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정해진 방법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김해 공항 국제선 입국 게이트.
아영이가 자기 몸통만 한 슈트 케이스를 끌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똥폼을 잡겠다고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안 어울리는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난 그런 아영이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삼촌이 데리러 왔다는 걸 알려주었지만, 녀석은 삼촌을 발견하지 못한 듯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 나왔다.
“삼촌 여기 있네, 인마.”
“혼자가?”
녀석은 이미 진작에 삼촌의 존재를 발견한 듯, 그럼에도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방 이리 도.”
“혼자 왔냐고.”
“아, 그람 혼자 오지 누구랑 같이 와야 되나?”
“에이… 장난치지 말고. 다들 어디 갔노?”
“뭐라 하노? 삼촌 혼자 왔다니까.”
“재미없다. 엄마는?”
“느그 엄마야 니 온다고 집에서 니 좋아하는 음식 만들고 있지.”
“아, 쫌!”
“쫌이고 나발이고 진짜 삼촌 혼자 왔다니까.”
“진짜가?”
“아, 그람 가짜가? 삼촌이 어데 이 나이 먹고 니가 뭐시라고 조카 서프라이즈 해 준답시고 연기하긋나?”
“우와… 다들 진짜 너무하네.”
“뭐가?”
아영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끌고 나온 슈트 케이스를 내게 건네놓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밖에 비가 와가 오늘 불꽃 축제를 하니, 마니 해샀는데, 선글라스는 무슨…”
“밖에 비 오나?”
“저기 사람들 우산 가지고 들어오는 거 안 보이나?”
“우와, 오늘 무슨 날이가? 진짜 날씨까지 내한테 와 이라노, 오늘… 근데 진짜 삼촌 혼자 왔나?”
“마. 삼촌 군대에 있었을 때도 있다 아이가. 백일 휴가, 일병 휴가까지만 집에서 막 반기 주지 그 뒤로 나오는 휴가는 밥도 잘 안 챙기 준다. 혼자 라면 끓이 먹고 부대 복귀하고 그랬다, 삼촌도. 근데 니는 뭐고? 꼴랑 2년 나가 있으면서 일 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어데 들어와서 삼촌 군대 휴가 나왔을 때처럼 짧게나 있다가 나가나. 한번 들어오면 두 달씩 집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나가는데 뭐 예쁘다고 아직까지 가족들 우르르 공항에 다 나와서 기다리긋노.”
“다들 이래 나온다 이거제? 좋다, 그래. 함 두고 보자.”
“니가 그래 인상 쓰면 우짤 낀데?”
“승후하고 승애라도 좀 데리고 나오지.”
“잔다. 자는 애들을 무슨 수로 깨워서 나오노? 아, 그라고 쫌, 씨… 니가 뭐시라고 니 들어올 때마다 몇 명이 움직이야 되노, 지금. 내, 니 숙모, 승후, 승애… 네 명이 내려온다, 부산에. 네 명이. 상전 났다, 상전 났어. 삼촌이 지금 니 운전기사 노릇 할 짬밥이가. 삼촌 회사에 삼촌 개인 기사가 있다, 이놈아. 그런 삼촌이 니 한국 들어올 때마다 직접 공항 픽업 나간다는 거 회사 사람들이 알면 놀라서 뒤로 뒤집어질 끼다.”
“뭐라 하노. 가자, 얼른. 아, 근데 진짜 비 오네… 오늘 진짜 불꽃 축제 못 하는 거 아이가? 내 일부러 그거 볼 끼라고 비행기 표 빨리 끊었는데….”
“좀 있다가 그친다고 하긴 하던데… 모르지, 뭐. 그치야 그치는 거지….”
아영이는 대학 3학년 때 처음 교환 학생으로 부산대 자기네 과와 연계된 캐나다 무슨 대학으로 학점을 다 인정받으며 유학을 떠났다.
그렇게 유명한 대학이 아니라 정확한 이름도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어쨌거나 아영이가 고민 중이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적극 추천했던 건 바로 나였다.
어차피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학 3학년쯤 되면 취업을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야 했고, 또 당시 아영이가 물망에 올려놓고 염두에 두고 있던 회사들은 하나같이 입사를 하기 위해선 관리된 학점과 관련 학과 자격증 외에도 최소 어학연수 스펙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 서류 면접에라도 통과를 할 수 있었기에 난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껏 보내 놨더니 아영이는 거기서 자신의 진로를 바꿔 버렸다.
