게 본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경기에서 승리한 팀이 다가가서 악수를 건네는 것은 이제 게이머들의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그런데 솔직한 말로 경기에서 지고 엄청 열 받은 팀이 악수고 뭐고 하고 싶을 리가 없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 줬으면 하는 마음들일 걸?’
하지만 그렇다고 악수를 안 받아주면 매너 없다고 폭격을 맞으니, 좋으나 싫으나 결국 악수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쿠론은 이걸 악수강간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정명이 팀원들과 함께 KS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꽤나 열 받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명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배너라는 선수의 손을 꽉 잡았다.
......
며칠 뒤. 조별리그 한 바퀴가 돌았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3승 0패.
힘겹게 이긴 경기도 없었기에, 6승 0패 전승 진출을 노려봐도 될 듯싶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 사건만 없었다면 말이지.’
잠깐 레딧에 들어갔던 정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게임사에서도 경고조치만 하겠다고 밝힌 걸 왜 니들이 난리임? 대법관임?
?여기 NHG 실더 한 명 추가요.
눈맵 사건은 어찌나 파장이 컸는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었다.
심지어 북미에서까지 난리였는데, 북미 사람들은 NHG의 편을 들어주고 유럽 사람들은 KS의 편을 들어주는 키보드 배틀이 연일 열리고 있었다.
이 얘기 계속 해봐야 서로 좋을 거 없으니 적당히 끝내면 좋으련만, KS에서 장작을 계속 집어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banner : 겨우 경고로 끝낸 게임사측에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어이가 없다.
?돈이라도 찔러 준 거 아님?
여기까지 했으면 그냥 짜증난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추종자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SNS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게 문제였다.
banner : 당시 NHG의 코치라는 사람이 와서 헛소리를 했었다. 나는 그게 정말 짜증났다.
참고로 그 여자는 코치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업계에 1년 있었지만 여자 코치는 들어본 적도 없음.
?코치라기보다는 예쁘니까 뽑아놓은 매니저 같은 거구나.
‘아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자기에게만 뭐라 하면 상관없는데 팀원들에게까지 이상한 소리를 하니, 참기가 힘들었다.
결국 정명은 이 진흙탕 싸움에 한 발 걸치기로 했다.
‘독에는 독으로 맞선다.’
이 다섯 명이 하는 게임은 소위 말하는 정치질이 정말 심한 게임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진흙탕 싸움을 한 경험이 있는 정명은 그런 정치질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눈맵을 했냐 안했냐. 이건 논쟁의 여지가 있어. 프레임을, 그러니까 화제를 돌려야 해.’
예컨대, 화제가 눈맵이면 상대방 측에서도 나름대로 할 말이 생긴다.
때문에 그의 약점인 인종차별 전과로 프레임을 몰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해야 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 바로 생각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되려나?’
정명은 자신이 항상 애지중지하고 다니는 수첩을 꺼냈다.
사실 수첩을 꺼내지 않더라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야,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으니까.
‘어디보자...아, 여기 있다. 월챔 팀보이스 유출 사건. 이걸 적절히 이용하면 될 지도 모르겠어.’
[2034년 9월 말.]
*월드챔피언십 경기 중, 한국 팀의 팀보이스가 유출 되었다.
*대회 관계자에게 팀보이스는 송출되지 않는다는 확답을 들은 한국 선수는 마음 놓고 욕을 하며 게임을 했지만, 팀보이스가 방송에 나갔다.
*의도치 않게 자신의 뒷담화를 듣게 된 중국 선수는 한국 선수의 사과도 받지 않고 무시해버렸다고.
‘좋아, 이걸 응용해서 해 보자. 되면 좋고, 안 되면 플랜 B로 넘어가고.’
......
그로부터 며칠 뒤.
또다시 돌아온 KS와의 경기에서 정명은 마음껏 욕을 하기로 했다.
-지금 한타 열리기 직전입니다!
-송하니, 텔레포트 타고 넘어옵니다! 타이밍 잘 잡았어요!
‘결정적인 한타다. 만약 팀보이스를 내보낸다면, 여기서 내보내는 게 맞다.’
한타가 열리자, 정명이 슬슬 시동을 걸었다.
“저 새끼들 다 죽여! 석진아, 저 인종차별 매니아 새끼 찢어버려라!”
