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317화 (317/325)

#317

난 저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리덜이 들어가 있는 포인트 길목마다 홍성 타워가 자리를 잡고 버티기 시작한 지 채 2년이 안 돼서 결국 그리덜 제네바점이 점포를 내놓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난 그 2년도 오래 버텼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상대의 발버둥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걸 보며, 그래도 내가 장 대표만큼 사이코패스는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하게 되는 계기였던 거 같다.

무너진 제네바점.

그 후로는 도미노였다.

언제 무너지느냐가 관건이었지, 무너지느냐 버티느냐가 관건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제네바점이 무너지는 순간 온라인 CGM은 곧바로 직격탄을 맞게 됐다.

자기네가 아무리 분리를 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결국 시장의 인식은 여전히 한 몸.

폴앤크루가 아무리 분리 경영이 된 브랜드라도 지금의 폴앤크루가 있기까지 시장의 인정과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홍성의 자체 브랜드라는 이미지 인식 때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제네바 지점의 철수로 끝까지 미련하게 CGM 쪽으로 의리를 지켜 왔던 브랜드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홍성은 그 브랜드들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물론 그 브랜드들 쪽으로 약간씩의 페널티는 줘야 했는데, 우린 그 페널티로 브랜드들 쪽에 차별 대우를 하는 거라고 보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럼 차라리 저희 홍성이 아닌 다른 기업과 손을 잡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

“만토바도 좋고요. 그 부분에 있어 저희 홍성은 그 어떤 액션도 보이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하지만 만약 홍성의 파트너가 되고 싶으신 거라면 그 정도는 이해를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홍성이 그 어떤 페널티 조건도 내걸지 않고 귀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게 된다면 아마 폭스타운과 함께 CGM의 손을 먼저 놓았던 다른 브랜드들이 오히려 차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

“저희를 믿고, 저희 쪽에 의리를 보여주신 파트너들을 상대로 역차별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홍성의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홍성은 선택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결정은 귀사의 몫입니다.”

그리덜 오프라인 사업의 부도로 CGM 온라인 쪽은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몇몇 대형 브랜드들까지 동시에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었다, 온라인 마켓 사업은.

홍성은 CGM 온라인 쪽에 남아 있는 브랜드 위주로 온라인 쇼핑몰을 개설, 국내외 유명 유통 판들 쪽으로 해당 브랜드들을 대량으로 풀기 시작했다.

몰락해 버린 CGM이 유통시킬 수 있는 브랜드라는 말은 어지간한 중간 사이즈 개인업자도 손쉽게 따낼 수 있는 보급형 브랜드란 뜻이었기에 시장 가격 파괴와 같은 내용과는 거리가 먼 작전이었다.

유명한 유통 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프로모션에 해당 브랜드들을 포함시키고, 제로 마진에 가깝게 물건을 풀어 CGM의 숨통을 확 틀어막아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1년 후.

결국 처음엔 그런대로 체면 유지 정도는 해 오던 CGM의 온라인 마켓 판에 실질적 구매 건수가 브랜드 컬렉션별로 10건 이하까지 내려가더니, 끝에 가선 아예 구매 건수란이 사이트 관리자로 인해 가려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난 영업 이사를 달고 거진 3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오로지 CGM이라는 업계 벌레 박멸에 초점을 두고 달렸고, CGM이 업계의 거대 공룡이었을 시절 본사가 있었던 독일에서 공식 부도 처리가 되는 순간… 업계의 전설이 되었다.

* * *

강 팀장의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던 다음 날.

오전 10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하 실장으로부터 한 통의 내선 전화가 걸려 왔다.

-안 이사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셔 주세요. 아 참 그리고 영업 이사님한테도 호출 한 통 넣어 주시고요.”

-같이 오셨습니다.

“아… 일단 알겠습니다. 안으로 모시세요.”

양 이사와 안 이사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뭘 그렇게 빨리 가? 온 김에 한 며칠 창고도 둘러보고 하면서 쉬다가 들어가지. 거기에 무슨 꿀 발라 놨어?”

“아, 그걸 왜 나한테 그래? 비행기 표를 어디 우리가 끊었나?”

