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돌파구 (3) >
XTC의 연승이 꽤나 이슈가 되었는지, 중국의 지역 방송국에서 정명에게 연락을 해왔다.
다음 주, 경기가 없는 날 방송 출연이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정명 선수, 아직 경기 말고는 방송에 나온 적 없죠?
“네. 그렇죠. 중국어도 못 하니까.”
-팬들한테 얼굴 한 번 비추는 게 어때요?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방송에 나오는 것은 앞으로의 커리어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음...글쎄요.”
정명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방송출연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방송 출연을 한 번 하면 팬들이 확 많아지는 것을 경험해 봤기도 하고, 연승 행진으로 인하여 여유도 있었으니까.
‘기분 전환이라고 생각 할까. 안 그래도 팀원들이 쉬고 싶다고 징징거리고 있던데.’
고3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프로게이머 또한 리그시즌이라고 해서 연습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연애도 하며 지내고는 한다.
정명은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히고는 방송 제안을 승낙했다.
“좋아요. 다만, 방송 할 때는 통역 좀 붙여주세요. 아직 중국어가 서툴러서.”
......
며칠 뒤.
정명은 중국의 한 토크쇼의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고, 한 시간이 걸려 방송국 건물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방송국 건물은 미국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매니저씨, 이거 지역방송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건물이 엄청 큰데?”
“네? 그야 그렇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5000만 명이 넘는데, 그거에 대응 하려면 이 정도야 뭐.”
“와, 5천만이면 뭐야. 우리나라 사람들 전체 인구수인데. 신기하네.”
특정 지역에만 나가는 지역방송이라고 하여 부담 없이 나갔지만, 매니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명은 괜히 부담되어 어깨가 뻐근해졌다.
잠시 뒤.
건물에 들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송국을 둘러보는 정명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는 방송을 진행하는 두 명의 MC 중 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어라, 중국말 할 줄 아세요?”
“쪼금...요”
초급 중국어를 바탕으로 하여 반복 연습을 한 결과, 정명은 중국에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어린아이처럼 더듬더듬 말하는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다.
정명이 중국어를 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그 모습을 본 방송국 직원들은 정명에게 모여들어 이것저것 말을 건넸다.
“와. 대단하네요. 보통은 중국어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아서, 중국에 오래 머물렀던 게이머들도 거의 말은 거의 못 하는데.”
“그러게. 배울 생각을 아예 안 하는 사람도 있던데, 생각이 제대로 되어있네.”
정명은 복잡한 어휘에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그러자 여자 MC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정명에게 달라붙었다.
“정명이 미국에서 팬이 많다던데, 왜 많은 지 알 것 같아요. 너무 잘생겼다~”
“잠깐, 지잉난. 그러다가 정명의 애인한테 혼나요.”
“어, 정말요? 에휴, 역시 잘 나가는 남자들은 딱 두 부류라니까요. 이미 애인이 있거나, 게이이거나.”
정명은 그 말을 곧장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통역으로 말을 전해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졌다.
‘프로게이머의 빡빡한 일정에 치여 27살 먹도록 애인은커녕, 친구도 잘 못 만나는 형편인데 애인? 애인이라고?’
갑자기 억울해진 정명은 잘 안 되는 중국어로 더듬더듬 변명하기 시작했다.
“애인? 없는데?”
남자MC는 설명하는 대신 핸드폰에 나와 있는 한 사진을 가리켰고, 카메라 또한 그 모습을 잡았다.
MC가 가리킨 화면에는 에리와 정명이 웃으며 찍은 투샷 사진이 있었다. 지난 번, 파리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 아줌마 내 애인 아닌데요?”
@@@@@
며칠 후, 고급 호텔의 최상층.
XTC와의 연습중지 명령을 걸었던 장본인인 리그 협회장은, 부하들을 모아놓고는 연신 그들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었다.
“XTC가 여전히 1위잖아! 연습 막고 있는 것 맞아? 딴 생각 품은 애들이 도와주는 것은 아니고?”
“그게...아무래도 해외 팀과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것 까지는 막을 방법이 없어서.....”
