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만신전 (3) >
경기 다음 날 아침.
정명이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경이나 핸드폰을 먼저 찾는 현대인의 슬픈 습관이 정명에게도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보자, 어제 경기 반응이....썩 괜찮네.’
게임 커뮤니티로 가니, 어제 정명이 한 경기의 기사가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그만큼 재미있었던 경기라는 뜻이었다.
[TAQ, 충격의 2:0 패배. 이제는 초심이 필요할 때.]
기사 내용은 별 거 없었다. 그냥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뭐 그런 내용들.
기자는 2:0으로 질 수는 있지만, 압도적으로 패배한 경기 내용을 지적했다.
물론 공식 기사이므로 무척이나 좋게좋게 말했지만, 댓글에서는 필터 없이 원색적인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김준상이 잘하긴 잘 했는데 피닉스 저놈도 어지간하네. 똥을 저렇게 싸면 누가 치움?
-ㄹㅇ. 달풍선 구걸하는 거 말고는 잘 하는 게 없네.
-이쯤 되면 김준상이 빡쳐서 피닉스 한 대 갈겨도 법원에서 무죄 나올 각인듯.
잘한 사람을 칭찬하는 분위기이면 좋으련만, 누가 잘 했다기보다는 누가 못 했다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었다.
명장면이나 명경기도 서로의 실력이 팽팽해야 만들어지는 것이지, 어제처럼 실력차이가 많이 나면 그냥 양학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피닉스가 욕먹는 거 보니까 재미는 있네.’
잠시 후, 정명이 연습실에 도착했다.
연습실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나머지 팀원들 또한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이욤!”
“하니왔니?”
“웅웅. 오빠 근데 언벤에 뜬 기사 봤어? 오빠가 어제 슈퍼플레이 한 거 엄청 호평이더라. 기자가 0.5배속으로 다섯 번을 돌려봤대!”
“하하...그 아저씨가 과장이 심하네. 뭐, 어제 컨디션이 좀 좋기는 했지만.”
정명이 겸손을 떨었지만, 매일 붙어서 연습하는데 갑작스러운 실력 향상을 모를리 없다.
송하니는 정명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뭐야뭐야, 어떻게 한 거야? 나한테도 비법 좀 가르쳐줘, 개인과외해줘. 비밀과외해줘!”
“글쎄? 그냥 하다 보니 잘 된 느낌이라 잘 모르겠는데?”
“우우...치사해-!”
하니가 뿌뿌 거리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정명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을 수밖에는 없었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킬을 쓸 수 있는 시간도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아서.’
아레스의 창이라는 이 스킬은 지난 번 얻었던 혈맹이라는 스킬과 비슷했다.
같은 A랭크 스킬이고 시간제한이 있다.
또한 능력이 영구적으로 올라갔다는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 올라간 것이므로, 너무 잘난 척 하기에는 좀 뭐했다.
하지만 최대한 뽕을 뽑아야 한다.
때문에 정명은 연습경기가 끝날 저녁 무렵, 송하니를 불러 세웠다.
“하니야, 너 오늘 나랑 솔로랭크 좀 하다 가라.”
“으응? 하지만 지금 시간이...집에서 하면 안 되남?”
“너 집에 들어가면 또 피곤하다고 다음에 하자고 할 거잖아.”
“허걱! 오빠는 날 너무 잘 알아.....”
“솔랭 끝나고 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면 되지 뭐. 민서씨, 괜찮죠?”
“으음....”
송하니의 매니저인 김민서가 판단할 때, 정명은 이제 확실히 믿을만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와 있었다.
때문에 김민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부탁합니다. 밤에 늦게 자면 가슴 안 크니까.”
“아니, 그 얘기를 아직까지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억울합니다. 저 그런 말 한적 없어요.”
김민서는 송하니가 예전에 농담으로 말한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정명은 옆에서 얄밉게 푸히히 웃고 있는 송하니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됐고, 게임이나 하자.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어. 그럼 순위는 저절로 올라 갈 것이다.”
“힝힝...”
송하니는 작게 불평하면서도 자리에 앉아 게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이 시작되었다.
“엥? 소드마스터 이? 그거 완전 고인 아님?”
빨리 순위를 올리고 싶다던 정명이 별로 좋지 않은 캐릭터를 고르자, 하니가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고인 캐릭터를 골랐음에도, 정명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쓸 만한 캐릭터 발굴이라고 생각 해.”
송하니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그런 정명의 픽을 우려했지만, 전부 무시했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고 나서 딱 4분이 지났다.
