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윈터리그의 결말 (4)
그 시각, OMA의 첫 플레이오프 상대인 토베노는 OMA의 경기를 보며 OMA 전력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OMA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명을 상대할 토베노의 미드라이너 서서는 OMA와 래디언즈전에서 나왔던 정명의 솔로킬 장면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 할 수밖에 없군. 저건 내가 못 이겨. 나는 퇴보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신인 치고는 제법’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자신과의 격차가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자신을 추월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해도 따라잡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착잡한 표정으로 OMA전을 보고 있는 서서에게 토베노의 서포터, 다스가 다가왔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화면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와, 진짜 잘하네. 저놈 진짜 난놈이긴 하다. 1부리그에 들어오자마자 북미 선수들을 다 깨부숴먹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데 서서, 너 괜찮겠냐?”
“뭐.”
“뭘 모르는 척이냐. 저놈이 건 내기 말이야. 넌 남은 머리털이 없는데, 만약에 솔로킬을 당하면 어떡할 거냐? 눈썹이라도 밀래? 아니, 그건 좀 약하지. 차라리...”
다스는 다음 경기 상대가 강한 것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스를 노려봤다.
‘이 새끼...기회다 싶어서 떠드는 꼴이 무척 같잖군. 쓰레기가.’
생판 모르는 사람 다섯이 갑자기 한 집에 살게 된다면?
당연히 다툼이 있을 수 있다. 싸우는 것은 다른 팀들 또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니까.
하지만 다른 팀들과 토베노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토베노에는 ‘어떻게 이런 놈들만 모았는지 참 신기하네.’ 할 정도로 한 성깔 하는 사람들만 모였기에, 싸움은 있으나 화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서서는 자신이 불쾌한 기분을 나타냈음에도,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다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아, 그래. 그래서 올해 네 연봉이 얼마였지? 개인방송 시청자 수는?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 하도록. 내가 아무리 실력이 떨어졌어도, 너보다는 훨씬 잘 하니까 말이야.”
“......씨발. 지옥에나 떨어져라.”
팀원을 가볍게 닥치게 만든 서서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밖에서 담배를 태우며 한숨을 쉬었다.
‘솔로킬? 삭발? 내가 그런 유치한 장난질에 어울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흥, 어림없지.’
서서는 눈썹 밀고 웃음거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존심과는 다르게 자신의 실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경기에서 솔로 킬을 당할 확률 또한 상당해 보였다.
돌을 발로 차며 화풀이를 하던 서서는 결국 최근 계속 마음에 품어두고 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번에도 지면....그냥 관두는 게 낫겠지.”
서서의 커리어는 2년 전, 정점을 찍고 여태껏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은 프로게이머를 은퇴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만약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나간다면 연봉은 계속 들어오겠지만, 예전 잘나갈 때의 서서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이라면 무척 실망하여 떠나갈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좋은 기억만을 남겨 두고 은퇴한 뒤, 개인방송을 전문적으로 하며 제 2의 인생을 사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 패배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할 확률이 매우 높다.
때문에 서서는 경기 내적이 아닌, 외적으로 일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트위터에 접속하여 누군가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멘탈을 긁어놓는 거지. 그리고 또 경기장에서 만나 한바탕 해 준다면 경기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분명. 그 녀석은 그런 놈이니까.’
......
“아니, 시발. 이게 뭐야!”
저녁 시간이자 쉬는 시간, 트위터를 보고 있던 피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서서의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비꼬는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른 팀에 몸담고 있던 시절, 구석에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놈이 팀원 하나 잘 만났다고 으스대는 꼴을 보아하니 비웃음이 절로 나온다. 혼자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푸훗!
?Adress : 누구요? 혹시 요즘 트위터에서 자주 깝치는 OMA의 그 사람 말인가요?
?서서 : 정확히 누구라고는 얘기 안 하겠지만...아시죠? ㅎㅎㅎㅎㅎㅎ정확히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OMA에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은 피터밖에 없었기에, 누구를 향하는 글인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글이었다.
