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제발 우리끼리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이지혜 팀장 말인데요.”
“왜? 다른 이야기 나오는 거 또 있어?”
“전민규 팀장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래요.”
“에이… 그건 너무 갔다.”
“모르는 소리. 두 사람 데이트하는 거 본 사람이 몇 명인데요.”
“진짜?”
“아, 그렇다니까요? 며칠 전에도 두 사람 손 꼭 잡고 명동에서 데이트하는 걸 오 팀장님이랑 혜진 씨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하더라고요.”
“어쩐지… 그러면 그렇지. 계약직 출신이 대리 3년 차에 곧바로 팀장 승진이 가능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니까.”
“이거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뭐 어쩌겠어?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라고. 그나저나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이 팀장 여우였네, 다른 사람들은 다 여우라는 거 알고 있는데, 혼자서만 곰인 척하는 여우.”
이지혜가 팀장을 달았던 해에 회사 전체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핫 이슈.
물론 그 핫 이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지혜 본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지혜 팀장은 계약직 시절 때부터 스폰서들이 꼭 한 명씩은 있어 왔네요.”
“스폰서?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나세요? 공 이사님.”
“아!”
“당시에도 말 많았잖아요. 계약직 직원을 나크리스 본사 트레이닝에 보냈던 거. 거기다 그 일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정규직 전환됐잖아요. 어디 그뿐이에요? 정직원 달고 또 얼마 안 지나서 지원자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지혜 팀장이 쁘띠토널 본사 파견근무자로 선정되고, 거기 다녀온 뒤에 대리 승진 곧바로 한 거 아니에요.”
“흐음…”
“다들 그냥 알면서도 눈 감고 쉬쉬하고 있는 거지, 공 이사님이 이지혜 팀장 스폰서라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요. 거기다 그때 공 이사님이 이지혜 팀장 쁘띠토널로 파견근무 보낼 때에도 사실은 공 이사님 와이프가 두 사람 관계 눈치채서 잠시 거리를 두려고 보냈던 거라고….”
“헐… 대박.”
모든 집단이 다 그렇듯, 홍성에도 뒤에서 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또 그게 진실이 아님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알면서 자기가 퍼뜨리기 시작한 루머에 신빙성을 부여하고자 더 말도 안 되는 억측을 진실인 양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정작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루머의 당사자들 앞에선 무척이나 좋은 사람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모자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똑똑하고 또 일머리가 있는 사람들이 그런 좋지 못한 버릇, 습관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보통 일머리가 부족하고 또 자기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사람들은 회사에 와서 자기 몫의 일을 쳐내기에 정신이 없지 그런 의미 없는 루머들을 만들어 퍼뜨릴 여유가 없을 테니까….
“알면서도 눈 감고 쉬쉬하고 있는 사람들… 공 이사님이 이지혜 팀장 스폰서였다는 걸 아는 사람들 중에 유진 씨가 자신 있게 이름 댈 수 있는 사람 몇 명이나 있어요.”
“차, 차장님….”
“내가 공 이사님 사모님과 개인적으로 무척 친하거든. 우리 애랑 공 이사님 첫째가 같은 어린이집 다니잖아. 이제는 공 이사님보다 그 집 사모님이랑 더 가까워. 이야기해 줄 건 이야기해 줘야지. 두 사람 말고 또 누가 있어? 공 이사님이 한때 이지혜 팀장 스폰서였다는 사실.”
여자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이지혜의 뒷담화를 하고 있던 두 여직원.
그런데 그 여직원들은 장향은이 그 화장실 안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 했던 모양이다.
장향은이 볼일을 마치고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와 그 세면대 앞으로 서자, 각자 거울 하나씩을 차지하고 서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여직원 둘은 한껏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은 세면대 앞으로 붙어서 섰고, 거울을 통해 그 두 여직원과 눈을 마주치며 장향은이 다시금 물었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나도 같이 좀 알자. 나도 궁금해서 그래요.”
“아, 그, 그게….”
“힘이 넘쳐나는 모양이네, 두 사람은….”
“….”
“내가 정말 듣기 싫어하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에요. 이미 딱 그 짧은 문장 안에 남녀 성차별을 대놓고 하겠다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 있잖아. 근데….”
장향은은 입술에 칠하던 립스틱을 잠시 내려놓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뒤,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몸을 돌려 그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한 번씩 이런 걸 내가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할 때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툭툭 내뱉는 사람들한테 자신감 있게 그건 남녀 성차별적인 발언이니! 후우… 하지 말란 말을 못 하겠어. 맞는 거 같거든.”
“…!”
“뭐가 문제지, 두 사람은?”
“….”
