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귀국
일주일 뒤. 윈터리그의 모든 경기 일정이 끝나고 시상과 함께 폐막식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제 할 일이 없어진 정명은 조시와 함께 연습실 방구석을 뒹굴 거리다가, 초인종이 울리자 문 앞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저에요 저. 당신의 친구.”
‘친구?’
정명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며 문을 여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짐들. 그리고 그 옆에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정명은 그 여자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나요 메이. 그보다 그것들은 다 뭡니까.”
“구단에서 숙소지원을 끊었거든요. 방 빼래요.”
“네? 그게 무슨...”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저 공항까지만 좀 태워주세요. 차 생기셨죠? 다 알아요.”
리그가 끝난 뒤, OMA 선수들은 구단주에게서 차를 한 대씩 선물 받았다.
사실 썩 좋은 차는 아니었다. 구단주가 한국의 팬이었기에 차 또한 현모라는 한국 기업에서 구매하게 되었는데, 몇 번 타본 정명의 느낌으로는 뭔가 덜덜거리는 것 같고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물론, 공짜로 받았으므로 기분은 무척 좋았지만.
“네?네?네? 태워줘요 태워줘요. 택시비 없단 말이에요.”
메이가 답지 않게 온갖 귀여운 척을 하며 아양을 떨었지만, 정명의 입장에서는 정말 뻔뻔한 여자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정명이 미운자식 떡 하나 더 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도중, 둘의 목소리를 듣고 온 조시가 둘에게로 다가왔다.
“어...당신은?”
“정글러 조시죠? 안녕하세요. 그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조시는 몇 달 전, 이 짝퉁 기자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지금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한바탕 욕을 퍼부을 것이라는 정명의 기대와는 달리, 조시는 자존심도 없는지 무척이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공항에 가신다고 하셨죠?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제가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괜찮은 차를 샀는데...”
얼굴이 빨개진 조시가 더듬거리며 자랑을 늘어놓자, 정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참견했다.
“무슨 소리야. 너 아직 면허증 발급 안 됐잖아.”
“아, 예. 그랬죠...”
“됐어.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내가 가지 뭐. 너도 바람 좀 쐬러 갈래?”
그러자 조시는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연습실에 있을게요. 점심도 먹어야 하고.”
“사줄게.”
“동물농장 봐야 할 시간이라...”
“동물농장은 내일 하는데. 됐어. 싫음 말고. 갑시다, 메이.”
정명은 낑낑대며 커다란 가방을 옮기고 있는 메이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물론, 가방을 들어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운동을 좀 더 시키려는 정명의 배려였다.
그리고 정명이 구단주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차의 문을 열자, 메이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구단주가 중고차를 사준건가요?”
“그러면 차를 사주고도 욕먹어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주차가 미숙해서 좀 박았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메이 입장에선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야 정명의 차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이 찌그러지고 긁혀 있었으니까.
메이가 머뭇머뭇하자, 정명이 먼저 차에 타며 말했다.
“뭐해요 빨리 안 타고. 아니면 그 멀리 있는 공항까지 택시 잡고 가시던가.”
......
잠시 뒤, 묻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떠드는 메이 덕분에 정명은 그녀가 왜 이리 빈곤하게 달라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명은 ITU가 해체되었기에 덩달아 해고되었다는 메이의 말을 들으며 탄성을 내었다.
“와, P.O에 진출하지 못 했다고 바로 팀을 날려버린 건가요? 여러모로 대단하네요. 진샤오랑이라는 재벌2세.”
“뭐...애초에 북미에 온 목적이 순위에 들어서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려는 것이었으니까요. 중국에서 안 되니까 여기로 도망쳐왔는데 월챔은커녕 플레이오프도 진출을 못 했으니, 화 낼만 하죠. 그 왜, 아시잖아요. 그쪽 사람들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은 알아준다는 거.”
