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집안이 시끄러우면 될 일도 안 됩니다
“이쯤 되면 지겨울 만도 한데, 또 제 가르마 이야깁니까?”
안 이사는 약간의 웨이브가 들어간 자신의 5 대 5 가르마를 신경 써 쓸어넘기며 입가에 농담을 장전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 가르마는 그냥 가르마가 아니에요. 제 인생의 방향을 말해 주는 가르마라고요. 처음 부장 달고 2 대 8 가르마를 만들면서부터 속으로 생각했죠. 왼쪽에서 출발한 이 2 대 8 가르마가 오른쪽으로 완전히 다 넘어가 역 2 대 8 가르마를 만드는 순간 난 자유다.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게 은퇴하고 저기 어디 괜찮은 요트나 한 대 사서 남은 인생 그 요트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게 제 인생의 최종 꿈이라고요. 이제 절반 왔어요. 자세히 보면 이게 완벽한 5 대 5 가르마는 아니에요. 잘 보세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죠? 크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이 미세한 변화. 매일 아침 머리하면서 제가 이런 디테일까지 다 신경을 쓴단 말이죠. 이러니 여자들이 뻑이 가지.”
식사가 대충 끝이 나고 있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가볍게 반주를 하라고 권했음에도 술잔은 형식상 몇 번 오가는 게 전부일 뿐, 다들 회장님 장례식 일정 때문에 밀려버린 업무 때문인지 술에 대한 생각은 크게 없어 보였다.
고기가 끝이 나고 냉면이 들어오는 타이밍이었다.
“저는 조금 있다가 먹겠습니다. 잠시 화장실 좀….”
워낙에 자주 오다 보니 이젠 서빙을 해주시는 아주머니들도 어느 자리에 가장 먼저 음식을 전달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가장 첫 냉면 그릇을 내 쪽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아주머니에게 다른 자리로 먼저 전달을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린 뒤, 난 옷걸이에 걸어놓은 재킷을 챙겨 입고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박 이사를 찾았다.
천 발이 내려온 주방.
그 안에서 사모님과 함께 대형 밀폐 용기 속으로 이것저것 분주하게 챙기고 있는 박 이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 잠깐 들어가도 됩니까?”
“냉면 이제 막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요.”
“들어와. 바닥 미끄럽다. 조심하고.”
“뭘 또 이렇게 바리바리 싸십니까?”
“낙현이 놈 또 이번에 중국 들어가면 몇 달이나 있어야 나올 거 아냐. 그냥 밑반찬 몇 개 챙기고 있다. 그리고 이 고춧가루. 우리도 어지간한 건 다 중국산을 쓰지만, 이 고춧가루만큼은 무조건 국산을 써 줘야 하거든. 맛이 달라, 전골 같은 거 해 놓으면. 웬만한 건 거기서도 다 구할 수 있겠지만, 이런 건 못 구할 거 아냐.”
“이야… 이거 또 이런 식으로 차별을 하십니까?”
“내가 차별은 무슨. 낙현이야 혼자 뚝 떨어져서 타지 생활 하니까 내가 안쓰러워서 챙기는 거고, 공 전무 너는 집사람 있겠다, 자빠지면 코 닿을 거리에 처가 있겠다… 내가 따로 챙겨 줄 이유가 어디에 있어?”
“우와, 이렇게 나오시니까 이거 은근 섭섭한데….”
“왜 고춧가루 좀 챙겨줘?”
“아닙니다, 됐습니다.”
“필요하면 말해. 이번에 시골에서 열두 포대 받아다 빻았어.”
박 이사는 내가 달라고 하면 진짜 바로 내어줄 것처럼 또 다른 비닐을 뜯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 박 이사에게 농담이었다며 가슴 앞에서 두 손을 재빠르게 흔들어 보였다.
“요즘 애들 데리고는 뜸하시네요? 혜선 씨 못 본 지도 꽤 되는 거 같은데….”
그 옆에서 마른 고사리 몇 덩어리 역시 안 이사의 몫인지 신문지에 감싸며 박 이사의 사모님이 물으셨다.
“제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집사람도 저 없으면 애들 데리고 외식하는 스타일이 못 되잖아요. 그건 그렇고….”