“회사가 두 사람 월급만 제때 안 줘? 맡고 있는 업무들이 너무 만만한가? 그런 것도 아님 회사는 그냥 취미 생활로 다니고 있는 거야? 언제든 잘려도 다른 일자리 정도는 손쉽게 구할 수 있나 봐, 두 사람은?”
“…!”
“아니, 그렇잖아. 두 사람 말대로 하자면 공 이사님, 그리고 홍성 황태자 전민규 팀장이 이지혜 팀장 스폰서라는 말인데, 그런 막강한 스폰서를 잡고 있는 이지혜 팀장이 오늘 당장에라도 지금 두 사람이 한 말 트집 잡아서 두 사람 모가지 댕강…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 아니….”
“나도 갑자기 궁금해지네. 이지혜 팀장이 진짜 그 정도 파워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우리 같이 한번 확인해 볼까? 궁금하잖아. 우리 또 궁금한 건 잘 못 참는 성격이거든.”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 뒤에서 내 욕을 한 것도 아닌데… 하긴, 내가 오늘 운이 좋아서 두 사람이 내 뒷담화 까는 걸 직접 안 들었다 뿐이지,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내 뒷담화도 깠을 거야, 그치?”
“아, 아니에요, 차장님. 무슨 그런 말씀을…”
“뭘 또 내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난 두 사람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얼마든지 내 뒷담화를 깔 가능성이 높다는 걸 방금 확인을 해서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걸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야. 두 사람이 공 이사님이 이지혜 팀장의 스폰서였다는 걸 두 사람 나름의 합리적 의심을 통해 사실화시키는 것처럼.”
“…!”
“혹시 내가 성격 파탄자라 이전 부서에서 제대로 적응 못 하고 영업부로 트랜스퍼됐다는 소문도 여기서부터 시작된 건가?”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내가 만토바 창고 사장들 한 번씩 한국 들어올 때마다 밤늦게까지 접대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호텔 방까지 함께 들어간다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나 봐, 그치? 등잔 밑이 어두웠네. 난 또 날 흔들었던 게 내가 밝히고 있는 등잔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줄 몰랐어.”
“아, 아닙니…”
“제발 조심 좀 하자.”
“….”
“내가 뭐 두 사람 인생의 유일한 낙까지 해라, 하지 마라 할 자격은 없지만, 여기 회사 아냐. 그럼 아무리 영업 기획부랑 다른 층을 쓴다고 하더라도 조심할 건 조심해 줘야지. 벽에도 귀가 있어, 이 사람들아.”
“…네.”
“김 대리. 입사 후배가 자기보다 먼저 팀장 다니까, 배가 아파?”
“아, 아닙니다.”
“뭘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아니라고 대답을 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아니면 회사 그만둬야지. 그 정도 승부욕도 없는 친구를 내가 왜 계속 데리고 일을 해야 하나?”
“…!”
“최 대리. 몇 달 차이 안 나는 입사 선배. 그런데 그 선배가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들어와서 자기가 이제 막 대리 다는 동안 팀장까지 달아 버리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정신 승리를 하고 싶은 거야?”
“….”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면 뭐가 좀 달라져? 마음이 편해지는 거야? 왜 대답들을 안 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나도 필요하면 그 방법을 좀 써보려고.”
“….”
“사람들이 왜 이렇게 겁들이 없어? 왜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하냐고. 자기들 때문에 괜히 내가 다 부끄럽다. 제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마. 자기들이 하는 거처럼 앞에선 웃을지 몰라도 뒤에서 욕해, 사람들.”
* * *
하지만 이지혜는 우리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그리고 우리 모두의 바람대로 당시의 그 상황을 당당하게 헤쳐나갔다.
피하지 않았다.
돌아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소문들을 정면으로 다 받아내고, 그런 소문을 만들어 퍼뜨린 사람들이 무안해질 만큼 솔직하게 그 소문을 상대해 나갔다.
“이 팀장, 사실이야?”
“뭐가요?”
“그….”
“…?”
“전민규 팀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팀장급에서 말이 많이 돌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이지혜의 팀장 승진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일 만큼 빨랐다.
그런데 여기서 비정상적일 만큼 빨랐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계약직 출신이었기 때문에 붙일 수 있는 수사인 거지, 만약 그녀가 정규직 출신이었다면 그냥 조금 빨리 올라갔네… 하는 수준이었다.
“능력 좋다, 진짜….”
“…?”
“그래, 이 팀장 외모에 능력… 잡으려면 그 정도는 잡아야지. 이 팀장 눈에 어지간한 남자가 들어오겠어? 절대 놓치지 마라.”
“뭘… 요?”
“나 앞으로 이 팀장한테 무조건 잘 보여야 되는 거 맞지? 확실히 인생은 한 방이야, 그치?”
“오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에이…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그냥 난 두 사람 잘되길…”
“아니, 그러니까 뭐가 궁금하신 거냐고요.”
