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싫습니다.”
민규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런 민규의 모습에서 다혈질인 사장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제가 남겠다고 하면 남아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죠.”
“그럼 영업부에 남겠습니다.”
난 깍지 낀 손을 회의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자세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단단한 민규의 표정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민규는 말이 없었다.
안 차장 역시 가만히 있었다.
“민규 씨라는 존재로 인해 다른 동료들이 불편해질 수가 있어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민규는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 결정이었습니다. 영업부로 지원하겠다고 했던 건. 물론 그 전에 사장님, 상무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영업부가 홍성의 심장이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 봐라.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적성과도 잘 맞을 거라고… 직접 해 보니 진짜 그런 거 같습니다.”
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눈치 보지 말고 이야기를 이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제가 거길 가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제가 거길 가면 상무님에 대한 영업부 직원들의 불만이 사라지고, 제가 계속 영업부에 남아 있으면 그 불만이 유지되고… 뭐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죠.”
“아닌 거라면 전 그냥 계속 남아서 해 오던 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거길 가서 다시 영업부로 돌아오면 그땐 영업부 직원들과의 관계가 더 서먹해질 거 같습니다.”
“차장님.”
난 안 차장을 불렀다.
“모리엘츠 중국 전시 일정 나왔습니까?”
“잡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도 혼자 가실 건 아니죠? 민규 씨 데리고 가세요.”
“…!”
내 말에 민규뿐 아니라 안 차장까지도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부장님….”
“장 팀장한테 말해서 만토바 출장 일정 있으면 거기에도 민규 씨 포함을 시키라고 하고. 링겐 일정도 같이요.”
“벌써부터 데리고 다니기엔 너무 이릅니다, 부장님. 거기다 그렇게 하면 다른 직원들….”
“우리… 팀원들한테 어설픈 희망 같은 건 주지 맙시다. 민규 씨가 다른 일반 팀원들과 다른 건 다른 거니까.”
“흐음….”
“어쩌면 그런 희망들이 일반 팀원들의 입장에선 기만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이게 홍성이다. 사장님 아들이라도 일반 사원들과 똑같이 출발하고 또 똑같이 일을 한다…. 자, 얼마나 공평하냐. 이게 바로 우리 홍성이다….”
안 차장은 입을 다물었고, 민규 역시 위아래 입술을 안으로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날 바라보는 민규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잖아요. 아닌데 그런 것처럼 우리가 대신 민규 씨와 회사의 이미지를 애써 아름답게 포장해 주고 있는 거지. 민규 씨.”
“네, 부장님.”
“제가 홍성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일을 하는 동안 회사로부터 받은 가장 어려운 미션이 뭐였는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민규 씨예요.”
“….”
“민규 씨를 저한테 맡기시면서 바닥부터 제대로 가르쳐 보라고 하셨는데… 사실 쉽지 않죠, 제 입장에선.”
난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어 가슴 앞으로 팔을 꼬았다.
그리고 회의 의자 깊숙하게 등을 기대었다.
“그런데 하기 싫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지금도 그렇고. 다만 아직까지 한 번도 안 해봤던 일이라 어떻게 해야 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
“그래서 살짝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괜히 설레고 재밌을 거 같았어요. 민규 씨, 지금부터 좀 뛰어납시다.”
“그게 무슨….”
“지금부터는 쓰고 있는 가면 벗어던지고 무조건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애쓰세요. 저도 그럴 테니까. 우리 회사에 민규 씨가 사장님 아들인 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죠?”
“…네.”
“그럼 다른 사람들보다 승진이 빠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다들 이해… 아니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
“….”
“민규 씨와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분명 그런 부분에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만약 지금처럼 계속 민규 씨가 남들과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일을 한다는 연기를 하게 되면. 제가 언제까지 홍성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언제까지 민규 씨의 상사로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있는 동안 전 민규 씨 주위에 실력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기보다는 그냥 민규 씨 자체로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요. 똑똑한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다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난 민규를 향해 미소를 흘려준 뒤 안 차장을 쳐다봤다.
“앞으로 1년이면 충분하겠습니까?”
“뭐가요?”
“민규 씨 대리 승진까지.”
“흐음….”
