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인물인 겁니까?
힘이 빠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난 강경준의 이른 합류에 내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무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일 뒤.
강경준의 입사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아직 폴앤크루의 단독 사업체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지만, 강경준은 폴앤크루의 사장 격으로 홍성에 입사를 했다.
지금 당장은 합법적인 계약을 위해 본사 소속으로 들어와 있지만, 폴앤크루가 정식으로 분리경영을 하게 되면 그때부턴 본사 소속이 아닌 폴앤크루의 대표이사가 되고, 그에 맞는 옵션들을 새롭게 붙여 줄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지금까지 홍성에서 없었던 파격적인 인사였다.
외부에서 인원을 끌어와 임원 자리에 앉힌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당장 홍성의 미래 사장이라고 하는 상무님부터 완전 밑바닥부터는 아니지만, 일반 사원부터 단계를 밟아 올라왔지 않나.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부분은 그런 파격 인사에 사장님과 전무님이 상무님의 결정을 믿고 존중해 주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난 솔직하게 그런 홍성의 변화가 반가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만 이번 인사에서만큼은 회의적이었다.
지금껏 내가 총괄을 하고 있었던 폴앤크루가 중간에 걸려 있고, 그걸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급하게 빼앗기듯 넘겨야 하는 상황 때문에 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걸 질투심이라고 하겠지.
홍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사가 어디서 뚝 하고 떨어져서 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된 것도 배가 아픈데, 거기다 지난 몇 달간 양 차장과 함께 쥐어짜 냈던 프로젝트까지 갖다 바치려니 여간 속이 쓰린 게 아니었다.
분명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너무 급하게, 그리고 또 일방적으로 진행된 이번 인사에 난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무님을 상대로 날 납득시킬 수 있는 인사를 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최소한 상무님이 조금이라도 영업부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계속해서 의미 없는 불만, 상무님에 대한 불신을 키워냈다.
“나 원 참, 씨발… 어이가 없어서….”
박 이사의 사무실.
박 이사는 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넣으며 그동안 잠잠했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박 이사의 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2억 2천이란다, 2억 2천….”
“…뭐가요?”
“알란 강인지, 알렌 강인지 하는 그놈 연봉. 옵션 같은 거 다 빼고 기본급만 2억 2천에 계약을 했단다. 무슨 씨발 스포츠 선수 영입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 테이블 다 무시해 가며 이렇게 협상을 해주는 건 그동안의 홍성 연봉 테이블을 다 무시하겠다는 거 아냐.”
알렌 강.
강경준의 영어 이름이다.
그는 홍성과 계약을 마치며 공개적으로 자신을 알렌 강으로 불러 주길 요청했다.
그동안 파리에서 알렌 강이라는 이름으로 업계에서 활동을 해왔다며, 앞으로 폴앤크루를 제대로 된 브랜드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해외 시장 공략은 필수인데, 그럴 때를 대비해 자신의 영어 이름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유명 브랜드의 본사에서 장기간 근무를 하며 만들어 놓은 자신의 인맥과 유통 채널을 아낌없이 홍성과 공유를 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얼핏 들으면 폴앤크루에 대한 자신의 의욕을 그렇게 표현한 걸 수도 있겠지만, 대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고….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속이 좁다는 소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음에 안 드는 거니까.
“내가 지금 홍성에서 몇 년째인 줄 알아, 공 부장?”
“….”
“입사한 그다음 해에 우리 첫애가 태어났다.”
“….”
“그 첫애가 지난달에 집에 결혼할 남자라면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더라.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후우….”
난 답답한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박 이사가 듣고자 하는 대답을 대신 내놓았다.
“실력이 있으면 당연히 무슨 조건을 내걸어서라도 데리고 와야지. 그리고 그 실력이 검증이 된 인물이라면 나보다 더 많이 받아가더라도 인정을 해야지. 그 돈을 줄 만큼의 실력이 된다면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어?”
“2억 2천은… 하하… 솔직히 좀 심하긴 하네요. 다른 사람들 박탈감이 심해질 거 같습니다.”
“물론 한 사업체를 차고 나갈 대표이사 타이틀치고 그렇게 오버스럽게 많은 건 아냐.”
“…그건 그렇죠.”
“근데 문제는 폴앤크루가 지금 이렇게 자리를 잡기까지 알렌 그 친구가 한 게 뭐냐는 거야.”
“그게 포인트죠.”
“우리가 무슨 아이티 계열, 금융권도 아니고 신생 브랜드 하나 만들어서 그거 분리시키는 데 그 돈을 써야 돼? 그럼 쁘띠토널로 파리에 넘어가 있는 법인장도 그만큼 줘야지. 그래야 모두가 납득을 할 거 아니냐고.”
“….”
“가능성을 보고 그 돈을 주는 거다? 허… 도대체 무슨 가능성? 폴앤크루의 가능성은 사실상 공 부장이 다 열어놓은 거 아냐?”
“뭐 그렇다고 하기보다….”
“잘하시다가 갑자기 왜 이런 무리수를 두시지? 상무님 말이야.”
“이사님이 보시기에도 무리수 같으세요?”
“당연히 무리수지, 이 친구야. 좋아, 브랜드 본사에서 임원급 경험이 있는 인물을 사장 자리에 앉히는 거까지는 오케이. 그게 뭐 자기 지인이든 가족이든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필요하다면 앉혀야지. 하지만 그동안의 연봉 테이블까지 건들면 안 돼. 임원 막내급인 내가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데, 다른 분들 심기는 좀 불편하시겠어?”
“…!”
