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27화 (227/325)

#227

회사는 개인보다 똑똑해

“크흐… 아으….”

“흐흐흐… 어때? 많이 독해?”

“몇 도입니까, 이거?”

“몰라? 어디 보자….”

손 차장은 술병을 들어 술병에 붙은 스티커에서 술의 도수를 확인했다.

“53도네.”

“아으…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마십니까?”

“이런 거라니. 비싼 거야, 이 사람아. 내가 오늘 공 부장 온다고 해서 특별히 지난 춘절 때 거래처 진리한테 받은 거 뜯는 거라고. 이거 식당에서 주문해서 마시려면 한 병에 최소 한국 돈 50만 원은 넘게 줘야 하는 술이야.”

“진리? 진리가 뭡니까?”

“한국으로 치면 팀장? 매니저 정도 되는 직급이야.”

“그런데 그런 거… 함부로 받아도 됩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이 나라 문화야. 내가 바보도 아니고 상무님 라인 다이렉트로 타고 있는 본사 영업부장한테 겁 없이 뇌물받았단 말 할까 봐?”

“아니, 뭐 그런 뜻으로 드린 말이 아니라….”

“농담이야, 이 친구야. 자 한 잔 더 받아.”

손 차장과 단둘이서 저 멀리 홍콩이 보이는 광동식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손 차장이 지난 춘절 때 선물받은 비싼 중국 백주 한 병을 준비했는데, 첫 잔을 마셔보고 난 곧바로 과연 이걸 둘이서 다 비울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술에 겁을 먹는 스타일은 아닌데, 중국 백주는 그 특유의 향 때문인지 첫 잔부터 겁이 났다.

하지만 난 속마음과는 반대로 빈 잔을 손 차장 앞으로 내밀었고, 그가 따라 주는 술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요즘 어떠십니까?”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일 마치고 집에 와서 애들이랑 놀아주고… 애들 크는 거 보는 맛에 사는 거지. 공 부장은 어때? 이제 슬슬 2세 준비할 때 되지 않았나?”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라니? 무슨 그런 대답이 있어?”

“노력은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네요.”

“무슨 문제 있어?”

“아뇨. 저도 그렇고 와이프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봤는데, 문제는 없답니다. 그냥 뭐 아직 때가 아닌 거겠죠.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조급해할 필요 하나 없어. 생기기 전엔 몰라. 지금이 얼마나 천국인지.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하하하….”

“웃긴….”

“아니 어쩜 본부장님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말을 하십니까?”

“본부장? 누구? 장 본부장?”

“네.”

“훗… 그 양반은 요즘 어때? 잘 지내고 있어?”

“네, 뭐….”

“잘 지내겠지, 뭐. 차기 홍성 사장 옆에 딱 달라붙어서… 얼마나 멋진 보직이야?”

손 차장은 내게 같이 마시자는 신호도 주지 않고 혼자 술잔을 비워버렸다.

“크흐….”

인상을 찡그리며 안주를 집으려는 손 차장에게 내가 말했다.

“좀 도와주십시오, 차장님.”

“도와주긴 뭘 도와줘. 폴앤크루 받아주기로 했잖아.”

“그래도요.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십시오.”

난 다시 술병을 들어 손 차장의 빈 잔을 채웠고, 그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술잔을 들어 그 독한 백주를 단번에 비워냈다.

“장 본부장이 뭐래? 바쁜 사람 오게 만든다고 내 욕 안 해?”

“무슨 욕이요?”

“그때부터 계속 이러네?”

“…?”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알면서….”

“그냥. 출장 가서 법인장님 앞에서 손 차장님 체면 잘 좀 세워 주고 오라고요.”

“퍽이나.”

“진짭니다.”

“됐어, 이 사람아.”

“후회… 하십니다.”

“…!”

손 차장은 술잔을 잡으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 번씩 저랑 둘이서 술 마실 일 있을 때마다 꼭 안 빼먹고 손 차장님 이야기를 하십니다.”

“….”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먼저 내가 다가갔으면 분명 품을 수 있었을 건데, 왜 그걸 못 했을까… 하시면서.”

“다음에 같이 술 마실 때 또 내 이야기 꺼내면 그러지 말라고 전해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꼭 내가 패자고 자기가 승자 같잖아.”

“….”

“고양이 쥐 생각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릴 공 부장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참… 그 양반도 이제 나이가 들긴 드는 모양이다.”

“이상하게 손 차장님의 존재가 신경이 쓰였다고 하더라고요.”

술잔을 입술에 붙인 채 손 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입사 선배인 김 차장님도 있었는데, 당시 차장 승진 기간 때 장 본부장님은 김 차장님은 크게 신경이 안 쓰였고, 오히려 손 차장님을 더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푸훕….”

“그런데 막상 차장 승진 발표가 나고 다시 손 차장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려니까… 편하게 지냈던 예전처럼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별것도 아닌 일에 별 쓸데없는 의미를 다 갖다 붙인다. 비슷한 입사 기수 동료끼리 한정된 티오 사이에 두고 경쟁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똑같지.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

“아쉬우셨던 거겠죠.”

“….”

“손 차장님이 장 본부장님의 옆을 지키고 있어 주셨다면 어쩌면 손 차장님으로 인해 더 재밌는 프로젝트들을 많이 시도해 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저주받은 팀장 기수들이었지, 당시 나나 장 본부장, 김 차장님은. 누구 잘못도 아냐. 경쟁이 싸움으로 붉어질 정도로 너무 치열했던 게 문제였던 거고.”

손 차장은 피식하고 미소를 흘렸다.

