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차장님, 미치셨어요?
“아니, 나는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하던 대로. 평소처럼… 괜히 뭐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딱 매장 실장들 접대할 때 하는 것처럼. 접대할 때 보면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날아다니는 양반이 어떻게 로즈마리 여사 앞에서는 입도 못 열어요?”
안 차장이 답답해서 숨이 다 막힌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때리며 말했다.
그런 안 차장의 모습에 양 차장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안 차장한테까지 이런 소릴 듣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제가 왜요?”
“아니, 그렇잖아. 연애고자. 인정. 나도 인정해.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 차장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차장님이 뭔가 지금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는 못 하는 게 아니에요. 안 하는 거지. 질렸어, 이젠. 막 귀찮아. 누구처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뭐가 마음대로 잘 안 되는 사람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니까? 제가 딱 연애하겠다는 마음먹고 여자 꼬실 각 잡잖아요? 그럼 난리 나요.”
“왜?”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 안낙현입니다, 안낙현….”
“미친…”
“어? 못 믿네? 진짜라니까? 제가 일부러 안 하는 거지, 마음먹으면 전 날아다닙니다.”
“알았어, 알았다. 믿어 줄게.”
“아니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진짜 차장님은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이쯤 되면?”
“아, 그만해.”
“그래서 뭐 진짜 여기서 끝낼 거예요?”
“끝내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애초에 시작이란 걸 하지를 못했는데….”
탕비실 옆 휴게실이었다.
김 차장까지 부를 만큼 영업부 전체적인 사안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자리에서 양 차장, 안 차장을 불러 가볍게 나눌 만한 대화 주제도 아니어서 탕비실 옆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씩을 내려 아이작 유통과 홍성 타워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신 사장과 최 실장은 스위스로 돌아갔고, 상무님은 건물 매입 건으로 알렌 강과 함께 일본 출장길에 오른 상태였다.
굵직한 프레젠테이션과 중요한 의전이 모두 끝이 난 후 홍성 영업부엔 잠시지만 숨을 돌릴 만큼의 여유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여유 속에서도 우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FW 시즌에 완전히 돌입해 있는 상황이었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하반기 인사 승진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양 차장과 안 차장을 불러서 아이작 국내 론칭에 관한 아이디어와 홍성 타워에 넣을 브랜드 선정, 그리고 이토 측과의 접촉 시기 등을 물었다.
안 차장은 이미 홍성 타워에 들어갈 브랜드군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고, 이토 측과도 미팅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양 차장은 아이작의 국내 론칭 준비는 이지혜가 직접 스위스로 넘어가서 아이작 컬렉션들을 살펴본 뒤, 한국에서 먹힐 만한 컬렉션들을 초이스해서 돌아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 보겠다고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런 양 차장에게 안 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즈마리가 있는데 무슨 준비를 하느냐며, 아이작처럼 인지도가 전혀 없는 브랜드는 아무리 공격적인 마케팅을 때려도 답이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안 차장의 생각에 백 퍼센트 동의를 했다.
전국에 깔려 있는 SS 편집샵이 도대체 몇 개란 말인가.
고작 아이작의 홍보를 위해 SS 편집샵이 들어가 있는 전국의 유통 판들과 일일이 접촉을 하고 이벤트 배너 시기를 조율하거나 포인트 적립과 같은 특별전을 펼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다.
물론 비용은 조금 들겠지만, 로즈마리와 같은 영향력 있는 패션 관련 유튜버에게 아이작을 한번 입힌 다음 브랜드 노출을 시켜 놓고 매장에선 아이작에 한해 인센티브를 쏟아부어 매장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만들어 주는 게 지금의 상황에선 가장 간단하고 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걸 모를 양 차장이 아닐 텐데, 가장 효과적인 로즈마리를 놔두고 이상하게 어렵게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 양 차장에게 눈치 빠른 안 차장이 요즘 로즈마리와 잘 안 되고 있느냐고 물었고, 그런 안 차장의 물음에 양 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잘되고 자시고 할 거나 있느냐며 되물었다.
“재미가 없대, 나랑 같이 있으면.”
“….”
양 차장의 말에 안 차장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재미가 있었대요?”
“뭐… 그랬으니 계속 협찬을 핑계로 회사에 찾아오고 했던 거 아니겠어?”