“어휴, 등신들. 알았으니까, 1승만 가져 와. 그것도 못 해? 고작 1승이 그렇게 힘들어?”
이제 XTC가 1위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때문에 협회장은 목표를 낮췄다. 그들의 연승행진을 막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지금 쟤네들이 리그 최초로 전승우승 해 봐. 몇 년이 지나도 회자되면서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걸? 그런 꼴 보고 싶어?”
“그게...”
우물쭈물 하는 부하들에게 혀를 쯧쯧 찬 협회장은, 자신의 비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돈 값 하는 건 너밖에는 없는 것 같다, 미코.”
머리가 지끈거렸던 협회장은 자신의 비서를 만지작거리며 기분을 풀었다.
그는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애인이었다. 일본의 유명 AV배우를 자신의 비서로 전속 고용하여 장난감으로 삼은 것이다.
얼굴을 붉히며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대머리의 남자는, 협회장에게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실력 차이가 워낙 나서...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그거는 너희들이 생각해야지 그러라고 너희들이 돈 받아먹는 거 아냐? 아, 그리고 티 좀 나지 않게 해라. 괜히 연습금지 따위를 걸어서 나만 웃음거리가 됐잖아.”
그렇게 말하며 협회장은 손을 휘휘 저었고, 그와 동시에 협회장과 비서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방 밖으로 나갔다. 회의종료였다.
“다들 알지? 잠깐 쉬었다가 보자.”
회의는 끝났지만, 실무자들의 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분 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회의장에서 다시 모였다. 진짜 회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회장님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어쩌지?”
“솔직히 답 없는데. 그 녀석들을 무슨 수로 꺾어. 이스포츠라는 게, 다른 스포츠처럼 심판이라도 매수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은 없지만, 지시가 내려왔으니 뭐든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실행 가능성이 있던, 없던 일단 생각나는 방법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미인계라도 쓸까? 저번에 경쟁 팀한테 했던 것처럼.”
“아, 그 소울인가 뭔가 하는 꼬마한테 했던 것처럼? 큭큭, 술집에서 우연인 척, 여자 둘 안겨주니까 바로 덥석 물었었지 아마.”
“그래. 그걸로 재미 많이 봤지. 에이스였던 녀석의 성적이 단번에 추락했으니까.”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좋은 방법이라고 대머리의 남자를 칭찬했지만,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의 의견은 달랐다.
“잠깐. 내가 어제 AATV방송을 봤었거든. 정명인가 하는 놈이 나온 거.”
“그런데?”
“거기서 사회자가 그 녀석 애인이라며 어떤 백인 사진을 보여줬거든? 그런데...아마 모델인 것 같더라. 모르긴 몰라도 네 사업장에 있는 애들로는 게임이 안 돼. 다른 방법을 써야 돼.”
그 말에, 대머리 남자는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쩌라고. 계속 안 된다 안 된다 할 거면, 차라리 네가 의견을 꺼내 봐!”
“그러려고. 자, 걔네들이 연습을 해외 팀이랑 하고 있다고 했잖아? 일단 리플레이 파일 최대한 구해봐야지. 그리고 심판 매수가 쓸모없기는. 다 쓸모가 있거든?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봐.”
@@@@@
정명이 전승 우승을 해보라는 메이의 말에 엄청 신경 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로도 XTC의 연승행진은 계속되었다.
꼭 무패를 노렸다기보다는, ‘그냥 열심히 하다 보니 연승 중.’ 이란 상태였다.
그리고 정명은 연습이 힘들 때마다 시스템창을 열어, 꾸준히 쌓이는 포인트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다.
[잔여 포인트 : 13520]
‘휴, 이건 힐링이야. 치유된다. 쌓여 있는 포인트를 보는 것은, 차곡차곡 들어오는 돈을 보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아.’
현재 XTC의 스코어는 7승 0패. 14번의 게임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승률 100%. 이제는 전승 우승에 대한 이야기가 외부에서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성적에 애가 타는 것은 다른 팀들이었다.