물론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과정이라고 보고 있는 현시대에서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긴 했지만, 아영이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회사만 바꾼 게 아니라 아예 전공 자체를 바꿔서 새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런데 난 처음 아영이한테 그 전화를 받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기는 지금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걸 자기 엄마나 아빠한테 말하면 혼이 날 것 같다며, 걱정을 하던 아영이.
삼촌을 자신의 버팀목으로 생각해 주고 있다는 부분에서 난 보람을 느꼈던 거 같다.
-삼촌은 어떻게 생각하노?
“삼촌 생각이 중요하나, 니 인생인데.”
-아, 쫌 그렇게 식상한 대답 말고. 내 지금 진지하다.
“꼭 해 보고 싶나? 사실 니가 해 보고 싶다는 그거는 한국에선 니 대학 들어갈 때 받은 수능 성적은 아까운 전공이다. 알고 있제?”
-안다.
“근데도 해 보고 싶으면 해야지, 우짜겠노? 아예 전공을 바꿔 가지고 공부를 새로 해 보겠다, 뭐 그런 거가?”
-여기 학교 대학원이 호텔 관련 쪽으로 나름 인지도가 있거든.
“그 학교 호텔 관련 대학원을 가 보고 싶다, 뭐 그런 거가?”
-…어.
“그라믄 아영아, 이래 해라.”
-어떻게?
“일단 한국 들어와가 다니던 학교 마무리 짓고 졸업해라. 그라고 남들 취업 준비하는 동안 그 대학원 들어갈 수 있는 영어 성적이나 그 외 필요한 것들 준비 시작해라. 일단 니 인생에 필요가 있든, 없든 그래도 3년을 공부한 전공인데 길바닥에 돈 내다 버릴 일 있는 것도 아니고, 끝까지 다 와서 그만두는 건 삼촌 기준에선 말이 안 되는 거 같다. 학점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졸업하고 그렇게 졸업 준비하면서 대학원 준비도 같이 해라. 괜히 니가 학비 만들겠다 까불면서 되도 안 한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할 생각 하지 말고, 삼촌이 느그 엄마, 아빠랑 이야기해서 같이 학비 대 줄 테니까 니는 일단 졸업만 해라.”
-아이다, 삼촌. 입학비만 있으면 나머지 학비는 방학 때마다 인턴 생활 하면서 충분히 마련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연계를 해 준 단다.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삼촌이 지금 하는 말 아이가. 인턴이 무슨 경력으로나 치 줄 거 같나? 그거 다 호텔이랑 학교가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다. 물론 그 나라 인건비가 한국보다야 많이 쳐 주겠지만, 니 그 아까운 젊음을 뭐 한다고 그리 헐값에 내줄 거고. 인턴 그런 거 안 해도 니만 그쪽으로 확실히 욕심이 있고, 열심히 준비하면 그쪽 관련 일 얼마든지 괜찮은 대우 받으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인턴 경력이 많아야 취업이 잘될 거 같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라. 인턴 경력이 입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 같음 닌 그 학교 대학원 안 나와도 된다. 인턴 경력이 입사에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행사되는 자리는 대학원 졸업자를 애초에 필요로 하지를 않는다고. 삼촌 말 무슨 말인지 알겠나?”
-…어.
“일단 삼촌 알았으니까 니가 잘 한번 알아봐라. 니가 어데 어린애도 아니고 삼촌이 그런 거까지 하나하나 다 따져 가며 알아봐 줄 수는 없는 거 아이가. 니가 잘 한번 알아보고 삼촌한테 말해도. 삼촌이 느그 엄마, 아빠한테는 잘 말해 줄게. 집에 어른이 몇 명인데, 니 하고 싶다는 공부 하나 못 시켜주겠나.”
-삼촌밖에 없다.
“이노무 시키… 이럴 때만 삼촌밖에 없제? 인생 길다, 아영아. 지금 니 나이에 방황하고 두려워하는 거… 그래서 지금 니가 가고 있는 그 길이 맞는 건가 의심하고 계속 새로운 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해도 되나? 하는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런 걱정할 시간에 닌 그냥 준비만 해라. 원래 다들 그렇게 지금 니 시절 보내는 거다.”
