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위로, 위로! (1) >
휴식 기간이 빠르게 지워지고, 어느새 섬머 리그의 오픈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리그가 시작된 건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리그 일정을 맞추려면 이제 슬슬 떨어졌던 감을 다시 끌어 올려야 했다.
때문에 슬슬 더워지는 어느 날의 아침, 뿔뿔이 흩어졌던 팀원들이 다시 연습실에 모였다.
“다들 잘 지냈어?”
“하이욤!”
“연습하기 전에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무조건 찬성!”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단톡방으로 하도 연락을 해서 그런지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정명은 에리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며 그동안 쌓여 있던 메일을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이 처음으로 열어본 것은 협회에서 날아온 소식지였다.
“어라, 리그에 새로운 스폰서가 들어왔네?”
“아주라 TV요? 그거 메일 날아 온지 꽤 되지 않았나?”
“휴가 기간이잖아. 업무 관련된 메일은 어지간해선 무시했다고.”
“와, 멋져! 역시 미국 스타일입니까?”
석진의 감탄에, 에리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응? 미국에서도 주말에 일시키는 경우 많은데?”
“헉!”
리그에 새로 들어온 스폰서는 정명이 탐탁치 않아하는 회사인 아주라 TV였다.
물론 팀을 새로 창단한 것은 아니고, 기존의 팀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리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리그에 새로운 자본이 들어오는 것은 좋은데, 뭐랄까. 거기는 의심쩍은 부분이 많아서.’
정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일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메일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번 리빌딩과 함께 ‘랜턴’ 선수가 팀에 합류했습니다. 이로써 팀 아주라의 미드라이너는 총 3명이 되지만, 그만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
메일을 읽던 정명은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열었다.
“쟤네들 뭐냐? 미드를 또 영입해? 저기 원래 미드라이너가 두 명 있는 팀이잖아?”
아주라 TV가 흡수한 팀은 원래 식스맨을 포함하여 미드라이너가 두 명 있는 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랜턴이라는 선수를 영입함으로써, 미드라이너를 3명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식스맨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미드를 3명이나 두는 건 이해가 안 가기는 하죠. 걔네들 발표로는 3명을 경쟁시키면 좋은 시너지가 날 거라고 생각한다던데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건 단순한 실험이건 당사자들은 주전 경쟁하느라 피 말리겠네. 1경기 끝나고 2경기에 선수 교체 이런 것도 안 되는 판국에 3명이라. 깔고 갈팀 늘었다고 좋아해야 하나?”
“어...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우리는 식스맨 영입할 계획 없죠?”
“그래. 없다. 돈 때문이 아니라 식스맨을 운용하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휴, 다행이다.”
석진은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정명이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차석진은 팀에서 성장이 가장 두드러지는 선수였다.
정명은 시스템 창을 열어, 석진의 성장을 확인했다.
[차석진]
피지컬 (85/94)
정신력 (84/94)
오더 (50/65)
판단력 (84/91)
‘역시 많이 올랐다니까. 뭐, 원래 석진이의 능력치가 원래 낮기도 했지만.’
“그것도 의외의 일이기는 하지만, 전 그 소식에 더 놀랐어요.”
“윈터리그 없어진다는 거 말이지? 그 얘기는 들었다.”
정명이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협회에서 [긴급] 이라고 적혀 있는 메일이 도착했다.
일 얘기는 전부 무시하려 했지만 긴급이라고 붙어있으니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져서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긴급 메일의 정체는 윈터 리그가 폐지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담긴 메일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정명은 그 메일이 없었어도 윈터리그가 사라진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게 프로게이머들에게는 좋을까 나쁠까?”
“좋은 거 아냐? 리그가 없는 동안에 프로게이머들이 재충전 한다거나 쉴 수 있잖아.”
“근데 너무 쉬면 스폰서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우리는 딱히 스폰서가 없어서 그런 눈치는 안 보긴 하는데...”
“물론 그만큼 돈은 적게 벌지만.”
“야, 돈 얘기는 왜 해! 오빠 듣겠다.”
