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전무님이 하실 거다
사장님의 부재 기간에 대해선 장 대표가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민규 그 친구를 입사시키겠다고 공 부장한테 직접 소개해 주는 자리가 마지막이셨던 거 같다. 아마 내 기억이 맞을 거야. 나야 그전부터 상무님이랑 쭉 같이했었잖아. 사장님 회사 출근하시는 날 같은 경우는 당연히 상무님이랑 같이 움직여 왔었고. 그때가 마지막이셨어.”
그랬네.
나는 폴앤크루의 초기 기획안 프레젠테이션을 마지막으로 사장님을 못 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후에도 민규 건으로 사장님을 뵌 적이 한 번은 더 있었다.
회사 근처 광양 불고기집.
점심이 늦었던 만큼 우리 모두는 급하게 배부터 채웠고,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랜 다음에야 조심히 아까 본사 로비에서 만났던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사장님의 건강상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었고, 그 건강상의 문제가 지금껏 회사의 모든 살림을 전무님께 맡겨놓고 주로 재택근무 위주로 회사를 살피셨던 예전과 비교해서도 눈에 띄게 심각해졌음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다들… 몰랐던 거야? 모르셨어요?”
손 차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은 손 차장에게 쏠렸다.
“딱 일 년 정도 됐겠네.”
“뭐가?”
김 차장이 물었다.
“딱 작년 이맘때쯤이었죠. 센젠 수지가 센젠에서 사업하고 있는 외국계 기업 사장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열었던 일이 있었죠.”
“수지가 뭔데?”
다시 김 차장이 물었고, 그런 김 차장의 질문에 안 차장이 짧게 대답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일종의 시장 정도 되는 타이틀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 지역의 최고 권력자라는 말이죠.”
“아, 서기.”
“네, 뭐… 한국에선 그렇게 발음하죠.”
다시 손 차장이 말했다.
“왜 작년에 말 많았잖아요. 홍콩 쪽에서… 경기 직격탄은 그 옆에 있는 센젠이 고스란히 맞았고. 센젠은 문제없다, 걱정 말고 사업하라는 식으로 일종의 지역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거기에 홍성 중국 법인도 포함이 됐던 거죠. 처음에 법인장님이 사장님한테 보고를 드렸어요. 이런 이런 초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실 거냐고. 그전까지야 다들 아시겠지만, 사장님은 중국통 아닙니까. 일 년에도 몇 번씩 직접 오셨잖아요. 근데 그때 처음엔 직접 오시겠다고 하셔 놓고 며칠 안 지나서 사장님 대신 전무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아, 그때… 작년 이맘때쯤 전무님이 중국 출장 한 번 다녀오셨지….”
장 대표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손 차장은 함께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갔다.
“그때 외국계 기업 사장단들 만찬에 참석하시고, 다음 날 전무님이 법인을 한번 둘러보시겠다고 오셨죠. 그리고 그때 법인장님이랑 식사 자리에서 슬쩍 사장님 건강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우린 전혀 몰랐네.”
“저희도 그때는 여사로 흘려들었어요. 사장님 건강 안 좋으신 거야,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전무님도 그 당시 그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셨던 게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던 거고….”
장 대표의 말처럼 본사에서 일만 하고 있었던 우리는 사장님의 건강에 문제가 다시 생겼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상무님을 바로 옆에서 모신 게 얼만데, 그런 장 대표도 모를 정도였으니…
모두가 사장님 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난 속으로 조금 전 본사 로비에서 사장님이 보여주셨던 행동을 계속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행동이셨다.
물론 사장님 스타일이 자체가 워낙에 시원시원하시고, 또 영업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으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시지만, 굳이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는 그 점심시간 본사 로비에서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내게 자신의 개인 카드를 건네실 이유가 있었을까?
별거 아닌 듯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자기를 뒤따르던 회사의 임원진들을 모두 멈춰 서게 만들어놓고, 굳이 자신의 카드를 내게 건넬 이유가 있으셨던 걸까?
거기에 숨은 뜻을 헤아리기 이전에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과한 액션이셨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고, 별생각 없이 그저 열심히 필드에서 뛰고 있는 영업맨들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보기엔 장 대표를 홍성의 손님이라고 말씀하신 저의가 궁금했다.
헷갈렸다.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엄밀히 구분을 하자면 폴앤크루는 이미 독립이 된 상태가 맞는 거고, 또 그래서 장 대표는 홍성 본사의 입장에선 손님이니까 이전의 관계는 정리를 하고 서로의 포지션에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일을 해달라는 당부셨던 걸까.
헷갈린다.
“그건 그렇고 강 대표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대화 주제를 바꾸며 손 차장이 물었다.
“듣기로 폴앤크루 분리되는 과정에서 강 대표 때문에 말 많았다면서요?”
“중국에 있던 친구가 귀도 크다. 그런 건 또 누구한테 들었어?”
“문 차장이 그러더라고요. 바로 올 수 있습니까? 복귀 준비하는 동안 제가 일할 곳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미리 파악을 해놔야죠.”
“정확하게 말해서 강 대표 때문이 아니라 상무님 때문이었죠.”
안 차장이 생각 없이 툭 하고 내뱉었고, 그 말에 김 차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안 차장에게 눈치를 줬다.
하지만 안 차장은 자신이 어디 틀린 말을 했냐는 식으로 아랫입술을 쭉 내빼고는 김 차장의 엄한 시선을 피해버렸다.
“괜찮아. 실력이 제법 쓸만해.”
장 대표의 대답에 손 차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우리 장 대표님 입에서 쓸만하단 말이 나올 정도면 꽤 에이스라는 말인데….”