서서는 더 이상 정명을 건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 대신, OMA시절 자신에게 열등감을 표출하고는 했던 피터에게 화살을 돌리기로 했던 것이다.
“이 퇴물 새끼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 열 받게. 내가 이걸 그냥...”
그리고 그런 서서의 꾀가 제대로 먹혔는지, 스마트폰을 잡고 한참을 낑낑대던 피터는 이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가 담배를 연달아 피우기 시작했다.
서서가 있던 시절 OMA의 분위기를 알지 못하는 정명으로써는 가만히 있기로 했으나, 저 모습을 보아하니 이대로는 연습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는 피터와 이야기를 하러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정명을 코치가 붙잡았다.
“여기선 나한테 맡겨. 좋은 방법이 있거든.”
잠깐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간 코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물보따리를 들고 왔다. 덕분에 피터를 포함한 OMA 사람들은 잔뜩 쌓여있는 상자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잔뜩 있네? 이게 다 뭐에요?”
“팬들이 보내준 선물이야. 먹을 거랑 장식품이랑...편지도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P.O에 진출했다고 이것저것 잔뜩 보내준 모양이야. 그러니까 다들 힘내라. 알겠지?”
담배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피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과장되게 기쁘다는 리액션을 취하며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를 집어 들고는 얼굴을 폈다.
“와, 편지가 핑크색이야! 혹시 나를 좋아하는 여고생이 보낸 건 아닐까?”
피터의 들뜬 말에 아무것도 받지 못한 조시는 부럽다는 표정을 숨기며 비꼬았다.
“지랄. 광고나 행운의 편지 같은 거겠지. 정명이면 모를까, 네게 그런 게 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데.”
“흥, 질투하는 남자의 모습은 정말 추하군. 아무런 선물을 받지 못한 패배자는 컵라면이나 끓여먹도록.”
정명은 조시와 피터의 만담을 한 귀로 흘리며 자신에게 도착한 편지를 뜯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여. 저는 위즐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11살이고 취미는....
오늘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왔는데...
......
말이 길어졌네여. 사실 제가 팬이라기보다는, 군대 간 오빠가 아저씨의 팬이었어여. 실습시간에 구운 쿠키를 동봉하니, 먹고 힘내셨으면 좋겠씀니다.
LA에서 위즐이.
맞춤법도 잘 맞지 않는데다 팬레터라기보다는 일기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귀여워 보이는 편지였다.
그리고 정명이 편지를 읽고 다시 봉투에 넣어두는 동안에도 여전히 투닥거리던 피터와 조시는 신이 난 표정으로 편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팬들의 선물공세 덕분에 싱글벙글하던 연습실 분위기가 대번에 서늘해졌다. 피터가 받았던 것은 정말로 행운의 편지였던 것이다.
조시는 자신의 악담이 그대로 맞아떨어지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돌렸다.
“어...음...지금 ITU랑 미라클 애들이 플레이오프 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어떻게 되고 있나 잠깐 볼까?”
정명이 샤오랑과 독대를 한 후, ITU와 OMA는 협력을 맺고 많은 연습게임을 함께 하곤 했다.
OMA 팀원 전부가 놀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던 ITU였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ITU에게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쟤네는 뭔가 쫓기듯이 플레이하네. 너무 급해.”
“그러게. 우리랑 연습할 때는 잘만 하더니, 왜들 그러지?”
그리고 30분 뒤, 첫 플레이오프 경기의 결과가 나왔다. 나름 정도 들었던 팀인 ITU의 경기 결과는 안타깝게도 ITU의 3:2 패배. 마지막 5세트까지 간 초접전이었다.
“뭐...저 사람들도 다음에 더 잘 하면 되겠지. 그럼 우리도 연습 시작하자. 오늘 따라 왠지 연습이 더 하고 싶네.”
ITU가 저런 꼴이 되는 것을 보니, 결심이 바로 섰다. 아껴뒀던 포인트를 남기지 않고 모두 사용해, 최대한 전력을 끌어올리기로.