난 재킷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박 이사가 아닌 사모님이 입고 계신 앞치마 주머니 속으로 슬쩍 찔러 넣었다.
“뭐, 뭐예요?”
“에헤이… 그냥 하시던 거 하세요.”
“이러지 마요.”
“상품권, 상품권. 우리 회사에 남아도는 백화점 상품권. 제가 드리는 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식당 일 하시느라 바쁘신데도 회장님 문상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대신 좀 전달해 달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 대장님 장사하시느라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장례식장 오셔서 이틀 연속 자리 지켜 주셨잖아요. 장례식장에선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챙겨 드리지도 못한 거 같다면서….”
“….”
“아직 출근을 안 하고 계세요. 이것저것 회사 밖으로 신경 쓸 게 많으신 모양이에요. 고문님들 찾아뵙고 인사도 드려야 할 거고….”
“그런데 이런 걸 왜 네 편으로 보내? 언제라도 직접 와서 식사라도 한 끼 하면서 주고 가면 되는 거지.”
“….”
“아직 불편해하시는 거야?”
난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며 묵묵히 안 이사가 가져갈 것들을 챙기고 계시는 사모님의 눈치를 한번 보면서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지 좀 말라고 해라. 괜히 사람 불편하게. 그래서 뭐 영영 나 안 보고 사실 거래?”
“설마요.”
“나는 누가 봐도 할 만큼 하고 나온 사람이야. 그만큼 오래 붙어 있었음 됐지, 거기서 내가 무슨 욕심이 더 있었겠어?”
“….”
“오히려 요즘은 가게 장사 이렇게 되는 거 보고 좀 더 일찍 나와서 가게를 차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까지 하고 있는 중이라고. 어차피 내 총괄 이사 마지막 계약 때 연봉 그만큼 올려주겠다 할 때부터, 임원 생활 퇴직금을 챙겨 주나 보다…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더라?”
“뭘….”
“젊은 사람들만 우리 같은 오비들이랑 함께 일하는 게 불편한 게 아니야. 우리도 쌩쌩하고 젊은 친구들이랑 같이 일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홍성이 어디 짬밥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기성 공장 유통 회사도 아니고, 돋보기 없이는 스마트폰 글자 읽는 것도 힘든 우리 세대가 계속 퇴물 취급이나 받으며 자리 보존할 수는 없는 거 아냐. 은태야.”
“네.”
“우리도 쌩쌩할 때가 있었고, 또 화려했던 전성기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
“폼을 파는 사람들이 자기 폼 빠지는 걸 인정하고 싶겠어? 적절한 시기에 이뤄진 세대교체였고, 난 내가 나감으로써 사장님이 그리고 계신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
CGM의 완전한 몰락 이후 홍성은 당시 상무님과 사장님, 그리고 이문 전무님의 합의하에 본격적으로 홍성의 세대교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회장님의 건강 상태 악화도 그 이유 중 하나였고.
당시 상무님은 아직은 영업 이사였던 날 이사 총괄 포지션도 거치지 않고, 바로 자신의 포지션인 상무 자리로 올려놓고 사장 자리에 오르길 희망했고, 그 부분에 있어 당시 사장님과 이문 전무님은 사외 이사들의 의결권을 모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홍 이사(당시 재무이사)의 반발을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사 총괄을 맡고 있는 홍 이사는 큰 사모님의 막냇동생으로 홍성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 멤버였고, 그랬기에 사외 이사들의 의결권을 모을 만한 유일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이사진이었다.
물론 홍성은 컨트롤 기업의 특성상 현금이 빨리 도는 곳이기 때문에 기관 투자의 비중이 작고 사외 이사들의 파워는 사실상 전시용 정도밖에 안 되는 게 현실이다.
그랬기에 위에서 밀어붙여 버리면 사외 이사들은 그냥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그림이 그려지는 거고.
하지만 명분이라는 게 필요했다.