“그 정도 미션이야 껌 아닙니까, 안 차장님 실력이면. 1년 안에 대리로 만들어 놓으세요. 그럼 1년 뒤에 민규 씨는… 만약 제가 없더라도 그때부터 대리 타이틀로 영업 기획부에서 양 차장님께 팀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본사 영업부에서 한 2년 정도 단단하게 배우고 나서 파리나 센젠 쪽 파견 근무 하고 돌아오면 될 거 같은데… 그때쯤이면 본부장 정도는 잡으려나? 아무튼, 뭐 그렇게 하면 되지 싶은데….”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부장님이 없더라도… 라는 게.”
안 차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아니….”
“만약에라고 했잖아요, 만약에라고…”
나라고 왜 걱정이 안 되겠나.
그 걱정의 강도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직까지 상무님 방에서 상무님과 강 대표를 상대로 퍼부었던 걸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준비를 해야 될 거 같았다.
물론 상무님의 반응에 따라 그 준비가 준비로만 끝이 날 것이냐, 아님 실행으로 옮겨질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겠지만, 난 내가 둘 수 있는 최고의 강수를 이미 던져놓은 상황.
쪽팔리게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도 않고, 더 솔직한 마음은 내가 상무님을 상대로 했던 경고처럼 계속해서 의미 없는 감정 노동을 시킨다면 난 더 이상 홍성에 미련이 없다.
상무라는 존재가 내 마음대로 구워삶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맥락도 없는 상무님의 행보를 따라갈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알아서 적당한 선만 지켜준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어쩌다 보니 난 상무님이 그 선을 넘게 되면 결정을 하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였다.
저녁이었다.
퇴근을 하고 은행 앞에서 강혜선을 태워 집으로 가는 도중에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이스… 잘했어!”
강혜선은 자기가 다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주먹을 말아 쥐며 잘했다고 말했다.
“끝?”
“뭐가?”
“그게 끝이야?”
“그럼?”
“더 할 말 없어?”
“음… 진짜 잘했어. 너무너무 잘했어. 우리 남편 최고!”
“에휴….”
“아, 뭐? 왜 한숨 쉬는 건데?”
“그만두겠다는데… 아니, 어쩌면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데 할 말이 그게 전부야? 나 지금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 생각은 어떤지… 그걸 물어보는 거잖아.”
“그만둬, 그만둬. 뭘 또 물어봐, 물어보길. 그게 그 인간들의 한계인 거야. 내가 내 남편을 몰라? 자기들이 어디 가서 당신 같은 사람을 구해? 당신처럼 회사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거 같아? 있으면 어디 나오라고 해 봐? 난 못 봤어, 당신처럼 일에 미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렇게 못살게 굴고 또 그런 식으로 취급을 하는데, 뭐 하러 그런 인간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만둘 거면 지금 당장 그만둬. 내일 당장 사표 집어 던져 버려!”
“푸흡….”
“사실 그동안 당신 퇴근하고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거 보는 거 내가 더 고역이었어. 회사에서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은 해도 당신이 말을 안 해주니 정확하게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내가 알 방법이 있어? 그런 거 때문에 그동안 그랬던 거라면 내일 당장에라도 사표 집어 던지고 빅엿 한번 날려 버려.”
그래, 이런 사람이지….
속으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만 가지 계산을 하기 시작하더라도 일단 겉으로는 남편 기부터 살려주고 보는….
강혜선은 그런 사람이지….
“아니다, 계속 오늘처럼 강하게는 나가더라도 사표는 좀 천천히 써.”
“왜?”
“일단 나 뭐 필요한 거 있나 없나 확인 좀 해보고. 엄마랑 언니한테도 좀 물어봐야겠네. 근데 회사 그만두기 전에 직원가로 뭐 막 많이 사면 뭐라고 하지?”
“하이고….”
“그래도 명색이 부장인데 치사하게 그런 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뭐라고 한다.”
“끝까지 고지식해. 눈치껏 해 줄 수도 있으면서. 아, 근데 나 진짜 가방 하나 필요하긴 해. 당신 회사 그만두기 전에 가방이나 하나 살까? 나 가방 안 산 지 꽤 됐는데….”
