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저 녀석은 몰라도, 너 정도는 이긴다 (3) (수정) >
정명은 지난 번, 창 밖에서 얼핏 봤던 대만 팀 코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환한 얼굴로 대만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과 악수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 그래. 저 사람의 쪽지를 엿봤었지. 내용은 별 것 없었지만.’
우연히 볼 수 있었던 노트의 내용.
정명이 열심히 번역기를 통해 의미를 해석한 결과 알아들을 수 있었던 문장은 ‘라인 스왑’ 한 줄이었다.
라인 스왑. 바텀 라인과 탑 라인의 포지션을 바꿔, 상대방에게 혼란을 주는 전략.
정명은 그 수법을 언제 써먹나 유심히 보고 있었고, 스터테일즈는 vs 한국전에서 라인 스왑을 걸었다. 안타깝게도, 별 재미는 보지 못 했지만.
‘라인스왑을 처음 만들어낸 게 그 팀의 코치인데, 누구한테 라인스왑을 사용하는 거야? 한심하긴. 저 쪽은 라인스왑의 대가들이라고.’
정명이 보기에는 그런 전략을 꺼내들은 대만 팀의 코치는 썩 실력 있는 코치가 아닌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하루 전, 진행 스태프에게 의문의 통보를 받으며 확신이 되었다.
정명의 옆에 있던 조시는 변경되었다는 식스맨 선수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쟤네도 참 이상한 애들이네요. 갑자기 미드라이너를 바꾸겠다니. 아무리 봐도 예정되어 있던 게 아니라, 급하게 바꾼 것 같은데.”
“주전 선수가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하니, 어쩌겠어.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그러려니 해야지.”
“흠, 식스맨으로 등록되어있던 미드라이너라. 어떨 것 같아요? 저기 지금 키보드를 꺼낸 저 사람 같아 보이는데.”
“글쎄. 뭐, 눈으로 본다고 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경기를 같이 치러 봐야 알지.”
OMA의 반대 편 자리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이 경기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정명이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는 항상 벤치에만 앉아있어, 경기를 거의 치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어디 한 번 볼까...’
[황뚜이]
피지컬 : 75/85
운영능력 : 65/80
팀워크 : B+
포텐셜 : B+
‘원래 있던 주전 미드라이너 보다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확실히 식스맨으로 나온 사람은 주전으로 뛰던 사람보다 실력이 떨어졌다.
때문에 정명은 자신의 팀원들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얘들아. 저기 식스맨이라는 사람 있잖아.”
정명이 새로 들어온 식스맨에 대해 뭐라 말하려는 도중, 또다시 관중석에서 커다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화이팅!]
[&&뻐*USA!]
“아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 하자. 많이 시끄럽네.”
팀원들은 그 말과 동시에 우르르 부스로 들어갔다.
코치가 마지막으로 들어가며 방음 부스의 문을 철컥, 닫자 순식간에 모든 소음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정명은 작전노트를 펼치며 말했다.
“전략을 바꾸자. 좀 더 공격적으로 해보는 게 좋겠어. 미드 라인전은 내가 무조건 이길 테니까.”
그리고 잠시 후.
곧바로 밴픽이 시작되었다.
밴픽이 시작된 뒤. 대만 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맨을 밴했다.
“아, 역시. 풀어줄 리가 없지. 아쉽게 됐어.”
“아뇨, 아쉬워 할 필요 없어요. 저 다른 것도 잘 합니다.”
정명은 코치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OMA와 스터테일즈와의 경기, 지금 시작합니다!
...
경기가 시작되고, 5분이 지났다.
정명은 현란하게 컨트롤을 하는 와중에도, 조시와 잡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근데 조금 허무하네. 대만의 최고 미드라이너라는 사람을 잡으려고 준비를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아쉬워요?”
“전혀. 그 사람, 되게 잘 하는 사람이었거든. 식스맨을 내보내줘서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야.”
오늘을 위하여 수많은 전략과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정명은 그 모든 것이 쓸모가 없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피지컬 83, 그리고 집중력 130%.
라인전을 이기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원래 나가기로 했던 선수의 컨디션 난조로 인하여, 식스맨이었던 미스테리 선수로 교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아, 미스테리한 선수로 교체되었다는 게 아니라, 아이디가 미스테리.....
-엇, 초반부터 정명의 불여우가 바짝 달라붙습니다. 이건 조금 무리 아닐까요!
