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그 녀석들이 남긴 발자국 >
[퀘스트를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8000포인트, C급 선물상자 1개가 지급 완료 되었습니다.
‘아니, 이건 됐고, 뭐? 선수를 구해?’
그토록 원하던 보상이 떴건만, 정명은 메시지창을 허겁지겁 치우며 조시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린데? 뭐야, 어떻게 된 일이야?”
-글쎄요. 휴가여서 전달이 안 됐나? 아무튼 처음부터 얘기하자면 조금 길어질 텐데, 혹시 시간 되세요?
“음, 글쎄. 잠깐만...”
정명은 뜻밖의 소식에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듣기로 하고는 적당히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들을 얘기는 다 들은 것 같았기도 하고, 어차피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전화를 끊은 가장 큰 이유는 송하니가 옆에서 핸드폰을 든 채 불쌍한 얼굴로 열심히 변명을 하고 있는 꼴을 더 이상은 봐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언니...아니 진짜 그게 아니라...지금 갈게. 응.”
송하니는 정명을 도와주기 위해 밤늦게까지 PC방에 죽치고 있었어야만 했다.
아무리 방학이라지만 17세 여고생이 밤늦게까지 밖에서 논다는 일탈을 허용해줄 집은 거의 없었으므로, 송하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곧장 가겠다는 말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화통화를 마친 송하니는 마치 막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하니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내가 미쳤었나...갑자기 실력이 늘어난 것도 이상하고...”
따라서 책임감을 느꼈던 정명은 송하니를 차에 태워 허겁지겁 집에 보내 주었지만 마지막 관문이 있었다. 주택 현관 앞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송하니 언니라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정명의 일행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명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마치 ‘네가 착한 우리 동생을 꼬신 놈팽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이 대체 몇 시인데 애를 여태까지 데리고 있었던 거예요?”
송하니 언니의 잔소리는 10분 넘게 계속되었고, 피곤에 찌든 정명은 딴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10분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생각하던 의식의 흐름은 마침내 팀의 선수가 나갔다는 생각에까지 번졌고, 어떠한 호기심이 일어난 정명은 병아리 감별사 스킬을 송하니 언니에게 사용해 보았다.
[송하나]
피지컬 : 35/65
팀워크 : C+
포텐셜 : B
‘그냥 그러네. 물론 일반인 치고는 꽤 잘 하기는 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동생과는 달리, 언니 쪽은 그다지 재능이 없어보였다. 물론 평범한 사람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지만, 동생과 비교한다면 썩 특출 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태창을 보기 위해 정명이 허공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자, 송하나는 더욱 화가 났는지 정명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봐요, 듣고 있어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정명이 해방된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다음부터 조심하라는 송하나에게 연신 사과한 뒤에야 정명은 겨우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
그 시각.
세체미. 즉 세계 최고 미드라이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UART의 불칸은 최근 소문이 자자한 듀오의 플레이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와, 메카콤보? 진짜 말도 안 된다 이건. 저놈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애들이지? 동일아, 너는 뭐 짐작 가는 거 있냐?”
마찬가지로 UART 정글러를 맡고 있는 한동일은 그 물음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혹시 신인들인가? 그 왜, 감독님이 요즘 신인들 장난 아니라고 했잖아. 너희들 긴장 안 하면 걔네들한테 추월당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그게 괜히 겁주려고 한 소리가 아니었나보지.”
한동일은 그렇게 말 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플레이 스타일은 화려한 개인기라기보다는 완벽한 호흡이었고, 따라서 재능보다는 연습경험이 많아야 플레이할 수 있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또, 신인이 저런 플레이를 보여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더욱 큰 문제였기에 한동일은 그 듀오가 신인이라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잠시 뒤, 컵라면을 먹으며 리플레이를 열심히 보던 한동일은 관전 방을 들락거리더니 의아한 듯 말했다.
“우리랑 같은 팀으로 했던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은 보이지를 않네. 오늘은 이만 쉬는 건가?”
한동일은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 그 듀오의 신기할 정도의 연계 플레이를 보며 감탄을 하긴 했지만 그 판은 같은 편에서 플레이를 했었다.
물론 그 판은 이기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해외 휴가 일정을 당기면서까지 한국으로 귀국한 이유는 랭크 게임에서 그들에게 업혀가기 위함이 아니라, 직접 상대해보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두 명의 UART 선수들은 다시 한 번 다음 게임 찾기를 눌렀다. 이번에는 같은 편이 아닌, 상대 쪽으로 만나길 바라며.
하지만 그들을 만나길 바라며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고, 결국 리플레이나 돌려 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 관전하기 뜨는 것 보면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것도 아닐 텐데...아무래도 오늘은 그만 할 건가 보다.”
“그런 것 같네. 그래도 이대로 끝내기 아쉬운데, 그냥 한 판 더 돌릴래?”
“아니. 재미없어. 그 녀석들이 없다면, 우리도 이만 끝내지.”
지금 게임 찾기를 누르면 그 듀오를 만나려는 사람들만 바글거릴 것이다. 물론, 무척 수준 높기야 하겠지만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며칠 뒤.
몇몇 코어 팬들만 알고 있던 정명과 하니의 소문은 이제 모든 팬들에게로 퍼져나갔고, 그에 관한 특집 기사나 분석도 끊이질 않고 올라왔다.
거기에 더해 겨우겨우 고용한 WC의 선수들까지 정명과 송하니에게 물을 먹은 이후, JP미디어는 그들을 잡기보다는 회유하기로 작전을 바꿔버렸다. 1년 간 자신들의 인터넷 방송에 방송을 하는 조건으로 100만 위안, 약 1억 6000만원을 계약금으로 내 건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화려한 플레이에 매혹된 팬들이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지만 그들은 그 이후로는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팬들의 아쉬움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사건은 올드 팬들만이 아는 도시전설로 취급되었다.