“에이, 뭘 또 다 알면서 그래? 알았어, 알았어. 쏘리. 내가 선을 넘었네. 난 그냥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생각해서 한 말인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내 실수. 미안해.”
“아뇨. 그렇게 얼버무리시니까 괜히 저만 별거 아닌 일에 정색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잖아요. 오 팀장님 말씀대로 우리끼리니까… 그니까 편하게 물어보세요. 뭘 좀 제대로 물어보셔야, 어떤 부분이 궁금한지 알고 대답을 해드리죠. 그렇게 개떡같이 물어보시는데, 제가 무슨 수로 찰떡같이 대답을 해드려요.”
“야, 이 팀장. 말이 좀 심하다?”
“뭐가요?”
“방금 내가 개떡같이 물어봤다고 말했어?”
“그냥 그렇다는 표현이죠, 제 말은… 근데 오 팀장님. 오 팀장님은 연애 안 하십니까?”
“…?”
“제가 소개팅시켜 드릴까요? 저 이래 봬도 주위에 괜찮은 친구들 꽤 많아요. 어디 보자… 어떤 스타일이 우리 오 팀장님한테 잘 어울릴까요? 오 팀장님이 선택하세요. 딱 두 명이 떠오르는데, 한 명은 아직 학생. 교수가 되겠다고 아직 저러고 있는데, 솔직히 애는 진짜 괜찮아요. 근데 음… 솔직히 제 친구지만 외모가 조금 아쉬워. 어릴 때 보약을 잘못 먹어서 많이 부었는데, 그 붓기가 아직 빠지질 않아요. 그리고 쌍수를 했는데, 조금… 실패를 한 거 같아요. 근데 애는 진짜 진국이에요. 여자한테 진국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천사도 그런 천사가 따로 없어요. 그리고 한 명 더는 그냥 예뻐. 몸매도 어후… 예술. 완전 모델. 근데 단점이 있어요. 애가 워낙에 예쁘고 외모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 보니까 오히려 남자들이 쉽게 접근을 못 하는 거 같아요? 알고 보면 완전 털털하고 순한데. 아직 연애다운 연애를 못 해봤어요. 딱 그 단점 빼놓고는 다 완벽해. 인터넷으로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데, 자기가 직접 피팅 모델까지 다 해. 월 매출 3천. 근데 또 완전 집순이. 집, 사무실, 집, 사무실… 그거밖에 안 해요. 외동인데, 아버지가 자가 건물도 두 개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더 마음에 드세요?”
“….”
“오 팀장님.”
“어, 어….”
“저랑 비교해서 너무 많은 걸 가진 사람이 절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의심이라는 걸 해야 했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봤는데,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이나 칠 사람은 절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봤어요. 미처 내가 못 본 부분은 없나… 하고. 그랬더니 확실히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이더라고요. 오 팀장님도 못생긴 여자보단 예쁜 여자가 더 좋지 않아요? 저도 똑같아요. 가진 것 없는 남자보단 가진 거 많은 남자한테 한 번 더 눈 돌아가고 신경이 쓰이고… 근데 그게 잘못인가요? 괜찮은 사람이 나 마음에 든다고 하길래, 그래서 저도 그럼 한번 만나면서 서로 알아가 보자… 그러고 있는 중이에요.”
“아니, 이 팀장.”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고 있는 중인 거 맞다고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 사람도 저도 그냥 서로 노력만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끼리니까… 우리끼리니까… 오 팀장님 말씀대로 우리끼리니까… 제발 우리끼리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저 정말 열심히 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할 생각이고.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 팀장님까지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애쓴 제 지난 시간들이 너무 허무해지잖아요.”
“미안해, 이 팀장. 내가 주책이었다. 너무 편해서 선을 못 지켰네.”
그렇게 이지혜는 회사 내에서 돌고 있던 자신과 민규를 둘러싼 이슈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돌파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폴앤크루가 업계의 명품 반열에 확실하게 올라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세간에 돌고 있던 소문들을 한 방에 잠재워 버렸다.
“그게 과연 될까?”
“됩니다, 지금의 폴앤크루라면….”
“이 팀장… 자신 있는 거지?”
“확신입니다.”
당시 영업 기획부 부장이었던 양 이사.
양 이사는 당시 폴앤크루의 국내 단독 매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도중 이지혜가 던진 기획안에 큰 매력을 느끼고 그 건을 통과시켜 준다.
“오케이. 좋아. 그럼 폴앤크루 장 대표님한테는 내가 연락을 넣어 볼게.”
“로즈마리한텐 제가 연락해서 프로젝트 설명을 해 놓겠습니다.”
“크흠….”
“왜요? 로즈마리 말고 사모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