[퍼스트 블러드]
솔로 라인에 선 캐릭터가 4레벨을 찍을 무렵, 미드에서 킬이 나왔다.
정명이 소드마스터 이로 상대방의 탈주닌자를 솔로킬 낸 것이었다.
“허걱, 벌써?”
“말 했지? 그냥 1인분만 하고 있으라고.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난다.”
[더블 킬]
[트리플 킬!]
[전장의 화신입니다.]
피지컬이 하늘을 뚫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피지컬 85를 넘을까 말까 하는 아마추어, 혹은 하위 순위의 게이머들이 정명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정명은 3~4레벨 정도에 대부분 솔로 킬을 냈고, 6레벨이 되면 무조건 킬을 냈다.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순위가 이정도로 높으면 거의 준 프로인데, 마치 브론즈 상대하듯 킬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정명의 활약에 송하니가 정명의 멱살을 귀엽게 붙잡았다.
“으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뭔가 비법이 있지! 딱 나한테만 알려줘! 돈 낼게요!”
“비법 같은 거 없어 이것아. 그보다 빨리 큐나 돌려. 늦기 전에 집에 가야지?”
그 후, 정명은 다섯 경기 연속으로 20분 칼 항복을 받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경기에서 승리하자마자 순위를 확인하니 딱 20위.
악착같이 시간을 투자하여 어렵사리 랭킹을 올리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꽤나 여유롭게 올리고 있었다.
“오오, 우리 벌써 20위야!”
“그래. 생각보다 쉽게 올렸다.”
“우히히, 이거 보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 때도 이렇게 쉽게 올렸었는데!”
“쉬워? 꽤 어렵게 올렸을 걸?”
“그랬나? 아 맞아. 여기까지는 쉬웠고, 이 다음부터 엄청 어려웠어! 우리한테 도전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서...”
정명은 다섯 경기를 끝으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하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정명은 괴물같이 솔로 킬을 내며 순위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러한 행동은 커뮤니티에서 유명세를 타기에 충분했다.
-솔로랭크 패왕 등장함. 이 화려한 전적들 좀 보셈. 이거 진짜 괴물임. 대회에서 볼 때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은데, 연습실에서 하면 더 잘하는 스타일인가?
?도전해 봤는데 쳐발린 1인
?2인...
?솔랭 10연승이라니, 저게 저 점수대에서 가능 한 일이야?
정명의 솔로랭크는 항상 같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저녁 10시에서 12시.
계속 같은 시간에 솔로랭크를 돌리니, 정명을 저격하여 도전해보려는 사람도 꽤나 많이 생겼다. 지난번과 같은 현상이었다.
송하니는 전체말로 뭐라 말을 거는 사람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기 저 사람, 중국어로 뭐라는 거야?”
“자기가 중국 팀 QGG의 미드라이너래. 날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한국 서버에 왔다네.”
“오오, 중국어 진짜 읽었어? 능력자다 능력자! 3개 국어 능력자!”
송하니가 두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웅...그래서 어떤 팀인데? QGG.”
“몰라. 들어본 적 없어.”
“왜 몰라. 중국 리그에서 있었던 적도 있으면서.”
“내가 있을 때랑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렇지. 내가 저번에 연락해보니까 나랑 친했던 사람들 많이들 은퇴 했더만.”
“으으 역시 프로게이머계의 살아있는 화석...명불허전 입니닷.”
‘흐음, 중국의 프로게이머라.’
사실 중국의 프로게이머고, 아마추어 고수고 지금의 정명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한국 1부 리그의 프로게이머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리그에서 경기를 할 때보다 쉬운 상대들이었다
“죽어 임마. 중국 팀이고 나발이고 알 게 뭐야.”
[적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아마추어 고수, 이현민이 당신을 존경합니다. 영입을 제안하면 99.9%의 확률로영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응? 아, 우리 편의 원딜러인가보군.’
그 메시지를 시작으로, 비슷한 메시지가 가끔씩 떴다.
[프로게이머 김순복이 당신을 존경합니다. 영입을 제안하면 80%의 확률로 이적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정명이 캐리를 할 때마다 높은 확률로 이러한 메시지가 떴지만 무시했다. 정명은 식스맨을 둘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D-DAY가 찾아왔다.
정명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의자 뒤에 몰려있는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다들 집에 안 가?”
“너 랭킹 1등 찍는대서 보고 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며.”
“뭐, 그렇지. 그럼 보고 가던가.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으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다른 팀원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경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딩창에서 상대방의 아이디가 뜨자, 차석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헉, 저기 있는 미드라이너....”
“뭐야, 프로야?”