연습을 하기 전, 정명은 곧바로 상점을 열어, 포인트를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70/100)
정신력 (50/100)
오더 (50/100)
판단력 (51/100)
‘지금 올린다고 했을 때, 효율이 높은 건, 아마도 오더. 혹은 판단력. 피지컬은......아마 안 되겠지?’
[피지컬 스탯을 1 구입하시겠습니까?]
가격 : 5000 포인트
‘헉, 시발. 이게 뭐야. 엄청 비싸잖아!’
스탯 1당 포인트 5000. 피지컬스탯 60대에서 스탯을 1 올릴 때 드는 포인트가 2000이었으니, 가격이 2.5배가 오른 셈이다.
정명은 기겁하며 아니오 버튼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 하려던 대로, 판단력이나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정명은 판단력이라는 의미 모호한 이름의 스탯은, 올리게 된다면 ‘눈치’가 좋아진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가장 크게 변하는 능력은 경기를 이끌어 나갈 때 좀 더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해진다거나 하는 것이었지만, 상대방의 정글러가 갱킹을 왔을 때, 상대 라이너의 어색해지는 움직임을 금방 눈치 챈다거나 하는 부가 효과까지 볼 수 있는 스탯이라는 추측을 했던 것이다.
‘좋아. 그럼, 살까.’
[판단력 스탯을 9 구입하시겠습니까?]
가격 : 8100 포인트
[구입에 성공하였습니다!]
남은 포인트 : 200
*판단력이 60이 되었습니다! 스킬 상점이 일부 개방됩니다.
*이제부터 스킬 해금 조건을 발견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스킬 상점이 개방되었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상점을 살펴본 정명은, 이내 상점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네 명의 팀원들이 벌써 연습 준비를 마치고 정명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경기를 풀어나가며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 본 결과, 확실히 운영능력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멘탈이 작살난 피터가 말썽을 피우고 있었으니까.
원딜러 피터와 함께 다니는 서포터, 인포는 그런 피터의 플레이가 영 못마땅한지 핀잔을 넣었다.
“피터. CS좀 잘 챙겨라. 뭘 그리 다 흘리고 다녀? 차이가 점점 벌어지잖아.”
“야, 씨...난 이러고 싶어서 그러냐? 내 캐릭터는 사거리가 짧아서 그런 것 아니야. 너야말로 견제 좀 제대로 해 봐. 미치겠네 진짜.”
경기 전, 차라리 오늘은 쉬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볼 때에는 괜찮다고 했던 피터였지만, 피터의 상태는 누가 보기에도 썩 좋지 않아 보였다.
결국 둘이 싸우는 것을 보다 못한 정명은 둘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만. 둘이 그만 말 하고, 게임에 집중해라. 그리고 이번 경기 끝나면 잠깐 쉬자. 아니, 오늘은 쉬자. 이대로는 연습이고 뭐고 안 되겠어.”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연습은커녕, 싸우다가 내일 연습도 망칠 판이니까.
잠시 뒤, 정명은 연습실을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좋지 않아. 경기 날이 코앞이라고. 서서 이새끼, 사람 됐나 싶더니 착각이었네? 정말 거지같은 방법으로 엿 먹이는구나. 저 피터의 발광하는 꼬라지를 보면, 작전이 제대로 먹혔다고 좋아하겠지. 하지만...’
정명은 스킬 상점을 열어, 이번에 해금된 스킬 설명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공포의 사령관]
팀원의 정신을 제압하여,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하도록 정신을 몰아세웁니다.
효과 : 사용 시, 팀원들의 집중력이 항상 100%로 유지됩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스킬을 장기간 사용하면 팀원들이 사용자에게 공포를 느껴, 팀원들과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가혹한 지휘를 포함한 다른 집중력 향상 스킬과 동시 사용 불가.
*습득 방법 : 가혹한 지휘 구입, 그리고 팀원들의 공포가 30 이상일 시 구매가능*현재 공포 수치 : 27
‘이거라면...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