@@@@
며칠 뒤.
송하니는 정명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랭크 순위가 내려갔다며 속상한 듯 말하기 시작했다.
-진짜 힘들게 올린 건데...오빠, 괜찮아? 꼭 5위로 올라가야 한다 어쩐다 하더니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잖아.
당연한 현상이었다. 가뜩이나 순위가 자주 바뀌는 그랜드 마스터 리그인데, 갑자기 사람이 급속도로 유입되며 그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으니까.
따라서 남은 휴가기간 동안 게임에 접속도 하지 않은 정명과 송하니의 순위가 뚝 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정명은 이제 솔로 랭크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하 웃었다.
“상관없어. 5위는 한 번만 달성하면 되는 거였거든. 그 이후로는 떨어지건 말건 상관없어. 그보다 너야말로 괜찮냐? 늦게 들어가서 엄청 혼났었잖아.”
-응! 그 때는 부모님이 여행가서 없었으니까 별 일 없었어. 울언니, 되게 만만하거든. 그보다 언니가 다음에는 푸키먼 gogo라는 게임기 좀 사다 달래. 미국에서만 파는 거.
송하니를 집에 데려다 준 다음 날. 정명은 송하니에게 약속한 선물들을 사 주었다.
선물이라고 해봤자 가방, 지갑 따위가 아니라 비싼 게임기들이였지만 송하니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송하니의 말로는 언니도 그 게임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동생을 밤늦게까지 데리고 노는 양아치’ 이미지는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울언니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그때는 나를 걱정해서 화를 냈던 거였지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니까 봐줬어.
“그래. 앞으로 프로게이머 생활 힘내고,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 물어 봐. 난 이만 가야겠다.”
-응, 오빠 빠이!
송하니는 2부리그에 있는 팀으로 가게 되었다. 실력이 달려서라기보다는 송하니에게 맞춰줄 수 있는 팀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송하니가 여자인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선수뿐만 아니라, 스태프까지 거의 남자인 프로게임구단에서 여자애 혼자 달랑 놔두기에는 무척 불안했으니까.
거기다가 학업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연습에 매달릴 수만은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난관이었다.
나중에 프로게이머로써 두각을 드러낸다면 모를까, 평소에 게임을 자주 하던 딸이 뜬금없이 학교 때려 치고 프로게이머로 올인 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으로써는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는커녕 황당해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송하니는 팀 전원이 여자이면서도 분위기는 조금 자유로운 그런 팀을 찾아가야만 했고, 정명은 딱 맞는 팀을 하나 소개해 주었다. 과거의 송하니가 처음에 들어갔던 그 구단으로.
정명은 송하니의 전화를 끊고는, 탑승 수속을 위해 데스크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정명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유정명 선수 아니신가요?”
“네. 그런데요?”
“저는 세인이라고 해요. 저도 이스포츠 쪽에서 일 하고 있어요.”
“아,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명과 우연히 만난 세인이라는 사람은 정장을 입은 금발의 미녀였다.
그녀는 정명에게 휴가는 어땠냐, 요즘 프로게이머 생활은 지낼 만 하냐 따위의 것을 물어보더니, 이내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이에요. 정명선수, 근데 아직 계약기간이 많이 남으셨죠?”
“OMA에서의 계약 기간이요? 음...”
이런 것을 왜 묻나 싶었지만 계약에 관한 데이터는 숨기기는커녕 공개되어 있는 자료이기에 정명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렇죠. 8개월인가 9개월은 더 남았을 거예요. 근데 왜요?”
정명은 그렇게 물으며 받은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명함에는 Micro 코퍼레이션 e스포츠 팀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어어? Micro 코퍼레이션? 이 회사도 e스포츠에 투자를 한단 말인가요?”
정명은 살짝 놀랐다. 미국에서 누구나 알 법한 대기업이 언제 e스포츠 팀을 만들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세인은 놀란 표정을 하는 정명의 리액션에 만족했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은 인사만 드리러 왔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
“무척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한국으로 간지 얼마나 됐다고...”
몇 시간 뒤. OMA의 연습실 문을 연 정명은 형광등을 켜며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텅텅 빈 연습실에는 적막만이 감싸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연습실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나간 것 같네. 곧 돌아오겠지.’
아무도 없는 방을 둘러보던 정명은 수북이 쌓여있는 잡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e스포츠 관련 소식을 다루는 잡지를 찾아 한장한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유명 대기업, LOH 프로게임단 진출, 기존 구단 ‘주력 선수 지키기에 안간힘’]
“인기 선수에게 접촉? 나한테는 왜 연락이...있었지 참.”
공항에서 세인이라는 사람에게 명함을 받은 이후, 정명은 비슷한 일을 세 번 더 겪어야만 했다.
거기다 접근한 사람은 다들 모델 같은 미인들뿐이었는데, 하나같이 인사만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우연히 만났다고 하고 싶은 건가? 무슨 일인지 대충 알 것 같군.’
정명은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잡지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토베노 해체에 이어 또...스콜피온즈 해체, ‘결국은 돈에 밀렸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식탁 위에는 서류들이 정신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명이 그 중 한 개의 서류를 주워들어 보니 프로게이머들을 분석한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 프로게이머가 된 사람들부터 기존의 선수들까지. 영입할 수 있는 선수라면 전부 조사한 듯 했다.
정명은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