윈터리그 이야기가 나오자 팀원들이 지레 겁먹고는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견을 나눠보아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석진, 하니, 쿠론으로 이루어진 급식충 트리오는 당연하다는 듯 정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명이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좋을 건 없겠지. 특히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지 못하는 게이머들은 거의 반년을 쉬어야 한다는 거잖아.”
“웅...비어있는 시간에 외국 리그를 가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시험이 없는데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길까?
재충전도 좋지만, 너무 오래 쉬면 오히려 의욕이 떨어진다.
커리어의 유지나 수익적인 측면, 어느 관점으로 보더라도 프로게이머의 입장에서 리그는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다.
그런데 윈터리그라는 큰 리그가 통째로 사라진다고 하니, 선수들이 불안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월챔에 진출한 팀은 윈터 시즌에 쉬는 게 오히려 좋지. 숨 돌릴 시간이 생기는 거니까.’
정명은 팀원들을 자리에 앉히며 산만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근데 벌써부터 그 걱정을 할 필요는 없고, 코앞에 닥친 섬머 리그나 잘 해보도록해야지.”
“맞아 맞아. 석진이가 이상한 얘기를 꺼내서 그래.”
“엥? 이거 내 탓이야?”
그 말을 끝으로, 팀원들은 휴가 이후 첫 연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밴픽을 고민하던 에리가 우물쭈물하며 정명에게 다가왔다.
“저기 있잖아. 혹시 리그 끝난 다음 날에 했던 약속 기억나니?”
“어...뭐였죠? 푸키먼 센터에서 기념품 사다달라는 부탁이었나?”
정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 에리가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거 말고. 코치 새로 영입하기로 한 거 있잖아.”
“하하, 농담이고 사실 쓸 만한 사람이 안 보여서요.”
“엥! 그래서 이번에도 나 혼자야?”
‘미안합니다. 그래도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합니까. 판단력이 90을 넘기라고는 안 하겠지만, 최소한 80은 넘어야 쓰지.’
[미어스 에리]
판단력 (91/94)
*베테랑 코치
*수많은 경험이 있는 베테랑 코치입니다. 이정도 경력을 갖춘 코치는 각 구단에서 철저하게 보호하므로, 영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수들이 300%의 추가 경험치를 받습니다.
코치를 뽑을 때 정명의 기준은 명확했다. 판단력이 최소 80은 넘을 것.
그 이하는 매니저로면 모를까, 코치로 하기엔 조금 애매했다.
물론,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게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정명은 선수를 보는 눈이 이미 꽤나 높아져 있는 상태였고, 이미 높아진 눈을 낮추기란 무척이나 힘들었기 때문에 타협이란 없었다.
‘코치를 언제 또 육성해? 가뜩이나 ‘병아리를 겨우 키워놓았더니 대기업으로 홀랑 가 버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리는 곳인데.’
정명은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 달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연습이 시작되었다.
“좋아. 이번 시즌의 목표는 2위 팀, NAV를 잡는 거다. 지난번에는 아슬아슬하게 못 잡았으니까.”
첫 연습상대는 지난 스프링 리그에서 한창 순위를 다투던 팀, TAQ였다.
정명은 피닉스를 상대로 라인전 내내 우세를 점하며, CS 격차를 벌려나갔다.
“카드맨 집 보냈다. 라인에 보일 때 까지 뒤로 빼봐.”
“OK.”
TAQ는 아직 휴가의 감성에 젖어 있기 때문인지, GOO TV가 망한 충격 때문인지 영 제 실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에 반하여 NHG는 그동안 쌓아온 팀워크를 선보이며 라인전과 운영, 두 군데서TAQ를 압도해 나갔다.
정명을 포함한 팀원들은 마치 긴 휴가를 보내어 감이 떨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임이 살아있었다.
“지금 간다.”
“와랏!”
정명이 피싱맨의 궁극기, 물고기뿌리기를 정확히 던져 넣으며 슬로우를 걸자, 쿠론이 열심히 달려가서 속박을 쑤셔 넣었다.