정해진 방법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정해진 길 같은 것 역시 그 어디에도 없다.
아영이는 자기 또래 고만고만한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주고받은 정보들이 정답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런 정보들은 어디까지나 기업이, 이 사회가 인재들을 정형화시키기 위해, 혹은 쉽게 다루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일 뿐, 난 아영이가 그런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쳐 놓은 그물 속에서 할딱이는 물고기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학교를 다니며 방학 때마다 인턴을 하고, 그 인턴 생활로 현장 경험을 미리 경험해서 현장에 실제 투입되었을 당시 무리 없이 자기 몫을 해내도록 만들어 준다는 취지?
난 이미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성세대들의 변명과 위선을 정면으로 뚫고 나온 인재들을 여럿 봤다.
타 부서에 입사를 했다가 같은 부서 동료들과 불화가 생겨 영업부로 트랜스퍼가 됐던 장향은.
입사 전 그녀가 홍성에 입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놨던 그녀의 스펙은 언어 관련 쪽을 제외하고는 영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스펙들뿐이었다.
계약직으로 입사를 해서 최단 기간은 아니지만, 나이로만 놓고 보면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최연소 팀장 타이틀을 빼앗아버린 이지혜.
그녀가 가진 스펙만 놓고 보면, 절대 부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스펙이 아니다.
그녀를 부장 자리까지 올려놓은 건 그녀의 스펙이 아니라 그녀의 확실한 목표였다.
중국 센젠 법인의 비리를 고발해서 내부 고발자란 이미지를 달고 있어야 했던 안 이사는 지금은 홍성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반대로 그렇게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모두 다 갖추고도 정작 실제 사회에 투입되었을 때, 기업 문화와 맞지 않거나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라, 힘들게 입사를 해 놓고도 1년도 못 버티고 퇴사를 결심한 아까운 사례를 너무 많이 봐 왔다.
정해진 방법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건 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의심 없이 하다 보면… 가다가, 가다가 보면 저절로 알아서 길이 열리게 되어 있는 거다.
“아빠!”
“딸!”
누나 내외가 운영하고 있는 편의점.
아영이는 집으로 가기 전 그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하더니 곧장 자기 아빠를 보기 위해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 역시 저녁에 마실 술을 몇 병 가지러 함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에 왜 안 나왔노. 알바는 또 어디 가고 아빠가 여깄노.”
“새로 들어온 알바가 어제저녁부터 연락도 안 받고 쨌네.”
“진짜?”
“어. 안 그래도 삼촌하고 같이 니 데리러 갈라고 했는데, 어제부터 아빠 이라고 있다.”
“연락을 아예 안 받나?”
“그만두면 그만둔다 말이라도 해야 며칠이라도 일한 월급을 받아가라고 말을 해줄 낀데, 아예 폰 꺼놓고 잠수네.”
“그라면 우짜노. 저녁 같이 못 먹나?”
“아니, 오전 알바한테 니 온다고 사정 말하고 스케줄 좀 바꿔 놨다. 근데 우리 똥강아지 살이 와 이리 빠짔노?”
도저히 듣고 있기가 힘들어서 내가 한마디 했다.
“저게 빠진 거면 도대체 원래는 어땠단 말이고? 하이고, 내 보기엔 살 올랐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노.”
“빠짔는데…”
“아, 안 빠짔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술 몇 병 가져갑니다. 아까 나올 때 봤는데 집에 소주 한 병도 없더라.”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아영이까지 다 같이 저 멀리 광안대교에서 터지기 시작하는 불꽃을 바라보며, 즐거운 식사를 했다.
승후와 승애는 저 멀리서 터지는 폭죽이 신기한지 거실 유리 벽에 딱 달라붙어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고, 폭죽 덕에 잠잠해진 소악마들 쪽으로 매형이 지갑을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흥!”
“꺄악!”
매형이 승후를 뒤에서 번쩍 들어 안자, 승후와 승애는 까르르거리며 고모부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승후를 들고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던 매형이 아이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고 지갑을 열어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저, 저… 저 돈 쓰기 좋아하는 버릇 저거는 죽을 때까지 못 고친다.”
그런 매형을 보며 어머니가 혀를 차셨지만, 그럼에도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무척이나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