해설자의 소개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정명이 선공을 취했다. 안정적인 운영을 선호했던 기존의 스타일이랑은 정 반대의 움직임이었다.
‘이 녀석과 싸운다면, 피지컬 싸움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지. 개싸움으로 몰고 간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스킬로 살펴본 미스테리의 피지컬은 75. 정명의 피지컬보다 8 낮은 수치였다.
얼마 차이 안 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명은 그와 스킬을 섞으며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눈보다 손이 빠르다고는 하는데, 최소한 저 녀석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니겠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보여.’
정명의 동체시력이 좋아졌기 때문인지, 미스테리의 손이 느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명은 미스테리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서로의 캐릭터가 지근거리에서 마주본 시점.
미스테리가 날린 스킬을 정명의 캐릭터가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순간, 정명은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의 모든 스킬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OMA_정미드 님이 ST_MIS님을 처치하였습니다.]
-솔로 킬! 태국 전에 이어, 정명 선수가 또다시 솔로 킬을 달성합니다!
-대만 선수도 잡아내다니, 이제는 정명에게 피지컬이 낮다는 말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좋아지는 느낌이에요!
게임이 시작된 후 6분 만에 솔로 킬이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대만 팬들의 응원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탄식과 아쉬움의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분위기가 축 쳐지기 시작했다.
정명이 솔로 킬을 내던 그 시각.
대만의 국회의원과 같이 경기를 관람하던 스터테일즈의 코치는 제 발 저린 듯,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애들이 외국에 처음 와서 컨디션이 안 좋나 봅니다. 주전으로 뛰던 미드라이너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 식스맨으로 교체 한 건데, 저 녀석도 저러니 원.”
“자네, 그거 아는가? 올해, 프로게이머 육성 지원 예산이 300만 달러였다네. 내년에는 더욱 금액이 늘어날 예정이고.”
“아, 예. 물론입니다. 국민의 혈세이니만큼 더 잘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애들을 좀 더 바짝 조여 놨어야 하는 건데. 어휴, 북미 팀 따위한테 이게 대체 무슨 창피인지.”
그리고 그런 코치의 변명을 듣던 국회의원은 은근히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건 그냥 저 OMA의 미드라이너가 더 잘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컨디션이 안 좋니, 뭐니. 거기다가 굳이 실력이 더 떨어지는 식스맨을 투입한 이유도 모르겠고. 코치의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은데, 구단주와 한 번 얘기를 해 봐야겠어.’
대만의 국회의원은 코치가 들었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했을 생각을 하며,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
경기 시작 12분 째.
이제 대만의 미드라이너는 타워 옆에 꼭 붙어있어야 했고, CS는커녕 경험치만 겨우 받아먹는 신세가 되었다.
바보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꽤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타워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나오면, 바로 궁극기 연계를 통해 잡아먹힐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조시는 은근슬쩍 미드로 캐릭터를 움직였다.
“저거 타워에서 안 나오네요. 타워 다이브 한 번 할까요?”
“아니. 타워에서 안 나온다면 내가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뭐. 라인 쭉쭉 밀어 넣고, 다른 라인 지원을 갈게.”
그 후, 정명은 대만 선수들에게 끙끙대고 있던 탑과 바텀 라인을 하나 둘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이 탑으로 지원을 가서 킬을 따 낸 순간. 환호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대만의 응원단이 열심히 응원 소리를 내고 있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함성이었다.
“쟤네들, 기지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네. 그럼 타워라도 돌려 깎을까?”
한타라는 것이 벌어지지 않은 경기였지만, 어느 새 경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마무리단계만 남아있는 것이다.
OMA는 연습에서 하던 대로 타워를 돌려 깎거나, 상대 팀이 기지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대형 오브젝트를 취하며 점수 차를 더욱 크게 벌려나갔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되던 경기는 경기 시작 30분 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타를 치르며, 끝이 났다.
-GG! 북미의 OMA가 대만을 꺾고, 1승을 추가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3위로 올라간 OMA가 이런 경기력을 발휘하다니요!
-GLG, 보고 있나요? 당신들을 꺾고 월챔에 올라간 팀이 이렇게나 잘 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정명에게 보상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월드챔피언십 조별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승리 보상으로 10000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휴, 또 다시 겨우겨우 1승. 정말 한 판 이기는 게 이렇게도 어렵다.’