“그럼 딱 답 나왔네.”
안 차장이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며 말했다.
“우리 로즈마리 여사는 그때부터 느꼈던 건데 살짝 여전사 삘이 나요.”
“여전사 삘?”
“누가 막 자기를 챙겨주고 배려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 잘 생각해 봐요? 처음 로즈마리 여사가 협찬 건으로 이 대리랑 짜고 회사에 차장님 보러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때, 차장님은 로즈마리 여사를 어떻게 대했어요?”
“….”
“무관심. 말 그대로 무관심이었잖아. 왔냐? 또 왔냐? 이번엔 또 뭐 협찬받으러 왔냐? 인간적으로 그렇게 계속 우리 물건 협찬받아서 영상 찍어 올려서 수익 창출해 내는데, 인간적으로 우리한테 뭐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식이었지, 오… 로즈마리…. 이런 식은 절대 아니었잖아요.”
“그랬나?”
“그랬지. 그랬으니 부장님이 로즈마리 여사가 우리 회사 입장에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히든카드 역할을 해줄 수 있으니 잘 좀 대해 주란 말까지 몇 차례나 하셨던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도 도왔다.
“그건 안 차장님 말이 맞아요. 처음에 양 차장님이 너무 틱틱거렸어. 옆에서 보는 제가 다 민망할 정도로.”
“자, 그럼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내가 동의를 하자 안 차장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로즈마리 여사는 누가 자신을 챙겨주는 것보다 자기가 누군가를 챙겨주는 게 더 편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누군가를 챙겨주고 또 보살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의외로 그런 여자들 많아요. 그리고 지구력이 상당히 강한 사람일 거예요. 예전에 자기 채널에서 자기 과거에 관해 해명하는 영상 올렸던 적 있잖아요. 그 영상만 봐도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로즈마리 여사는 상당히 솔직하고 또 그 솔직함을 무기로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거란 말이지. 그런데 반면에 로즈마리 여사가 차장님한테 마음이 있다는 소릴 듣고 차장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했잖아요.”
“근데 왜 계속 로즈마리 뒤에 여사를 붙여? 나이 들어 보이게…. 우리보다 훨씬 어려.”
“그럼 우리 동갑이니까 앞으로 나 양 차장님한테 반말해도 됨?”
“….”
“이상하게 난 그게 편하네. 그냥 로즈마리라고 하는 것 보다. 아무튼 잘 봐요. 내가 로즈마리 여사라도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안 뒤부터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어 버리면, 좀 불편하겠어? 내가 좀 끌려다니는 맛이 있어야 정복하는 쾌감이라는 게 있는데, 어느 날 내가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서부터 너무 쉽게 정복당해 버리잖아. 그럼 무슨 재미?”
“연애를 뭐… 재미로 하냐?”
“그럼 뭘로 하는데요?”
“….”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요? 있으면 뭐 말 좀 해봐요.”
“암만 그래도 우리 나이가 있지, 어떻게 연애를 재미로만 하냐?”
“너랑 결혼까지 생각했어, 예! 뭐 휘성이에요? 그러니 여자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차장님 말씀대로 로즈마리 여사는 우리보다 한참 어려요. 거기다 로즈마리 여사 채널 물고 빠는 구독자들 평균 연령대를 좀 봐요. 20대,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야. 그만큼 젊게 산다는 뜻 아니겠어요? 자기가 좋아해서 하는 일 확실하게 있고, 또 그 일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사람인데, 그럼 차장님은 로즈마리 여사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라도 연애를 연애로만 봐줘야지 그걸 못 하고 혼자서만 너무 진지하게 앞뒤 맥락 다 생략하고 곧바로 결혼까지 생각해 버리면 상대는 질릴 수밖에. 그런데 차장님은 그런 거 생각 전혀 못 하고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만 계속 앞서는 거고. 그런데 그걸 알아야 돼요.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배려는 더 이상 배려가 아닌 거죠.”
“흐음….”
“로즈마리 여사한테 마음이 있긴 하죠?”
“뭐 로즈마리 정도면….”
“푸하하하….”
