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병이 심각해서 심각한 거겠어? 연세가 있으시니 이젠 힘이 드시는 거지. 그래도 처음 쓰러지시고 그 후로 지난 7, 8년…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셨다. 보통 사람 같았음 못 했어.”
“하긴….”
현재 실망스러운 상무님의 행보만 보면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거긴 한데, 두 아들을 모두 회사에 들이신 사장님께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버리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물론 홍성이 일류 대기업이라서 기관 투자를 비롯해 회사의 지분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산이 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장님 입장에서는 시간을 벌 때까지라는 조건을 걸어놓고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인사라고 판단을 내리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장 타이틀의 승계가 상무님이 아닌 전무님께 돌아갔다는 부분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럼 상무님이 앞으로 전무 포지션으로 올라가는 겁니까?”
내 말에 박 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미간을 좁혔고, 그런 나의 모습에 박 이사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식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공석으로 비워 두는 겁니까?”
“그럴 수가 있나.”
“아니 그럼 누가….”
재빨리 현 홍성 사내이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그나마 전무 포지션에 가까운 인물들을 찾아봤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없다.
그리고 있다 한들 작정하고 상무님을 날릴 게 아니라면 포지션상으로도 전무 자리엔 상무님이 올라가는 게 맞는 거고.
“현재 회사 안에서 전무님이 사장 자리로 올라가면 그 빈자리 채울 수 있는 인물은 상무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회사 안에서만 찾으면 그렇지.”
“외부에서… 데리고 온다는 말입니까?”
“외부… 하긴. 엄밀히 말하면 사외이사가 맞으니까. 어쩌겠어, 인물이 없으면 그렇게 해야지.”
“설마….”
“설마는 무슨. 사장님 퇴임하고 나시면 남는 사람 한 명밖에 더 있어? 맞아. 이문 이사가 올 거다.”
하마터면 헐… 하는 소리가 박 이사 앞에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문이 출세했다, 진짜. 하긴. 사장님이 언제까지고 건재해 주실 거란 생각에 모두가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뿐이지, 계열사 하나둘씩 늘어나서 회사가 커지는 순간 사장님 직할 비서팀에서 사장단이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기도 하고… 내가 참 그 친구가 부러운 게 딱 이런 거야.”
“…?”
“우리처럼 죽어라 버티는 사람들은 조명 한 번 받기 힘든데, 언제나 신스틸러처럼 사장님 오실 때마다 잠깐씩밖에 모습을 안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감을 계속 유지한다는 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거든. 이문 이사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모두가 납득을 하는 걸 보고 속으로 얼마나 허탈하던지… 나까지 납득을 해버렸으니 말이야.”
이문 이사님보다는 박 이사가 입사 선배니까.
박 이사는 마치 이문 이사와 자신 사이에 실력으로나 사장님을 직접 옆에서 모신 이력으로나 자신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져 있음을 담담하게 인정하듯 낮게 말했다.
“확정입니까?”
“오전부터 조금 전까지 계속 그 이야기를 했던 건데, 확정이라고 봐야지.”
사장님의 개인 카드를 박 이사에게 반납한 뒤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때부터 난 상무님에 대한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물론 전무님의 사장 승진, 그리고 이문 이사님의 본사 복귀가 나와 장 대표 때문이기야 하겠냐만, 이상하게 나와 장 대표, 그리고 폴앤크루가 회사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아닐까란 불안한 마음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상무님의 사무실 앞.
통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난 컴퓨터 모니터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상무님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만약 상무님이 고개를 들어 날 발견하셨다면 난 어떤 리액션을 취했을까?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그 자리를 벗어났을까, 아님 용기를 내어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까….
하지만 상무님은 내게 그 어떤 결정을 내릴 기회도 주지 않고,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지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뗄 생각을 안 하고 계셨고, 결국 난 한참 동안 그가 업무를 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내가 정말 짜증이 났던 건 이런 상무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상무님이야 안 마주치면 그만인데, 며칠이 지났건만 사무실에서 민규를 볼 때마다 문뜩문뜩 상무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또 그럴 때마다 난 알 수 없는 미안함, 그리고 죄책감에 업무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회사에 와서 일만 하자고 그렇게나 노래를 부르는 게 바로 나 아닌가.
그런 내가 그걸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날 짜증 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난… 혼자 찔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사장님의 퇴임이 사장님 퇴임식 겸 전무님의 사장 취임식 일정 공고로 일반 사원들에게까지 알려지는 순간 회사는 다시 한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폴앤크루 안정화에만 매달리고 있던 장 대표 역시 뭔가 본사의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고 느꼈던지, 사장님 퇴임에 관한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며, 전화로 그게 사실인지 물었다.
“네, 그렇다고 하네요.”
-진짜 맞구나. 설마설마했는데….
“이제 들으신 겁니까?”
-우리야 본사랑 접점이 있나, 어디. 정신도 없고. 강 대표가 일본 출장 다녀오자마자 말해주더라고.
“한 며칠 됐습니다, 본사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말이라도 해주지.
“그러네요. 그럴…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래, 그랬겠지. 하아… 참….
장 대표의 한숨 속에도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비슷한 감정이 담겨 있는 거 같았다.
장 대표는 그저 사실 확인만 하고 전화를 끊었고, 그와의 통화가 있은 후 며칠 뒤 본사 사원 대강당에서 사장님의 퇴임식이 진행됐다.