정명은 메시지창을 보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는 보상 메시지창을 봐야 이겼다는 실감이 드는 정명이었다.
팀원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를 얼싸 안고는, 하나 둘 부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음부스 밖으로 나왔는데도 큰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특히나 대만 쪽 응원단이 있던 곳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선수들이 부스에서 나오면서부터 다시 관객석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너희들한테 가는 연봉이 아깝다. 쓰레기!]
[북미따위한테 지냐? 너희들은 대만의 수치다!]
정명 일행은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 했지만, 분위기가 살벌해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졌다고 위로해주는 것은 아니겠지?”
“저 표정으로? 너무 살벌한 위로 같은데?”
그리고 그 후, 너무나 뻔하다고 할 정도의 일이 진행되었다.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대로 나오려고 했고, 진행 스탭은 그런 그들을 말리기 바빴다.
“여러분! 관객 매너를 지켜주십시오. 선수들은 최선을 다 했습니다!”
“꺼져 새꺄! 너도 맞고 싶어?”
하지만 이곳은 대만이 아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주최 측은 경찰을 불렀고, 곧이어 총을 소지한 무장 경찰이 하나 둘 들어온 이후로는 관중들은 무척이나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는 온라인 공격이었다.
먼저 스터테일즈의 공식 홈페이지가 해킹되더니, 메인 페이지가 IS 무장단체의 사진으로 변경되었다.
곧이어 선수들의 핸드폰번호가 털렸고, 특히 이번 경기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의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순식간에 1만개 이상 쌓이는 기염을 토했다.
누군가는 다음 경기에서 이기면 되지 않냐며 그들을 말렸지만, 애초에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할 사람들이었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응원을 간 국회의원 또한 쌍으로 욕을 먹었다.
너는 거기에 왜 갔냐, 세금으로 간 거냐, 네가 가서 선수들이 부담을 가진 게 아니냐 따위의 말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대만의 국회의원은 혹시라도 표가 떨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경기가 끝난 후 6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명은 그렇게 일이 끝나는 줄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연습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정명에게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미녀 매니저 메이. 등장했습니다!......어...저기, 안녕하세요? 제 말 들리시죠?”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왔지만, 다른 팀원들은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거나 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불쌍한 모습을 보다 못한 정명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이제 가서 연습해야 하는데.”
“당신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오늘은 매니저가 아니라, 통역이에요.”
메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경호원과 함께 온화한 표정으로 서 있는 중년의 남자가 정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만과의 경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정명은 레딧을 보던 조시에게서 스터테일즈의 코치가 경질되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코치 덕분에 경기에서 약간 득을 봤던 정명은 내심 아쉬워했다.
“아쉽네. 그 사람, 되게 작전 못 짜던 사람이었는데.”
“그쵸. 그런데 비리혐의가 들통 났다고 하더라고요. 구단이 말에 따르면.”
대만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은 역시나 정치인이었다.
성난 민심이 응원을 온 자기한테까지 향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군데 미리 손을 써뒀다.
먼저 희생양으로 코치를 내세웠다. ‘나 대신 이 녀석을 욕해라’ 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만의 국회의원은 성난 민심을 달래는 방법으로 정명을 띄워주는 것을 선택했다.
조시와 에리는 레딧에 번역된 대만의 기사를 읽으며 박장대소했다.
“세월의 벽을 뛰어넘은 천재 게이머. 과연 그의 정체는? 으아...이게 뭐야. 오그라들게.”
“이것도 있어요. 한국인의 날카로운 창이 대륙의 심장을 관통했다...”
“푸푸푸”
“크하하하하!”
정명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만 좀 웃어. 나도 민망하니까.”
그 기사에는 대만의 국회의원과 정명의 투 샷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저놈들이 못해서 졌다.’ 라는 프레임이 형성되기 전, ‘정명이라는 천재 게이머의 벽을 넘지 못했다.’ 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려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욕을 먹지 않고 싶어 한 행동이었지만, 정명은 그 반사이익으로 대만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근데 이해가 안 가는데요. 대만은 한국 싫어한다면서요.”
“몰라. 그 국회의원 말로는 대만만큼 한류가 퍼진 나라가 없을 거래. 나중에 꼭 놀러오라던데?”
하지만 정명에게 가장 기쁜 건, OMA의 조별리그 통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정명은 조별리그의 남은 일정표를 쳐다봤다.
어느 새 조별리그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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