타 구단의 사람들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정명을 찾아왔고, 정명은 그런 그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안 돼요. 그 협회장이라는 사람이 대가리 박고 사과해야 돼요. 그 정도가 아니면, 저는 타 팀과 연습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알아요. 그냥 연습 안 하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이제는 협회장의 말을 듣지 않는 이탈자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XTC의 구단주가 정치력을 잘 발휘하고 있기도 했고, XTC의 성적이 워낙 독보적이었으니까 서로간의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XTC의 매니저는 다른 팀에서 보낸 선물상자를 열어보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우, 하, 허, 이것 좀 봐. 로렉소 시계에요! 이거 엄청 비싼 건데, 진짜 엄청 멋진......”
“그거 다 돌려보내요. 받을 이유가 없어요.”
“예?”
매니저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되물었지만, 정명의 대답은 같았다.
“돌려보내고, 그 돈으로 좋은 곳에 기부나 하라고 해요.”
“진짜 돌려보낼 게요? 이거 로렉소 시계인데? 진짜 비싼 건데?”
“시계 안 좋아 합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해요. 좋다고 왕따 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친하게 지내자고 해 봤자.”
XTC가 한국의 몇몇 팀, 그리고 대만 팀들과 연습을 하다 보니 이제는 팀의 모두가 연습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곳 리그의 사람들과 연습을 할 때보다 수준 높은 연습게임을 하는 것 같다며, 해외 팀과의 연습에 대해 무척이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
그리고 그 다음 주.
어느새 XTC는 장기 레이스의 중반 지점까지 도달했다. 정명의 8번째 리그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정명은 방송국에 도착하여 몸을 풀었고,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오늘 상대는 현재 3위 팀인 팀 큐어.
정명은 자신의 팀을 열심히 노려보는 상대 선수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쟤네 엄청 의욕이 넘치는데요. 우리 쟤네랑 처음 만나는 것 맞죠? 솔로랭크에서 부모님 안부라도 들은 표정인데.”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팀의 코치였다.
“승강전은 2위 까지만 가능해서 그래. 저 팀이 지난번에는 승강전에서 떨어졌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하며 으쌰으쌰 했는데, 떡 하니 우리가 나타난 거지. 하하. 3위면 승강전을 못 치르잖아.”
전혀 신경 쓸 것 없는 이유였으므로, 정명은 어깨를 으쓱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밴픽.
3분 뒤 밴픽이 끝나자, 정명은 코치에게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
“이번 밴픽은 꽤 잘된 것 같은데요? 느낌이 좋은데.”
“그렇지? 막을 것은 막고, 가져올 것은 가져왔어.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네. 잘 해. 난 간다.”
코치는 그렇게 말하며 부스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한지 7분 째.
정명은 악착같이 버티려 애쓰는 피싱맨을 상대로, 9경기 연속 솔로 킬을 따 내려 하고 있었다.
-정명 선수, 빠르게 접근합니다! 홀리 선수, 반응이 느려요!
-정글러가 재빨리 달려오지만, 솔로...! 아, ppp. 경기 중단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게임이 정지되었다.
그리고 밖에 있던 스태프가 부스 안으로 들어오자, XTC 선수들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스태프를 쳐다보았다.
“잠시만요.”
“네? 뭔가요?”
“팀 큐어 측에서 게임 중지를 요청하였습니다. 헤드폰에서 소리가 잘 안 들린다는데, 5분 정도 점검 하고 다시 게임을 재개하겠습니다.”
솔로킬을 따 내기 직전이었지만, 그 순간 경기가 멈춰졌다.
그리고 정명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화면을 응시했다.
‘만약 상대가 침착하게 대응하면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젠장,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 못할 때 따버려야 하는데. 대체 뭐야? 이 절묘한 시점에 게임중지를 거는 건.’
아니나 다를까, 게임이 중지된 5분 동안 큐어의 미드라이너는 어떻게 하면 살아갈 수 있을 지에 대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었다.
그리고 스태프의 말 대로 5분 후 게임이 재개되었다.
-3, 2, 1 게임을 재개합니다.
게임이 재개됨과 동시에 피싱맨은 정글러와의 스킬 연계를 통하여 아슬아슬하게 정명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렸고, 큐어의 미드라이너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정명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상대방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저것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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