정명은 예전 진샤오랑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로는 안 된다’ 라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미 그는 예전부터 팀을 해체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수들은 다 재계약 통보를 받지 못 했어요. 그리고 선수뿐만 아니라 직원들 또한 몇몇 사람들만 살아남았죠. 안타깝게도 저는 거기에 속하지 못했지만요.”
“허...그러면 ITU는 프로게임 판에서 영영 손 떼는 겁니까?”
“아아뇨, 중국으로 돌아가 팀을 재정비한다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저도 중국으로 가서 조금 쉴 거고요. 미국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내가 볼 때 메이 당신은 생명력이 잡초 같은 사람이니 금방 다른 곳에 취업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칭찬이시죠? 아, 저기다 세워 주세요. 그리고...”
메이는 차에서 내리며 말을 흐리더니, 이내 킥킥대며 정명의 머리 위로 시선을 옮겼다.
“빡빡머리, 어울려요. 푸훗.”
메이는 그 말을 끝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 때문에 정명은 벗어두었던 모자를 묵묵히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짝퉁 기자가...끝까지 속을 긁어두고 가네. 택시비 받을까보다.’
플레이오프 4강전. OMA는 GLG와의 경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며 결승 진출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GLG전에서 모든 힘을 썼는지 TBM과의 결승전에서는 3:0으로 압도당하며 허무하게 패배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정명은 TBM의 미드라이너 다이로스에게 솔로킬까지 당해버렸고, 결국 본인이 꺼낸 약속대로 삭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삭발을 당하는 모습은 본 팬들은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정명 자신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흑역사가 생긴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오늘따라 머리가 춥군.”
@@@
선수와 직원을 포함한 OMA사람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빈둥대던 조시까지도 휴가를 갔기에 텅텅 비어버린 연습실. 그리고 그곳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정명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새비.”
“그래.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너 출국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빠듯할 것 같으니까.”
이런 텅 빈 연습실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때문에 새비는 공항에 가려는 정명을 바래다주기로 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정명과 이것저것 얘기를 하던 새비는, 이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혹시 소식 들었어? 토베노가 팀을 해체한다더라.”
“네? 진짜요? 서서가 은퇴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비록 경기장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추태를 보이기는 했어도 팀을 해체한다니. 정명이 놀라며 되묻자, 새비는 확실한 정보라고 단언했다.
“일단 이건 걔네들이 발표할 때 까지는 어디 가서 말 하지 마. 사실, 토베노가 시장에 시드권을 이미 팔아버렸거든. 요즘은 원체 이 판에 끼어보려는 기업들이 많으니까 비싸게 팔렸지.”
“요즘은 하도 프로게이머 판이 빨리 바뀌어서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맞아. 확실한 건 아닌데 팀을 해체한다는 구단이 더 있다는 소문도 있어. 덕분에 새로운 자본이 엄청나게 유입된다는 것 같지만 자세한 건 휴가기간이 끝나면 나오겠지. 자, 다 왔다. 여기야.”
새비는 프로게이머를 은퇴한 뒤, 구단의 코치로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팀은 코니라는 신생구단이었는데, 그들은 다음시즌 2부리그를 준비하며 맹연습 중이었고 정명은 한국에 돌아가기 전, 새비가 어떻게 살고 있나 잠깐 보러 온 것이었다.
열리는 리그가 없기에 모두가 휴가를 떠나고는 하는 휴가 시즌. 하지만 연습실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리자, 정명이 그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라. 지금 연습하고 있어요? 집에 안 갔나?”
“쟤네들이 쉬자고 해서 마음 편히 쉬겠어? 다음 시즌에서는 순위에 들어야 한다며 조급함이 목까지 차오른 애들인데. 뭐, 구경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그 말에 기꺼이 연습실로 들어가 본 정명은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아후...졸라답답하네. 야, 돈 아끼지 말고 와드나 좀 사서 부시에 박으라고.”
“알았다.”
“이상한 타이밍에 텔레포트 쓰지 좀 말고. 그러다가 드래곤 사냥 타이밍 못 맞춘다니까?”