“사놓고 쓰지도 않으면서….”
“누가 가방을 들고 다니려고 사나? 보고 만족하려고 사는 거지. 암튼 뭐 필요한 거 있나 없나 리스트 뽑기 전까지는 일단 사표 던지는 건 보류.”
“….”
“…왜 갑자기 말이 없어?”
“그지?”
“뭐가?”
“들고 다니려고 사는 건 아니지?”
“뭐래, 또 갑자기?”
“폴앤크루 말이야. 이거 진짜 잘만 하면 초대박인 거잖아. 수집용으로 말이지. 입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만족용으로 하나씩, 하나씩 작가들 작품 모은다는 개념으로. 거기다 약간 따조 같은 느낌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컬렉션의 작가가 뜨면 그 작가 가치로 인해 해당 컬렉션의 가치도 함께 올라갈 수도 있고.”
“못 말린다, 진짜. 바로 조금 전에 어쩌면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내 눈치 보면서 말했던 사람 맞아? 지금 이 분위기에서까지 회사 일 이야기를 하고 싶니?”
“아깝잖아.”
“아깝긴 뭐가 아까워!”
“진짜 잘만 발전시키면 무조건 레전드 한번 찍을 수 있는 프로젝트인데… 잘하겠지?”
“얼씨구.”
“아놔, 그런데 왜 이렇게 강 대표 그 인간한테 믿음이 안 가냐? 상무랑 그 인간만 생각하면 쫄딱 망했음 좋겠다 싶으면서도 폴앤크루만 딱 놓고 보면 제대로 붙어서 잘 좀 띄웠음 좋겠고… 후우… 아, 몰라, 몰라….”
“패버려, 그냥. 한 대 세게 쥐어패 버려, 똑바로 하라고. 그러고 나와.”
“진짜… 괜찮겠어?”
“누나 못 믿어?”
“까분다 또.”
“걱정 마. 아무 걱정 말고 질러야 할 거 같으면 그냥 질러 버려. 뒷일은 이 누나가 다 책임질게.”
그날 밤 강혜선은 내게 저녁 설거지를 부탁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뭔가를 했다.
그리고 내가 설거지를 다 끝내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동안 거실 바닥에 앉아 날 기다렸다.
싱크대에서 쓰레기 냄새가 밴 손을 씻고 거실로 나가자, 강혜선은 잠시 자기 곁으로 와서 앉아 보라고 했다.
“이건 뭐야?”
은행 계약서 한 장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다행히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네.”
“뭐냐니까, 이게.”
“대출 계약서야.”
“근데 이게 왜?”
“고민하고 있는 당신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서.”
“…?”
“작년에 내 말 듣고 대출 거래 은행 갈아탔잖아.”
“그랬지.”
“그래서 작년 한 해 우리가 얼마나 세이브를 했는지 보라고.”
“얼마나… 했는데?”
강혜선은 스마트폰 계산기 앱으로 지난 1년간 대출 거래 은행을 갈아타서 절약한 액수를 내게 보여주었다.
“헐… 이게 거래 은행 바꿔서 세이브된 금액이라고?”
“하다못해 휴대폰 통신사도 번호 이동 같은 거 하면 막 새 기계 바꿔 주고, 그 또 뭐냐… 보조금 같은 거로 최대 몇십만 원씩 혜택을 줘. 근데 은행이라고 그런 게 없겠어? 내가 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돈놀이하는 곳이야. 결국은 대출 상품 팔아서 이자 장사 하는 곳이고. 잘 봐. 그때 당신은 몇 푼이나 차이가 나겠냐며 유심히 보지도 않았겠지만, 처음 3.75퍼센트였던 이율이 거래 은행 한 번 바꿨을 뿐인데 2.88까지 떨어졌어. 모르는 사람들이야 귀찮기도 하고 또 처음 거래 은행에 계속 있으면 뭔가 더 많은 혜택이 있을 줄 알고 계속 한 은행에서만 거래를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냐. 통신사, 은행… 그리고 회사…. 횟집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한테 밥 주는 거 본 적 있어? 안 줘.”
“….”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라고. 아니다 싶으면 고민하지 말고 결정해. 난 무조건 당신 응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