“바꾸라고 하면 되잖아.”

“아, 왜 이렇게 징징대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서까지 티격태격하는 양 이사와 안 이사였다.

함께 부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이사가 안 이사한테 입사 기수 따윈 따지지 말자며 먼저 말을 놓고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제안에 안 이사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단 한 번을 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럼 그럴까?’라는 말로 양 이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일정 하루만 딜레이하고 오늘 저녁에 같이 한잔하자.”

“회장님 장례식 이틀 연짝으로 같이 마셔 줬잖아.”

두 사람 눈에 나란 사람은 안 보이는 거 같았다.

이럴 거면 그냥 밖에서 합의를 다 보고 조금 늦게 들어오지 왜 내 사무실에서 저러나 싶었다.

“자, 자… 일단 앉으세요.”

자리를 권한 내 손이 민망할 정도로 안 이사는 소파 자리를 빙 둘러서 진열대 옆으로 세워놓은 골프 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양 이사는 소파에 앉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우리 전무님 요즘은 어떻게, 골프 실력 좀 느셨어요?”

“그냥 뭐 친구가 골프용품 대리점을 하니까 싼 맛에 하나 사 놓기만 했지, 난 영 재미가 없어서 취미를 붙이기가 힘들더라고요.”

“아직 머리 못 올리셨죠?”

“그럴 시간이나 있습니까?”

“그럼 그러지 말고 올겨울에 휴가 써서 가족들 다 데리고 중국으로 한번 넘어오세요. 저도 전무님 일정에 맞출 테니까. 같이 싼야에 가서 골프 휴가나 보냅시다.”

그 말에 양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럴 시간 있음 오늘 나랑 같이 한잔이나 더 해.”

“아, 왜 이렇게 내 콘셉트를 계속 뺏어 가려고 하지? 술 마시자고 조르는 건 내 콘셉트야. 따라 할 걸 따라 해. 그게 뭐 좋은 거라고 그런 걸 따라 해? 그거 잘못하면 진상 짓이다?”

“아,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 오늘.”

“아, 왜 그렇게 술술 거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어.”

“….”

너무나 곧바로 튀어나온 양 이사의 대답이었다.

안 이사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골프채를 든 채 자세를 잡다 말고 양 이사를 쳐다봤다.

“왜?”

“집에 가면….”

“…?”

“집사람이 있어.”

“….”

“….”

순간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애도 있어. 나만 보면 안아 달래.”

“….”

“아빠도 같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 짓는 게… 일하는 거보다 백 배는 더 힘들어. 그렇다고 아직 말도 못 하는 애한테 아빠의 진심을 들킬 순 없는 거 아냐.”

안 이사는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난 저 인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아, 좋으면 좋다, 행복하면 행복해 죽겠다… 그냥 말을 해. 좋아 죽겠으면서 꼭 그렇게 힘들어 죽겠다는 척 오버 연기 하지 말고. 어디 싱글은 서러워서 살겠냐? 그리고 나 한국 들어올 때마다 나 챙겨 주겠다고 일부러 나 잡아 주는 마음은 진짜 고마운데,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그분께선 날 진짜 천하의 때려죽일 놈으로 생각한다고.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나 한국 들어올 때마다 계속 그러면 내가 너 잡고 술 마시자고 하는 거라고 오해하실 거 아냐.”

“뭔 소리야? 안그래, 우리 집사람.”

“재수 없어.”

“….”

“마음만 받을게요, 우리 양 이사님. 그러니까 괜히 나 부담스럽게 마음에도 없는 술 약속 계속 던지지 마세요, 엉?”

“…쩝.”

“그나저나 전무님.”

“네.”

“오늘 점심은….”

“양서 식당으로 잡아 놨습니다.”

“하아… 씨, 그럴 줄 알았다. 다른 곳을 기대한 내가 미친놈이지. 오늘도 고기 냄새 그대로 밴 옷 입고 비행기 타게 생겼네.”

“뭘 또 그렇게 툴툴댑니까? 거기 말고는 그 인원 다 들어가서 식사할 마땅한 장소도 없잖아요.”

