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유행은 저희 홍성이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렇게 며칠간 이어지는 의전을 한번 하고 나면 거래처와는 사업적인 부분을 떠나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술기운에 서로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들키게 되고, 또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서로 안심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니까.
다음 날 아침.
결국 난 강혜선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회사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다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회사 앞 편의점으로 차를 세운 강혜선이 날 흔들어 깨웠다.
“다 왔어, 내려.”
“아… 죽겠네.”
“아, 그러게 뭔 술을 그렇게 죽자고 마셔? 20대니? 30대도 그냥 30대야? 몇 년 뒤면 당신도 마흔이야. 그러다 진짜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뭔 술을 그렇게 죽자고 마는 건지…. 소맥 말기 전까지는 분명 멀쩡했거든. 근데 거기서 안 차장 이 인간이 갑자기 소맥을 말잖아.”
“뭐래? 분명 자기도 좋아서 마셨을 거면서 꼭 나중에 가서 남 핑계 대지?”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당신을 몰라?”
“아, 몰라. 나 간다.”
“지갑.”
난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으며 지갑을 확인했다.
“폰은?”
다시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강혜선에게 보여줬다.
“사원 카드.”
그 역시 반대쪽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목에 걸며 모든 게 다 제자리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편의점을 들러 숙취 해소제 하나를 사서 마신 뒤 출근을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벌써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기 시작하는 안 차장을 발견하고는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인간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절대 저럴 수가 없다.
전날 기분 좋게 이어지던 술자리를 한순간 광란의 파티장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
지구 반대편에서 먼 길 온 손님들을 이렇게 시시하게 접대할 수 있느냐며 갑자기 소맥을 말기 시작하더니, 그걸 또 천천히 분위기를 음미하며 기분 좋게 마시면 좋으련만 꼭 대학생들 오리엔테이션 때나 강요할 물레방아를 타자고 해서 결국 신 사장과 최 실장을 꽐라로 만들어 버리더니, 급기야 알렌 강까지 기어서 집으로 가게 만들어 버렸다.
어느 정도 술에 면역력이 있는 나와 손 부장 역시도 끝내 백기를 들 정도로 강력한 술판이었다.
전날 식사 자리 계산은 폴앤크루 측에서 했는데, 식사비 제외하고 술값으로만 얼마나 나왔는지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장 대표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모르긴 몰라도 고깃값보다는 더 많이 나왔을 거다.
정말 신기한 건 술을 저렇게 마시는데도 회사로 날아오는 종합 검진 결과만 보면 안 차장의 간은 아기 간이다.
거기다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인간이 전날 그 무서운 회식을 주도해 놓고 혼자 저렇게 쌩쌩한 모습으로 출근을 한다는 게 정상이냐는 거지, 내 말은….
박기태 역시 반송장이었다.
거의 뭐 좀비처럼 정신력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거지, 머리 꼴을 보니 아침에 늦잠을 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골인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와 반대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쌩쌩한 모습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안 차장의 모습에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자리로 갔다.
컴퓨터 모니터를 켜놓고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플라스틱 파일 하나를 손에 들고 함께 내 자리로 오는 안 차장의 모습이 보였다.
“뭡니까?”
난 안 차장이 들고 있는 파일을 눈짓하며 물었다.
하지만 안 차장은 내 몰골이 보기가 우스웠던지 밉상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괜찮냐고 되물었다.
“괜찮아 보입니까?”
“부장님은 어제 뭐 얼마 마시지도 않으셨잖아요.”
“뭐랍니까? 저 어제 한 번도 안 빼고 다 달렸어요.”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같은데….”
“우와… 진짜 내가 앞으로 안 차장님이랑 같이 소맥을 말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냐…. 저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기억 안 나세요?”
“아니, 기태 씨랑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이 택시에 탄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필름이 뚝 하고 끊겨버렸네. 택시비를 내가 기태 씨한테 챙겨줬는지, 아님 그냥 내렸는지 기억이 안 나요.”
“기억이 안 나면 안 주신 거죠. 할 수 없네. 며칠 뒤에 박 대리, 아니… 박 팀장 따로 불러서 한잔 사 주셔야겠네. 그때 저도 꼭 불러주세요.”
“대단하다, 대단해… 그나저나 그건 뭡니까?”
그제야 안 차장은 자신이 준비한 파일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난 그 파일을 일단 책상 위로 올려놓고 스페어 의자를 준비해 안 차장에게 권한 다음 컴퓨터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안 차장과 함께 마주 보고 앉았다.