* * *
무대 위로 연단이 하나 위치해 있었고, 그 연단 뒤로는 이사단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 11개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전무님을 시작으로 임원진들이 강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본사 직원 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임원진들이 무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순간 저 멀리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원진들이 무대 위로 다 올라가기도 전에 양옆으로 젊은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잡으신 사장님이 강단으로 들어오셨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려 사장님의 모습을 한 번 확인한 후, 그의 등장에 여전히 박수를 치면서도 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껏 사장님의 그늘 속에서 홍성을 이끌어온 임원들.
그리고 앞으로는 그 그늘을 벗어나 홍성을 이끌게 될 주역들.
그중에서도 내 눈엔 상무님만 보였다.
단단하게 다문 입술로 가끔씩 위아래 입술을 번갈아 가며 깨무는 그의 습관엔 많은 생각이 겹쳐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개 사원의 신분으로 사장님의 퇴임식, 취임식을 직접 볼 기회는 극히 드물다고.
그걸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홍성에서 보낸 세월이 이렇게 길었나… 하는 생각으로 나의 지난 홍성 생활이 자연스럽게 되돌아봐질 뿐이었다.
연단 뒤로 서서 지팡이를 수행원에게 넘겨놓고 일장연설을 시작하시는 사장님.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그동안 자신이 떠안고 있었던 홍성의 무게보다, 그 무게를 내려놓는 마음의 무게가 더 무거우신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앉아 있는 임원들의 모습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30분 남짓 진행됐던 퇴임식,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새로운 사장의 취임식.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내 회사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
지금까지 내가 뛰어왔던 홍성이 아닌 게 된 듯한 이질감.
상무님은 여전히 습관처럼 입술 살을 물어뜯고 있으셨다.
* * *
어느 날 문뜩 궁금해져서, 일을 하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홍성 인터내셔널’을 검색해 봤다.
혹시라도 새로운 사장의 취임에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 줄까 싶어서….
더 정확하게는 하루 종일 내 기를 빼앗고 있는 이 빌어먹을 홍성이 도대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회사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새로운 사장의 취임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홍성이 아니라 홍성이 취급하는 브랜드들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홍성 인터내셔널이라는 검색어로 함께 딸려오는 기사는 모리엘츠, 폴앤크루 정도가 고작이었다.
우리 홍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명 연예인이 홍성이 취급하는 브랜드의 국내 모델이 되었다는 이유로 홍성을 대표하듯 기사를 장식하는 사진 속 주인공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기사에 홍성에 관한 내용은 고작 홍성이 해당 브랜드의 국내 유통을 담당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편집샵 브랜드 H.I는… 임의로 만든 게 아닙니다.”
왜 그랬을까.
갑자기 나크리스 건으로 홍성 생활 처음 임원진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사장님(당시 전무님)이 작정하고 날리는 예리한 질문에 몇 차례나 버벅거리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팍! 하고 질러버렸던 당시의 프레젠테이션.
“전 제가 홍성맨인 것이 진심으로 자랑습니다. 그래서 홍성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 이름이 홍성이 취급하는 명품 브랜드에 가려지는 것이 항상 아쉬웠습니다.”
기억이 잘 안 난다.
회사의 중역들을 상대로 덤비듯 그런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다 기억이 나는데, 그 말을 할 당시 내가 진짜 홍성에 그만큼 애사심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그게 내 진심이었던 건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난 마우스로 보고 있던 인터넷 검색창을 닫고 재킷을 챙겼다.
“부장님, 이거 아까 말씀하셨던….”
안 차장이 내 자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그런 안 차장에게 내 자리에 올려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복도로 향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너무 치사하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다.
이렇게 감정 없는 출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엘리베이터에 올라 임원 층을 눌렀다.
그리고 임원 층에 올라가 상무님 사무실 앞으로 섰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상무님.
그는 통화를 이어가다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유리문을 두드렸다.
상무님은 그리 급한 통화는 아니었던지 전화를 서둘러 끊으셨다.
“어쩐 일이세요?”
상무님은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날 쳐다봤다.
“커피 한 잔만 주십시오, 상무님.”
“…?”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앉으세요, 이쪽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지금 당장 회사를 나갈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의미 없는 감정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줄다리기라는 게 나 혼자서만 절대 꿈쩍도 하지 않을 벽에다가 줄을 묶어 놓고 당기며 줄다리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문 전무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무슨….”
“이전 사장님께서는 그때 저랑 장 대표가 동시에 회사를 나가겠다고 했을 때… 저희 둘이 나가버리면 지금 당장은 아쉽겠지만 멀리 봤을 땐 그냥 상무님이 고집을 접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전무님도 참….”
“잘한 선택이든, 아니든 사장님은 상무님이 앞으로 홍성을 이끌어갈 배짱이 되는지, 그 고집을 보고 싶으셨다고 친절하게 힌트까지 주셨다는데… 왜 저희한테 폴앤크루 지분까지 나눠주시며 잡으셨던 겁니까?”
상무님은 한참 동안 당시 상황을 생각하듯 침묵했다.
“제가 가려고 했던 방향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상무님은 커피 한 모금으로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적셔놓고 말했다.
“현재 홍성은 제가 아닌 장 대표와 공 부장이 더 필요하고, 두 분처럼 해낼 능력이 제게는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요.”
상무님은 그저 웃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