미리 합을 짜기라도 했다는 듯, 상태이상 연계가 물 흐르듯 펼쳐진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오, 좋아!”
“잘 했다.”
‘무난하게 이기겠네. 그런데 이 녀석들, 왜 이렇게 쉬워졌지?’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겨우겨우 상대했던 팀이 어느 새인가 만만해져 보인다는 것은.
비록 연습경기지만 정명은 팀의 실력이 TAQ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명은 첫 연습게임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연습 게임에서 승리했습니다!]
[보상으로 1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코치 특성에 의하여 경험치 300%가 추가로 오릅니다.]
“좋다. 다들 잘 했어!”
첫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다들 컨디션이 좋아보이자, 정명의 기분이 좋아졌다.
당연히 연습게임을 한 판만 하지는 않기에, 그 후로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연습을 하는 송하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컨디션이 그다지좋지 않은 듯 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아우...짜증나.”
“하니야, 천천히 해. 너 죽는 동안에 용 먹어뒀으니까 우리가 이득이야.”
“...응, 그건 아는데...”
하지만 하니는 게임에 영 집중을 못 하는지, 가끔씩 멍 하니 있다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습게임이 끝난 뒤, 정명은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따로 송하니를 불렀다.
하니는 정명이 혼낼까봐 긴장한 모양새였지만, 사실 정명은 못한다는 이유로 팀원들에게 야단치거나 듣기 싫은 소리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혹시 화났어?”
“아니. 하니가 경기에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혹시 고민하는 거라도 있어?”
“으음...역시 오빠는 너무 나를 잘 알아.”
“무슨 일 있으면 말해봐. 내가 같이 고민 해줄게.”
“음...사실 솔로랭크 돌리면서도 느낀 건데, 요즘 게임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나 조금 슬럼프 온 듯...”
“슬럼프?”
‘글쎄, 연습경기에서 그다지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명은 혹시나 하여 송하니의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송하니]
피지컬 (94/97)
판단력 (92/92)
오더 (83/85)
정신력 (90/95)
‘이런, 판단력이 끝까지 올라갔네. 더 이상 올릴 수가 없다...’
정명이 경험치 부스터를 때려 박은 덕분에 능력치가 초스피드로 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판단력 수치가 정점에 달하여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실력이 정체되었다고 생각할 만 했던 것이다.
‘저기에서 성장이 멈추기에는 조금 아쉬운데. 이걸 어떻게 더 높여볼 수 없나? 음...혹시 모르니까 일단 계속 해 보는 수밖에.’
아직 휴가 때의 기분에 젖어 있어서일까? 연습에 완전히 집중을 못 하고 있는 사람은 한명 더 있었다.
정명은 푹푹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메테오를 불렀다.
“메테오, 혹시 무슨 고민 있어?”
“어...사실 맞아. 근데 내가 고민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우리가 같이 지낸지 꽤 됐잖아. 그 정도야 다 알지.”
“오오, 과연. 모범적인 리더야.”
정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메테오를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깊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었다.
고민은 바깥으로 꺼내기만 해도 기분이 훨씬 나아진다.
정명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송하니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내가 같이 고민 해줄게. 말 해봐.”
“이거 비밀로 해 줘. 다른 애들한테 까지. 알겠지? 이거 정명, 너니까 말 하는 거야.”
호기롭게 말했지만, 메테오는 우물쭈물하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하지만 정명은 재촉하지 않고 메테오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려주었다.
“휴....그래. 사실 이번 휴가기간이 조금 길었잖아. 그래서 그동안 무척 재미있게놀았거든.”
“재미있게 놀았다니 그거 다행이네.”
“그런데 조금 너무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놀아보자! 해서 여자친구랑 제주도로 여행을 갔는데...”
‘응? 설마...’
정명은 왠지 메테오가 할 말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더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래. 아무래도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건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다. 나...사고 쳤어.”
메테오가 꺼내 놓은 고민은 정명의 예상했던 것보다 꽤나 심각한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