내가 만약 거기서 다시 한번 초스피드로 이사 총괄 포지션도 거치지 않고 상무로 승진을 해버리면 회사 내 부서 간의 파워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영업부 안에서 새로운 영업 이사를 만들어 올려야 했고, 그러다 보면 다시 한번 영업부 쪽에서만 줄줄이 승진이 이뤄지게 되는 건데, 아무리 영업의 파워가 절대적인 회사라지만 이건 타 부서와의 밸런스 조율에 있어서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업계에서 공은태라는 존재가 너무 크게 부각이 되어 버렸다는 거다.
회사 경영이라는 건 절대 단순한 게 아니었다.
CGM을 잡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나란 존재.
그 존재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홍성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업계에 알릴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소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상무님이 사장으로 올라가고 그 자리에 내가 올라가게 된다면, 내부적으로는 부서 간 파워 밸런스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있겠지만, 최소한 대외적으로는 홍성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다.
“….”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방안을 찾기 위해 당시 상무였던 사장님의 얼굴은 매일같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장님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당시 이사 총괄, 박 이사였다.
“공 이사.”
“네, 이사님.”
“나 좀 잠깐 보지.”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던 박 이사.
박 이사는 전화로 해도 될 것을 굳이 내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날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엔 당시 재무 이사, 홍 이사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상석 소파 자리에 앉은 박 이사.
그는 소파 팔걸이 위로 두 팔을 힘없이 올려놓고, 마치 마진 협상을 하듯 홍 이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요즘 상무님 얼굴이 참 말이 아닙니다.”
연배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회사 입사 짬밥으로 보나 박 이사가 홍 이사보다 훨씬 더 위에 있지만, 실제 임원 기간은 홍 이사가 절대적으로 앞서고 있었던 만큼 박 이사는 줄곧 홍 이사에게 존대를 했다.
그리고 홍 이사 역시 박 이사를 줄곧 존중해 왔고.
“그 이유는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홍 이사님.”
“네.”
“저는 이번 계약 기간까지만 다 채우고, 그만 은퇴를 하려고 합니다.”
“…!”
“다가올 정기 총회 이사회 안건으로 우습지만 제가 제 퇴임안을 올려야 할 거 같습니다.”
“이사님.”
“올려 줍시다.”
박 이사의 짧은 그 한마디에 홍 이사는 이미 자기 역시도 막을 수 없는 사안임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여기 이 공 이사가 억지로 올려 준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사님….”
박 이사는 날 막아 세우기 위해 내 앞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제가 내려놓을 이 자리, 홍 이사님이 앉으시면 그림이 좀 맞아떨어질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현 재무부장… 제가 봐도 너무 오래 부장 자리에만 앉아 있는 거 같긴 합니다. 올려 줘야죠. 다 같이 올려줍시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사장님, 전무님, 상무님 모두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 따라가야죠.”
“기분 좋게 따라 주란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
“포지션만 올라간다고 그게 끝입니까, 어디. 집안이 시끄러우면 될 일도 안 됩니다. 홍 이사님 믿습니다.”
“흐음….”
“공 이사를 밑에 두고 일하면… 오히려 공 이사를 받치며 일하는 거보다 더 힘이 들 수가 있을 겁니다. 지금 제가 그렇거든요.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언제 따라잡힐까 노심초사해야 할 겁니다.”
그때 날 바라보던 홍 이사의 눈빛을 난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다.
인정하듯,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를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조금은 억울한 듯… 너무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이런 친구들은 그냥 먼저 가라고 하는 게 속이 더 편할 겁니다. 제 자리… 홍 이사님한테 양보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이사님. 아직 이사님은….”
“사장님도 그렇고, 전무님까지 은퇴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딱 그 두 분 사이에 끼어 있는 연차인 제가 꾸역꾸역 남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더 누리겠습니까. 후배들 눈치나 받으며 자리 보존하는 거… 그거 제 스타일 아닙니다. 그나마 아직 사장님이나 전무님이 계시니, 그래도 아직은 우리 세대가 발붙일 자리가 남아 있단 생각에 뻔데 짓(빈대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 두 분 모두 은퇴하기 전에 저도 슬슬 준비를 해야죠. 홍 이사님은 그래도 아직 저나 사장님, 전무님에 비해선 젊으시니까… 그리고 또 앞으로 홍성에서 해 주셔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제가 홍 이사님 믿고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