안 차장은 탕비실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로즈마리 정도래, 로즈마리 정도… 푸하하하 차장님, 미치셨어요? 지금은 상황이 역전된 거 같긴 하지만, 아무튼 로즈마리 여사가 차장님을 먼저 마음에 들어 했잖아요? 이걸 어떻게 비교를 해야 돼? 음… 이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는데, 그 날벼락이 딱 차장님 머리 위로 떨어질 확률보다 딱 100배 더 어려운, 말 그대로 불가능한 확률이에요. 어디 감히 차장님 따위가 150만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로즈마리 여사를 정도라고 표현합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너 지금 말 다 했냐? 뭐? 나 따위?”
“제가 로즈마리 여사 마음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면 저한테 뭐 해주실 겁니까?”
안 차장이 꽤 진지하게 양 차장에게 물었다.
“까고 있네.”
“어어? 지금 저 무시하시는 겁니까?”
“자, 자… 로즈마리 이야기는 이제 그쯤 하고 우리 이제 일 이야기를 좀….”
“부장님은 좀 가만히 있어 보세요. 뭐시 중헌디. 지금 사람이 말라 가고 있잖아요. 이러다 양 차장님 죽습니다. 자, 제가 책임지고 한 달 안에 차장님이 로즈마리 여사 마음을 다시 사로잡게 해드릴게요. 차장님 입장에선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이래도 깨지고, 저래도 깨질 판인데. 안 그래요?”
순간 안 차장의 제안에 양 차장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게 내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아, 그래서 제가 도와주면 저한테 뭐 해주실 겁니까?”
“소고기 한번 살게.”
“에이… 어디 소고기 못 먹어서 죽은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 번.”
“일단 아이작 영상을 한번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보세요.”
“장난하냐, 지금?”
“공짜로.”
“…!”
“로즈마리 여사에 대한 차장님의 마음, 긴장, 두려움 이런 거 다 배제하고 딱 일을 일로만 보고 공짜로 아이작 영상 하나 찍어 달라고 요청해 보세요. 지금부턴 영업입니다. 사실 차장님 말씀대로 그동안 로즈마리 여사도 양심이 없긴 했어. 따지고 보면 협찬보다는 차장님 얼굴 보는 게 목적이었겠지만. 아무튼 우리 홍성에서 공짜로 가져다가 찍은 영상이 어디 한두 갭니까? 그 브랜드들이 어디 우리 홍성 자체 브랜드들이냐고요. 아니잖아요. 브랜드들 측에서 요청을 한 것도 아니고, 다 하나같이 로즈마리 여사가 자기 채널 펌프질하는 데 사용한 건데, 그걸 우린 다 공짜로 제공해 오고 있었던 거잖아요. 이건 사업적으로만 놓고 봐도 기브 앤 테이크가 이뤄져야 하는 부분 아닙니까?”
순간 난 안 차장의 말에 설득을 당하고 있었다.
“차장님이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얼굴에 웃음기 싹 빼고, 조금 냉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선을 긋고 일적으로만 상대를 해 보시라고요. 내가 인정하긴 싫은데… 솔직히 차장님 일할 때 정색하면 조금 멋있긴 해. 제가 봤을 때 로즈마리 여사 입장에선 그동안 우리 홍성이 컨트롤하는 브랜드들 공짜로 가져가서 영상 찍은 것처럼 아이작 역시 그중 한 브랜드라고 생각하고 그냥 찍어 주겠다고 할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정도는 튕기겠죠. 왜? 갑작스런 차장님의 태세 변환에 당황을 할 거니까.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이게 뭔가 싶을 거예요. 그동안 차장님이 로즈마리 여사 마음을 알고 난 뒤부터 계속 끌려만 다녔는데, 갑자기 다시 예전처럼 돌변하면 이 인간도 마음이 식었나? 이런 착각이 들 거예요. 그럼 그때 차장님은 매장 실장들 상대로 접대 영업하듯, 정말 아무 감정 싣지 말고 딱 그 건을 달성한다는 마음으로 비즈니스적으로다가 로즈마리 여사를 상대하는 거죠.”
“….”
“먹힙니다. 제가 봤을 때 로즈마리 여사… 그렇게 복잡한 사람 아니에요. 아주 심플해요. 그래서 매력적인 거고. 심플한 사람 상대로 너무 복잡한 생각 가지고 접근하지 마세요. 그럼… 될 일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