“어제 손 부장이 이토 관련 이야기 하면서 만토바 물건을 센젠 법인이 아니라 우리 인천 창고에서 바로 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잖아요. 마진도 우리가 센젠 법인으로 넘겨주는 마진으로.”
“직접 오케이 하셨잖아요.”
“근데 이게 마이너스 폭이 제가 어림짐작으로 계산을 때려봤을 때보다 더 크게 납니다.”
“마이너스요?”
“이토가 센젠 법인에서 받아가는 물량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네요.”
난 파일을 열어 작년 한 해 이토 측에서 센젠 법인을 통해 만토바 물건을 받아간 총액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 차장이 그 금액을 다시 센젠 법인이 우리 인천 창고를 통해 받아가는 마진으로 계산을 한 뒤, 작년 한 해 센젠 법인에서 올린 이토 측 매출에서 마이너스를 시킨 금액을 확인했다.
“작년 한 해 오더 물량이 제법 많았네요.”
“그렇네요.”
“올해 2/4 분기까지 가져간 물량을 보면 작년보다 총 오더 물량은 더 많겠어요. 이렇게 되면 부분적으로는 표가 안 나더라도, 회사 전체적으로 모아놓고 보면 마이너스 티가 확 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이네요. 이토 측에서 폴앤크루 단독 매장 자리 확보를 약속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에 대형 쇼핑몰이 이토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다른 옵션을 전혀 안 붙이고 센젠 법인에 넘겨주는 마진으로 이토 측에 물건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이건 호구 짓 하는 거예요.”
“그러게 왜 따져보지도 않고 오케이 사인을 하셨습니까? 전 모릅니다. 알아서 커버 치세요.”
“흐흐흐… 신 사장님… 사람이 참 괜찮지 않습니까?”
“…?”
“어제 하루 종일 인천 창고 같이 둘러보면서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 또 신 사장님이 지금까지 살아 온 이야기들을 좀 들어 봤는데… 응원해 드리고 싶더라고요. 부장님도 신 사장님 직접 만나고 나서 그런 부분에 마음이 많이 동하셨던 거 아닙니까? 이왕 밀어주기로 한 거 제대로 한번 밀어주죠.”
“쉽게 이야기하세요. 저 지금 아직 술 덜 깼습니다.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저는 어제 그 이야기 손 부장한테 딱 듣는 순간 바로 신 사장님네 브랜드 아이작이 떠오르더라고요.”
“…?”
“어차피 그렇게 물건을 이토 측으로 바로 쏴 주면 최대 이익은 이토 측이 다 가져가는 거고, 거기에 폴앤크루는 매장 확보라는 약간의 콩고물만 주워 먹는 거 아닙니까. 어디 장 대표님이 보통 분이세요? 그렇다고 부장님이 그 정도 계산도 없이 단칼에 거절을 하지 않고 저한테 결정하라고 하셨을 리도 없고…”
“그래서요?”
“인천 창고에서 물건 다이렉트로 쏴주는 조건으로 이토 측에게 신 사장님네 브랜드 아이작을 번들(끼워팔기)로 넘기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든지.”
난 그저 피식하고 웃으며 안 차장이 가져온 서류에 사인을 넣어주었다.
“신 사장님 오늘 아이작 국내 론칭 관련 마진 협상하러 오후에 오신다고 했죠?”
“네, 디테일한 일정은 양 차장님한테 물어보세요.”
“마진 75퍼센트로 잡아 보라고 전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신 사장님은 아이작 관련 국내 시장 론칭이 목적이지, 중국, 일본 시장은 전혀 큰 기대를 안 하고 계시는 분 아닙니까.”
“양 차장님이랑 이야기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양 차장님 역시 70퍼센트 수준으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 같더라고요. 75퍼센트면… 조금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해도, 신 사장님 입장에서도 중국, 일본 시장에까지 아이작을 넣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동의를 해줄 거 같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제가 양 차장님이랑 입 맞춰 놓겠습니다.”
오후 3시였다.
신 사장과 최 실장이 홍성 본사를 찾아왔다.
그들의 호텔 픽업을 직접 한 차 팀장이 그들을 데리고 회의실로 올라왔고, 이지혜는 양 차장의 지시로 묵직한 회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회의실 세팅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양 차장은 아이작 국내 론칭 건을 신 사장네 건물에 들어가는 홍성 타워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놓고 준비 중이었다.