“그걸 어떻게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 회사가 적당히 컨트롤을 못 해준 잘못이 가장 큰 것을. 지금처럼 3차장 체제였어 봐. 한 번씩 본사 소식 전해 들을 때마다 참 부러워. 공 부장, 양 차장, 그리고 안 차장 사이좋게 일하고 있다는 소식 들으면.”

“운이 좋았죠.”

“그러니까 말이야. 그 양반이 그 이야기는 안 해?”

“무슨….”

“왜 내가 장 본부장한테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는지….”

“아뇨. 그런 이야기는 안 하시던데요?”

“그래?”

“네.”

“그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

“내가 반칙을 했거든.”

“…!”

“차장 승진 놓고 실적을 편법으로 끌어 올렸어. 뭐 말하는 건지 알지?”

“혹시….”

“응. 매장 실장들 다 불러놓고 접대하면서 실장 카드로 그달 매출을 미리 당겨서 선결제를 하게 만들었어. 딱 그달만 넘기면 됐거든. 바로 그달에 차장 승진 결판이 나는 거였단 말이야.”

“아…”

“반칙을 했는데도 밀렸어. 그런데 차장을 단 이후에도 그때 일을 가지고 한 번을 지적을 안 하는 거야.”

“….”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밀렸으면 쪽팔리지라도 않지. 그렇게 양심까지 팔아 가며 붙었는데도 결과가 그렇게 나와 버리니까 자존심이 상한 건 둘째 문제고 나 스스로 자괴감이 드는 거야.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처음 듣는 이야기야?”

“전혀 몰랐습니다.”

“아마 당시 박 이사님 귀에 그 이야기 들어갔었음 나 바로 짤렸을 거야. 그런 빚이 있다 보니… 그 양반 볼 때마다 나 스스로 떳떳해지지 못하는 거지. 그 양반이 날 밀어낸 게 아냐. 내가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던 거뿐이야.”

“기억나십니까? 몇 년 전에 본사 영업부에서 근무하실 때….”

“언제?”

“당시 차장님이 데리고 있었던 이 대리 때문에 저희 영업 5팀이랑 손 차장님이 맡고 계셨던 영업 2팀 사이에 잠시 문제가 있었잖습니까.”

“아….”

“그때 손 차장님이 저한테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죠. 겸손하지 마라.”

“내가 그런 소릴 했었나?”

“네.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박 이사님이 손 차장님께 해주셨던 말씀이었다시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든 한 번의 전성기는 찾아온다고 하셨죠. 그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겸손을 떤다고 그 기회를 놓치면 제2의 전성기는 없다고. 박 이사님이 이것저것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손 차장님한테 계속 토스를 해주는데 선배 팀장들 보기 민망해서 겸손을 떨다가 전성기 타이밍을 너무 빨리 놓쳐버리셨다고.”

“그랬지… 그랬었지.”

“그런데 바로 얼마 뒤에 당시 차장이셨던 장 본부장님하고 단둘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 본부장님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

“네가 잘났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만들어라. 그리고 네가 잘난 걸 스스로 알고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해라.”

“딱 그 양반다운 소리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팀장 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손 차장님과 장 본부장님이 당시 저한테 해주셨던 그 말들을 제 직장 생활 모토로 두고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

“얼핏 비슷한 내용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완전 다른, 그래서 그 두 조언을 같이 새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상황에 따라서 손 차장님이 해주셨던 조언을 써먹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 장 본부장님이 해주셨던 조언을 써먹다 보니까 그 두 내용이 묘하게 섞여서 제 이미지를 만들어주더라고요.”

“참 대단하다. 이래서 내가 공 부장을 인정하는 거야. 난 이젠 기억도 안 나는 그 이야기를 식사 자리에서 듣고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는 거 보면.”

“그만큼 저한테는 임팩트가 강했던 말이었거든요.”

“….”

“그런데, 차장님. 정말 제2의 전성기는 없는 걸까요?”

“…!”

“그것까지 직접 확인해 보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저랑 양 차장이 주제넘게도 손 차장님과 김 차장님을 양쪽에 놓고 저울질이라는 걸 해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

“아무래도 폴앤크루 영업부장 자리는 김 차장님보다는 손 차장님이 맡아 나가 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훗….”

“본사에서 입사 후배 둘이서 버릇없게 그런 작당을 했다는 게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불쾌하긴. 공 부장은 내가 본사로 복귀하면 바로 내 직속 상사야. 부장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계산인 거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사로 복귀하지 말고 폴앤크루를 맡아 나가라? 하긴 지금 본사 영업부에 내가 갈 자리가 없긴 하겠다.”

“폴앤크루…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장 본부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김 차장님한테 맡겨놓으면 현상 유지는 하겠지만 큰 발전은 없을 거다. 하지만 손 차장님한테 맡겨 놓으면 무슨 사고를 어떻게 칠지 장 본부장님 본인도 기대가 된다…. 라고.”

“….”

“법인 생활 마치고 한국 복귀하실 때까지 폴앤크루 제대로 세팅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왜… 웃으십니까?”

“항상 회사는 개인보다 똑똑해. 보는 눈도 정확하고.”

“….”

“내가 장 본부장 그 양반한테 밀렸을 수밖에. 키워놓은 후배 퀄리티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폴앤크루 작가 컬렉션 만들어지면 리미티드 넘버 8번, 80번, 88번, 800번, 808번, 888번. 그리고 6번, 60번, 66번, 600번, 606번, 666번은 항상 우리 중국 법인 몫으로 따로 빼줘. 각 컬렉션별로. 중국인들이 환장을 하는 번호거든.”

“….”

“왜? 안 돼? 나 사실 상무님 컬렉션만 보면 안 하고 싶어. 무명 아티스트들의 작품으로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이 인상 깊어서 진심으로 덤벼 볼까… 하는 중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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