다른 선수들을 계속 구박하는 사람이 오더를 맡고 있는지 그는 가끔씩 욕을 섞으며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 성격이 안 좋아서야 무슨 오더를 하나. 아니. 그것보다 팀워크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저 녀석은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실력이 더 떨어진다는 기본 상식도 모르나?’
저런 스타일이 허용되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첫 째. 구박을 하는 사람이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어, 팀원들이 그의 실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둘 째. 다른 팀원들이 모두 순한 사람들이라, 저런 구박도 모두 받아주는 사람들일 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 딴에는 잘 해 보자고 그런 소리를 한 거겠지만, 실제로는 그저 분란을 조장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정명은 새비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줄까 하다가, 오지랖인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나 같으면 솎아냈겠지만,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었으면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저렇게 입을 터는 녀석이 얼마나 잘 하나 궁금한데...흠. D급 스킬상점은 90번대 스킬이었지?’
혼자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기는 뭐했으므로 정명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다음, 스킬상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명이 찾는 것은 이번 윈터리그에서 2위를 한 뒤, 보상으로 열렸던 D랭크 스킬 상점의 스킬들. 썩 좋지는 않지만, 그만큼 싼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스킬들이었다.
......
93. 수확하는 농부 - 구입됨
94. 병아리 감별사
95. 공포의 사령관 - 구입됨
......
‘여기 있네, 병아리 감별사. 이건 꼭 사보고 싶었어.’
[병아리 감별사 스킬을 구입하시겠습니까?]
가격 : 2000 포인트
잔여 포인트 : 25000
생각보다 가격이 셌지만, 걱정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정명은 플레이오프에서 2등을 한 뒤, 2만 포인트를 한꺼번에 벌며 떼 부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
[병아리 감별사 스킬을 구입했습니다.]
[병아리 감별사]
효과 : 일정 등급 이하의 선수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구입 조건 : D급 스킬상점 오픈*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스킬을 업그레이드 할 수 없습니다.
스킬을 구입한 정명은 바로 연습실로 돌아와, 계속 팀원을 구박하며 오더를 내리고 있던 남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페이스트]
피지컬 : 53/65
팀워크 : D 랭크
포텐셜 : 랭크 C
본인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상태창이 보인다기에 무척 기대를 했던 정명이었다. 그러나 상태창 정보가 생각보다 빈약하자,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하고 말았다.
‘알 수 있는 게 너무 단편적이야. 반쪽짜리 스킬이로구만.’
피지컬이야 대충 하는 것 보면 안다. 팀워크 또한 저 사람이 팀워크가 안 좋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이딴 게 무슨 스킬이냐’ 하는 소리가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명은 2000 포인트가 아까워지려했지만, 업그레이드 하면 더 좋은 스킬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믿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쟀다는 듯, 새비가 정명을 불러 세웠다.
“정명. 이제 가자. 시간 됐어.”
“그래요. 구경 잘 했어요 새비. 다음에는 저 사람들과 이야기라도 해 봤으면 좋겠네요.”
@@@@
만 하루 뒤. 정명은 피곤한 몸으로 한국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딴 길로 새지 않고 바로 집으로 들어온 정명이었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피곤함을 느낀 정명은 낮잠을 잘까 잠깐 고민했지만, 얼굴이라도 비추고 싶었으므로 이내 부모님이 운영하는 PC방으로 향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되나보네. PC방은 금방금방 망하고는 하던데.’
주말이었기 때문일까? 사람은 그럭저럭 있었다.
정명이 부모님을 만나러 PC방 카운터로 가니, 모르는 뒤통수가 보였다. 아무래도 알바생인 듯 했다.
그리고 알바생에게 인사라도 할까 하여 카운터로 다가간 정명은 무척 놀라고 말았다.
‘어...쟤는 걔 아닌가? 저번에 우리 피시방 대회 할 때 만났던...’
카운터에는 예전에 만난 사람이자 미래에는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던 천재 프로게이머, 송하니가 컵라면을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명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정명과 눈을 마주쳤다.
“저기요. 계산 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