박 이사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나도 조금은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상무님 결정이었다고 해도 저는 사장님, 전무님이 오케이를 해주셨다는 게 더 이상합니다.”
“사장님 생각까지는 모르겠고, 전무님은 일단 한번 지켜보자고 하시는데… 참… 모르겠다, 나도. 전무님도 입을 열고 싶어 간질거리시는 거 같긴 하던데, 그냥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정 같으시더라고. 어쨌든 상무님이 추진해서 폴앤크루가 이만큼 진행이 됐잖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한번 해보란 뜻이겠지.”
“….”
“다만 그 책임은 단단히 지셔야 할 거야.”
“무슨 책임….”
“우리 홍성에서 기본 옵션 다 빼고 기본급만으로 2억 넘게 받아가는 임원이 몇 명이나 될 거 같아?”
“….”
“그렇게 안 많아. 열 명도 채 안 돼. 그런데 과연 우리 홍성 임원들 중 폴앤크루 하나 제대로 차고 나갈 인물이 없겠냐는 거야, 내 말은. 아닌 말로 내가 공 부장 너만 데리고 갈 수 있음 나도 할 수 있겠다. 어느 정도라야 궁시렁거리지를 않지. 몇십 년간 충성해 온 임원들 다 빈정 상하게 만들어 가면서 저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진짜….”
“혹시… 사장님, 전무님께서 상무님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하시려고 준비 중인 거 아닐까요?”
“세대교체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임원들이 아무리 별일 안 하고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서 전화기 붙잡고 말로만 일을 하는 거 같아 보여도, 그런 임원들이 결국은 회사의 역사고 공 부장이 말한 홍성의 현세대인 거야. 그런 세대를 무슨 수로 뚝딱하고 교체를 하나? 왜? 공 부장이 보기에 난 홍성의 올드 세대 같아 보여?”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 뜻으로 여쭤본 게 아니라….”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 현장에서 뛰었다.”
“알죠.”
“지금 상무님 큰 실수 하시는 거야. 알렌 그 친구가 자기 몸값만큼 일을 제대로 못 해주면 그에 따른 비난은 알렌 그 친구가 아니라 상무님이 다 감수를 해야 하는 거라고.”
“….”
“참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이렇게까지 급하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건데 말이야.”
“따로 계산이 있겠죠.”
“제발 그랬음 좋겠다. 내가 지금 이렇게 뒷담화를 까고 있는 걸 나중에 가서 후회할 수 있도록. 그나저나 공 부장.”
“네, 이사님.”
“아쉽겠어.”
난 그냥 피식하고 웃음을 보였다.
“나라고 왜 공 부장 지금 심정을 모르겠어. 쳐내고 있는 프로젝트 강탈당하는 것만큼 억울하고 허무한 게 없지.”
“그냥….”
난 입맛을 한 번 다신 후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억울하고 허무한 것보다는 불안합니다.”
“불안?”
“네. 불안합니다. 물론 상무님이 알아서 잘 진행을 하시겠지만, 외부 인력을 끌어들이시겠다는 뜻을 밝히신 순간 처음 폴앤크루의 출발 방향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흐음….”
“폴앤크루로 큰돈을 벌자고 했던 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처음 출발할 당시의 목표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거 같아서… 그 목표가 사라지게 될 거 같아 불안할 뿐입니다.”
“참… 이해가 안 되네.”
“저나 양 차장이야 아닌 말로 영업부 일에만 올인을 할 수 있음 편하죠. 폴앤크루로 올릴 수 있는 매출이야 어느 정도 확보를 해 놓은 상태고, 또 폴앤크루가 없었더라도 이미 영업부는 내년까지는 안정권 아닙니까, 별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그렇지. 지금 영업부 밸런스야 흠잡을 곳 없지.”
“욕심을 부릴 마음은 없습니다. 상무님께서 영업부에게 딱 여기까지만 하라고 하시면 아닌 말로 저희야 편한 거 아닙니까.”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은 아니고.”
“아닌 거 알지만… 이사님 정신 건강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크크크….”
“솔직히 그동안 어떤 보고를 어디에 하고 또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건지 많이 헷갈리더라고요. 차라리 잘된 거 같습니다. 이젠 그냥 이사님 방만 찾아오고 싶네요. 최대한 빨리 인수인계 끝내고 영업부는 폴앤크루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강경준, 알렌 강의 업무 태도는 훌륭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업무를 시작하기로 된 계약 날짜보다 빨리 업무 파악에 나섰다.
인사부를 통해 본사 방문자 카드를 구해서 매일같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딱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했고, 거의 모든 시간을 상무님 방에서 보냈다.
그 덕에 난 원래의 계획보다 더 빨리 사업 인수인계를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잠깐만요, 공 부장님.”
“…네.”
상무님의 방이었다.
장 본부장까지 있는 자리에서 난 알렌 강에게 그동안 영업부가 총괄하고 있던 폴앤크루의 사업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서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았기에 며칠 동안 영업부 사무실을 비워놓고 나 역시 거의 상무님 방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방금 말씀하셨던 내용 중에, 내년 9월에 중국 법인에서 폴앤크루 영업부장이 온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아, 그건 말 그대로….”
“인사권은 저한테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상무님?”
“….”
“저는 그런 줄 알고 제 팀을 따로 꾸리고 있었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해야 한다는 걸.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나보다 한발 빨리 알렌 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원래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던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 조율을 해 가면서 맞춰가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혹시 내년 9월까지 영업부장 자리를 비워놔야 한다는 뜻인가요? 전 그게 좀… 궁금하네요.”
“….”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인물인 겁니까? 이 손제익 차장이라는 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