“피닉스잖아요! 와, 이번에는 정말 목숨 걸고 하겠는데요. 형한테 그렇게 깨지고 욕을 그토록 얻어먹었으니.”
김준상의 제보로는 정명에게 박살이 난 후, 피닉스의 멘탈이 조금 안 좋아졌다고 한다.
감독이 신신당부했지만 기어코 언벤 커뮤니티에 들어가, 자신을 욕하는 글을 읽어봤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김준상은 다음 경기가 조금 걱정된다고 하소연을 했었다.
정명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피닉스? 나 저격하려고 들어 왔나? 알 게 뭐야. 한 번 더 죽이지 뭐.”
이윽고 두 명의 플레이어가 라인에 섰다.
피닉스는 정말 이를 악 물고 하는지, 평소에 좋아하던 전체채팅 공격도 일절 하지않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없던 실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메테오, 저거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뭔 소리야. 지금 쟤 풀피잖아.”
“그렇긴 한데...잠깐만. 각이 보이는 것 같다.”
정명은 궁극기를 배우자마자 곧바로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조금 무리하는 모습이었다.
‘원거리 폼 공격은 무빙으로 피해 주고 망치 폼으로 바꾸면 중력장을...’
-짜릿할걸?
피닉스가 날린 포탄이 하늘을 가른다.
원거리 공격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한 정명은 망치 폼으로 달려드는 피닉스를레이저로 지지며 탈진을 걸었다.
“야, 빼라 빼. 죽겠다 그러다가.”
“뭔 소리야. 여기에서 빼면 지는 거라고.”
서로 맞딜을 퍼붓는 상태이기에 누가 이길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
하지만 정명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듯, 끝까지 캐릭터를 빼지 않았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아자!”
날아오르라 : 와 진짜 아깝다. 저게 사네. 운빨 지리고요.
피닉스는 정말로 억울한지, 경기 중 처음으로 전체채팅을 보냈다.
“운빨이라니? 다 설계인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그러자 피닉스는 발끈해서 다시 채팅을 보냈다.
날아오르라 : 점화 한 틱 차이였는데 무슨 소리?
“그것도 다 설계. 모든 것이 설계였다.”
그 다음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정명은 또다시 억지스러울 정도로 싸움을 걸었고, 아슬아슬한 전투 끝에 또다시 정명이 킬을 따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와, 저게 사네? 운빨 진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피닉스가 뻑하면 운 타령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명의 남은 HP는 80 정도.
피닉스가 보기에는 종이 한 장 차이 덕분에 운 좋게 이겼다고 생각할 만 했다.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 차이가 승패를 가르지만.’
피닉스의 말대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지만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차이이기도 했다.
상황이 끝나는 듯 하자, 야식을 먹으며 구경하던 팀원들은 마치 남 일 얘기하듯, 한가롭게 떠들었다.
“끝났네, 이거.”
“2킬에다가 CS 차이까지...라인전 터졌다. 야, 유정명!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같은 팀원들한테 비법 좀 전수해 주지 그래?”
쿠론의 말에, 송하니가 입을 열었다.
“포기해. 나한테도 안 말해 주더라.”
“그래? 그럼 나중에 술 좀 먹이고 물어보지 뭐. 아니면 송하니 미인계라도 좀 써 보던가.”
“우씨, 그걸 왜 네가 결정해?”
팀원들이 낄낄대며 농담을 하자, 정명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말은 당사자가 안 들을 때 해줄래? 정신 사납거든?”
그렇게 떠드는 와중에도 정명은 계속해서 억지로 싸움을 열었다.
그리고 2킬을 내며 차이를 만들었기에, 3번째 싸움은 1, 2번째 싸움보다 훨씬 쉬웠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계속 운빨이니 뭐니 하던 피닉스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명의 HP가 반 이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명은 피닉스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
“와, 이게 사네. 이건 운빨 인정합니다. ㅎ.”
정명의 이죽거림에, 쿠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팀이지만 진짜 얄밉다니까. 너 혹시 쟤한테 안 좋은 감정 있냐?”
“글쎄.”
경기는 무난히 정명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최대한 해 보려는 것인지 항복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게임이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번 경기 끝나면 랭킹 1위 찍을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나 세체미 될 수 있냐?”
정명의 말에 쿠론이 코웃음을 쳤다.
“솔로랭크 1위는 최소 조건인 거고, 왕위를 계승하려면 왕을 잡아야지. 뭐야, 세체미 하고 싶어?”
그 말에 정명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조금? 그런 타이틀을 달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테니까. 아, 항복 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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