프로젝트가 섞여서 뒤엉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한 쪽이 양보라는 걸 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만 하는 쪽에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고, 양 차장은 그걸 사전에 방지하고 싶다고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혔었다.
폴앤크루는 폴앤크루고, 홍성 타워 프로젝트는 홍성 타워 프로젝트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세일즈 포인트가 없는 아이작을 국내에 론칭시켜야 하는 양 차장의 입장에선 정확하게 영업 기획부의 가이드라인을 세워 놓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저희는 75퍼센트 마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모든 사업이 수월하게 풀려서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신 사장과 최 실장.
하지만 양 차장이 던진 75퍼센트의 이윤율 앞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작 단가가… 아시다시피 저희가 대량으로 생산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작 단가만 해도 리테일 가격의 15퍼센트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거기다 물류비까지 측정을 한다면 아무래도 75퍼센트는 조금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출품에 한해서 세금 감면받으시잖아요.”
“그 부분 역시….”
안 차장과는 사뭇 다른 날카로운 양 차장의 입장에 신 사장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과연 사장님께서는 아이작으로 어느 정도 수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겁니까?”
“….”
자, 사장님.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현재 아이작이 가지고 있는 컬렉션으로는 절대 단독 매장 론칭이 불가능합니다.”
“…네.”
“컬렉션 가짓수는 많지만, 실질적으로 한국 트렌드에 맞춰서 매장을 꾸미기엔 쓸만한 컬렉션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직설적이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어제 하루 인천 창고를 둘러보면서 타 브랜드들이 구성하고 있는 컬렉션들과 자연스럽게 아이작이 비교가 되더라고요.”
“그럼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봤을 때 아이작은 앞으로 2년은 더 걸릴 브랜드입니다. 단독 매장을 차고 나가기까지 말이죠.”
“흐음….”
“하지만 반대로 편집샵에 넣기에는 아주 괜찮은 브랜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디자인이야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니까 뭐가 정답이다… 라고 말하기가 참 애매하지만 제품력은 정확한 거죠. 아이작이 가진 제품력은 사실상 현재 저희 홍성이 직영 운영 중인 SS 편집샵에 디피시켜 놓은 타 브랜드와 비교해 전혀 뒤지지가 않습니다.”
그제야 신 사장의 얼굴에 안심이라는 표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희는 아이작에 한해 사장님께서 부지런히 컬렉션을 뽑아 주실 때까지 현재 가지고 있는 재고들, 이월 제품들로 편집샵에만 집중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월 제품들로요?”
“전 제품은 아니고, 우선 저희 쪽에서 인터라켄을 한번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현재 사장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월 재고들을 다 살펴보고 초이스를 해보겠습니다. 저희 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디자인이 워낙 무난해서 이월 재고와 신상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아직 크게 알려진 웰노운 브랜드도 아닌데, 굳이 이월 재고와 신상에 차이를 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SS 편집샵…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중국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마진 75퍼센트에 동의를 해주신다면 저희는 그 마진으로 일본 시장도 함께 두드려 보겠습니다.”
“…!”
“이토라고 일본에서는 그래도 1번, 2번을 다투는 대형 쇼핑몰 브랜드가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잠시 나왔던 거로 기억합니다.”
“네, 그곳에서 현재 저희 홍성이 취급하고 있는 만토바 물건을 중국 법인을 통하지 않고, 저희 인천 창고에서 다이렉트로 받기를 희망한다고 하더군요.”
“…네.”
“그래서 저희는 이토 측에게 사장님의 아이작을 번들 형식으로 함께 밀어 넣기를 해볼까 합니다. 물론 조건은 이토 측이 직영 운영 중인 편집샵에 아이작을 함께 구성해 준다는 조건으로요.”
“…!”
“어떻습니까? 생각이 있으십니까? 사장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저희가 한번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쯤 되면 뭐 부장인 난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지… 자기들이 알아서 다 해버리니까.
“네, 75퍼센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시장에 관한 아이작 유통 라이선스도 홍성이 함께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그런데 아이작… 과연 통할까요?”
신 사장의 불안한 자신감에 양 차장이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홍성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유행은 컬러, 디자인, 패턴이 만드는 게 아니라 바로 유통 장악력이 만든다는 거죠. 사장님은 아이작의 현 제품력만 유지해 주시면 됩니다. 유행은 저희 홍성이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