정명이 자연스레 욕을 했지만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팀원은 없다.
중요한 한타로 인한 흥분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면 가끔씩 욕이 나올 때도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상대는 KS. 팀원 모두 이를 가는 상대였기에, 차석진이 정명을 따라 욕설을 내뱉었다.
“킥킥, 그거 좋죠! 일로 와 쉐끼야!”
[적을 처치했습니다.]
“큭큭, 별 것도 아닌 게. 간나쉐끼 이거.”
그리고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해설들은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컨트롤이었습니다.
-합이 완벽해요. 리플레이를 보고 싶은데...아, 리플레이 나오는군요.
곧이어 해설의 바램대로 리플레이 화면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리플레이는 리플레이인데 팀보이스가 포함된 리플레이였다.
그 화면에서 정명과 석진은 걸쭉하게 상대의 욕을 하며 한타 대승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팀 보이스 나갔으려나? 석진이 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욕 하지 말라고 주의시키기는 했지만 꽤 수위가 높았는데.’
-경기, 끝났습니다!
-NHG, 5승 0패로 8강 진출 확정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8강 진출을 확정지은 팀원들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달은 에리가 허겁지겁 달려와 상황을 설명하자 모두들 얼굴을 굳혔다.
“뭐야, 우리 팀, 팀 보이스 나갔어요? 안 나간다더니.”
“응. 지금 쯤, KS에서도 얘기를 들었을 거야.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 잘못은 아니긴 한데...”
심각한 표정의 에리와는 달리, 정명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쯤, 엄청 열 받아 있겠네. 이렇게 됐으니 플랜 A로 계속 나가면 되겠군.’
“어어어...형, 저거...”
“걱정 마라. 욕 좀 하면 어떠냐? 일 있으면 형이 다 책임 질게.”
“하하하...그래요, 이건 단순한 사고였으니까 저쪽에서도 이해해 줄 것 같아요.”
너그럽게 이해해 줄 것이라는 석진의 희망과는 달리, KS측에서는 전혀 이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욕을 한바가지 들은 배너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석진에게 달려왔다.
“어어어....쏘리, 캔 낫 잉글리쉬...”
“석진아, 넌 뒤로 빠져봐.”
석진에게는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영어로 욕을 하더니, 만만치 않은 기세의 정명이 나서자 곧바로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렇게 말다툼을 하다가 배너는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인종차별적 욕을 내뱉어버렸다.
무척이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정명은 그다지 흥분하지 않았다.
사실 KS와의 싸움을 벌이고 배너에게 인종차별적 말을 유도해내는 것까지, 모두 정명이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진행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있던 에리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이 새끼가 진짜, 너 미국이었으면 내가 네 몸에 쇳덩어리 박아 넣어줬을 거다!”
“어어, 에리. 일단 진정하시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네가 무시당하고 있는데! 이거 놔 봐, 저 놈 뺨이라도 때려줄 테니까!”
그 후, 직원이 와서 싸움을 말리기 시작했고, 정명은 싸웠던 영상을 적당히 편집해서 레딧에 업로드했다.
배너의 인종차별적 욕이 강조되어있는 영상이었다.
-인성 갑 ㄷㄷ 쓰레기네.
-뭐 저런 놈이 있냐. 퇴출 안 됨?
?징계 받기로 예약됨. 전과가 있으니 이번에는 그냥은 못 넘어 갈듯.
덕분에 배너는 인종차별을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쓰레기 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더해, 자국 리그로 돌아가면 피바람이 불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딜교환을 끝낸 정명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하, 이게 다 인과응보 사필귀정, 정의구현 아니겠습니까? 정말 기분이 좋네요.”
“응?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 후로 정명의 월드챔피언십은 도전기는 순풍을 탄 듯,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6승 0패. 조 1위 진출이었다.
[조별리그 통과]
*조별리그 통과에 성공하였습니다.
*조 1위 진출로, 보상이 강화됩니다.
보상
-40000 포인트
-C등급 선물상자 2개
‘응? 보상 강호된 거 맞아?’
예전 같았으면 입에 침을 흘릴 정도의 막대한 보상이었으나, 이젠 이 정도 보상에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C등급 선물상자에는 쓰레기가 들어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 포인트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숙소에서 쉬던 정명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형, 형! 지금 TV 봐봐요! NAV가 조별예선에서 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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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허거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