“장소가 왜 없습니까? 널리고 널린 게 단체석 갖춘 식당들인데. 아니 어떻게 매번 핑계가 똑같아요? 이건 뭐 핑계에 성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어.”

“어차피 회삿돈으로 하는 회식인데 아는 집 찾아가서 팔아 주고 하면 좋잖아요.”

“차라리 그 이유가 그나마 인간적이다.”

그렇게 우린 1시간 정도 내 사무실에서 의미 없는 잡담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2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 내선 전화로 하 실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나갈 겁니다. 하 실장도 슬슬 준비해요.”

-네, 그럼 지금 바로 호출 넣겠습니다.

나와 양 이사, 안 이사, 그리고 하 실장이 탄 엘리베이터가 임원 층에서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 안으로 상무보 민규와 김 이사, 재무 이사, 이사 총괄 홍 이사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타세요.”

우린 그들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조금씩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늘도 양서 식당입니까?”

내 뒤로 자리를 잡고 선 이사 총괄 홍 이사가 확인을 받듯 물었다.

“역시나 그렇다고 하시네요.”

안 이사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홍 이사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한국 들어올 땐 안 이사가 미리 식당을 섭외해 버려. 전무님이 또 양서 식당으로 미리 예약을 해놓으시기 전에.”

“해 놓으면 뭐 합니까, 분명 바꾸라고 하실 건데.”

“하긴….”

로비 1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문 앞 양옆으로 각부서 부서장들이 먼저 내려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대기 중이던 부서장들.

그들은 우리 일행이 앞으로 나아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가 김 이사와 안 이사 뒤에 붙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걸음을 옮겼다.

본사 로비.

전무 군단의 행렬에도 예전과는 달리 각자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모습에 난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부장이 안 보이네요?”

“저기 오네요.”

저 멀리서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하지만 늦지 않게 대열에 들어오기 위해 속도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늦기는요. 가는 길인데.”

늦다니… 늦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늦지 않았다.

그냥 가는 길일 뿐이다.

* * *

양서 식당.

2년 전 막내딸까지 결혼을 시켜 놓고 공식 은퇴를 한 박 이사가 홍성을 나와 차린 고깃집이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손맛이 좋은 사모님과 함께 고깃집을 차리신 박 이사.

역시 홍성맨답게 다 이겨 놓고 새로운 싸움을 시작한 박 이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이사가 차린 고깃집인데 어떻게 홍성맨들이 모른 척을 할 수 있겠나.

거기다 아예 우리 홍성맨들에게 무언의 압박이라도 주듯, 본사 근처에 오픈을 해버렸다.

그 덕에 우린 가급적 단체 회식을 할 때엔 어김없이 양서 식당을 찾게 됐고, 홍성맨들이라는 확실한 단골을 미리 확보해 놓고 오픈한 양서 식당은 가게 오픈 시작부터 장사가 흥할 수밖에 없었다.

주력 메뉴는 삼겹살인데, 소고기도 함께 판매를 하는 집이다.

처음엔 어떻게 한 불판에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같이 올릴 수 있겠냐는 나의 편견 때문에 과연 맛은 괜찮을까 하는 걱정을 했지만, 괜찮다.

아는 사람이 하는 집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맛이면 내 돈 주고 먹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괜찮게 장사를 하는 집이다.

한 번씩 내가 이곳을 찾게 될 때엔 미리 박 이사에게 연락을 넣어 준다.

그러면 박 이사는 한몫 톡톡히 챙길 생각에 미리 좋은 고기를 잡아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어서들 와, 어서들… 장 대표는?”

“폴앤크루 워크샵 일정 걸려 있었잖아요.”

“아 참 그렇다고 했지.”

“회장님 장례 일정 때문에 연기됐다가 어제 바로 워크샵 일정 참관한다고 제주도로 갔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회사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일단 다들 들어와서 앉아. 방으로 잡아 놨다, 안 이사 온다고 해서.”

“왜요?”

“틀림없이 시끄럽게 떠들 거 아냐. 다른 장사도 해야지, 나도.”

“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