“파리 현지에서 굴러먹은 짬밥이라는 게 있는데, 그 짬밥을 무시할 수야 있나. 그리고 몸값이 얼만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
그때 나는 그 짧은 사이 알렌 강에 대한 장 대표의 신뢰가 꽤 많이 쌓여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손 차장의 말처럼 장 대표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다.
장 대표의 입에서 쓸만하다는 평가, 거기에 알렌 강의 연봉을 거론하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한다는 말로 그 몸값만큼은 하고 있다고 인정해 주는 건 알렌 강의 능력을 무척이나 높게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손 차장까지 합류를 했으니 장 대표 이제 든든하겠네.”
김 차장의 말에 장 대표와 손 차장은 지난 자신들의 관계를 묻고 새로운 관계로 발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조금은 간지러운 듯,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각자 따로 미소를 지었다.
장 대표, 그리고 알렌 강과 손 차장….
컨트롤 기업에서만 일을 해 봐서 브랜드 본사의 디테일 업무까지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일까.
브랜드 하나에 저렇게 굵직한 맨파워가 셋이나 붙어 있다고 생각을 하니, 저 셋이 동시에 붙어있는 폴앤크루를 상대로 과연 김 차장이 어디까지 선방을 해줄지, 과연 마케팅 영업부가 언제까지 폴앤크루를 놓치지 않고 잡고 있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래, 저 정도 빌드업 정도는 인정해 주자…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저 정도 빌드업 정도는 된 상대여야 내가 폴앤크루를 홍성 본사에 꽁꽁 묶어 뒀을 때 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내 입장에선…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손 차장 때문에 늦게 시작된 점심이었기에 거기서 술까지 곁들여지면 점심 복귀 후 곧바로 퇴근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시간이 어중간했었다.
물론 우리 본사 식구들 입장에서야 술을 한잔 걸치든 안 걸치든 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오후 미팅이 잡혀 있다는 장 대표 때문에 결국 우린 술 한잔을 포기하고, 술을 포기한 기분을 사업 이야기로 풀었다.
장 대표와 식당 앞에서 헤어진 시간은 오후 두 시 반.
다시 회사로 복귀했을 땐 이미 오후 세 시가 넘어있었다.
난 사장님의 카드를 도대체 누구한테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는 것인지, 그 카드를 받을 때부터 난감했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이니까.
결국 박 이사한테 전달을 하면 박 이사가 알아서 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박 이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장님이 더 이상 회사에 안 계시다는 건 블록이 걸려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정상 운행을 하고 있는 게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임원 층.
여전히 불편한 층이다, 내게는.
박 이사의 사무실을 찾아가기 위해선 그보다 더 엘리베이터 복도에 가까운 상무님의 사무실 앞을 지나쳐야 하니까.
언제부턴가 상무님의 사무실 통유리엔 더 이상 블라인드가 처져 있지 않았고, 난 박 이사의 사무실로 가는 도중 자신의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상무님과 통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잠시 눈이 마주쳤다.
“….”
상무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유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불편한 감정.
내가 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피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이렇게 눈이 마주치거나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 좋고, 꼭 내가 직접 그를 궁지로 몰았다는 미안함이 올라온다.
정말이지 벗어던져 버리고 싶은 답답한 노예근성이다.
이거 정말 싫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나, 그리고 자신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상대를 감정에 휘둘리게 만드는 상무님… 정말 싫다.
궁지로 몰렸던 상무님이 아니라 나와 장 대표였는데….
그리고 상대를 궁지로 몰았던 건 나와 장 대표가 아니라 상무님이였는데… 어째서 내가 그에게 이렇듯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얼굴에 가면을 썼다.
어차피 눈이 마주친 거 그냥 지나치는 거 말이 안 되고, 그래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그리고 힘든 미소나마 억지 미소를 얼굴에 띄워 놓고 통유리 벽 안 속의 상무님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나의 인사를 받은 상무님 역시 컴퓨터 모니터 뒤에 숨어 날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후우….”
상무님 사무실 앞을 완전히 벗어나서야 난 그 짧았던 순간 동안 참아왔던 한숨을 흘리며 박 이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사무실 문 앞에 서는 순간 박 이사와 눈이 마주쳤으니까.
“사장님은 가신 모양입니다?”
“금방 가셨어.”
“몸이 좀… 안 좋아 보이시던데….”
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넌지시 물어봤다.
“나도 깜짝 놀랐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어. 오늘 나뿐만 아니라 임원진들 대부분이 크게 한 방 맞은 날이었어.”
“네, 저도 사장님 야위신 모습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건강이….”
“아니.”
“…?”
“사장님 건강도 건강이지만… 오늘 이사회 안건이 사장님 퇴임안이었다.”
“…!”
“사전에 안건도 안 올라오고, 가결 여부도 없이 이사회가 열린다고 해서 이게 뭔가 싶긴 했는데… 아무튼 오늘 안건이 사장님 퇴임안이었어.”
“그럼 앞으로 사장직은… 설마 상무님이?”
나의 짐작에 박 이사는 그럴 리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짧게 흔든 후 말했다.
“앞으로 전무님이 하실 거다. 자네들은 큰 변화가 없을 테니까 해오던 대로만 하면 돼. 자네들한텐 큰 변화가 없을 거다.”
“그 정도로… 심각하신 겁니까? 사장님 건강….”
내가 정말 박 이사에게 묻고 싶었던 건 사장님의 건강 상태가 아니라 어째서 자신의 아들이 상무직에 있는데, 회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를 전무님에게 맡기냐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