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본사가 해줘야 하는 게 뭡니까?
안 차장이 서둘러 재킷을 챙겨 입으며 내 자리로 왔다.
“창고에서 사고가 난 거 같습니다.”
“통화하시는 내용 들었습니다. 민규… 가 다친 겁니까?”
내 말에 안 차장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 아프게 생겼다.
민규가 다친 게 맞냐고 물어보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만큼, 그런 희망을 가지는 나 자신이 징그러워질 만큼 민규가 다친 건 아니길 바랐다.
“저 지금 병원으로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많이 다쳤다고 합니까?”
“팔레트에 깔렸다고 합니다.”
“아, 씨… 조심 좀 하지, 진짜….”
어떤 장면인지 대충 상상이 가니까 더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거 같았다.
“어떤 팔레트에….”
“남성화라고 합니다.”
최악이다.
가장 무거운 팔레트에 깔린 거다.
패션 컨트롤 기업의 영업부.
우린 뭐든 다 하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브랜드를 컨택해서 그 브랜드가 매장에 깔리고, 그래서 판매가 되고 남은 쌓인 재고들을 떨어내는 작업에까지 모두 관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자체 생산 라인이 갖춰져 있고, 거기서 생산된 자체 제품을 유통시키는 기업들은 그나마 분업이라는 게 가능할 거다.
하지만 시즌에 따라 계속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고, 특히 홍성처럼 자체 브랜드가 아닌 해외 명품 브랜드들을 유통시키는 컨트롤 기업에선 사실상 분업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
분업이 오히려 더 많은 업무를 생산해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다른 산업군 기업들에 비해 영업부의 맨파워가 많을 수밖에 없고, 또 타 부서에 비해 강한 파워를 부여받을 수도 있는 거다.
보통 자체 생산 라인을 갖추고 있는 기업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통 과정에서 오피스가 움직일 이유가 없다.
오피스의 주문대로 생산 현장과 창고 현장이 검수를 해서 유통을 시키면 되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취급하는 브랜드의 종류가 너무 많고, 또 각 브랜드별로 컬렉션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우리 같은 경우는 검수를 창고 직원들에게 맡길 수가 없다.
당장 영업부 안에서도 자기들이 컨트롤하는 브랜드가 아니면 바로 옆 팀의 브랜드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든데, 그 많은 브랜드, 시즌별로 새롭게 나오는 컬렉션들을 무슨 수로 패션 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창고 직원들에게 숙지를 시켜서 검수를 맡기겠나.
이건 아무리 컬렉션별로 고유의 레퍼런스 넘버와 시리얼 넘버가 있다고 해도, 거래처 쪽에서 실수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또 인보이스가 섞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해당 브랜드를 컨트롤하는 영업부 직원이 직접 가서 검수를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꼼꼼하지 못한 이탈리아 쪽에서 배송상의 실수가 많이 나온다.
특히 브랜드 본사가 아닌 1차 벤더 역할을 하는 만토바 쪽에서 만들어내는 실수는 치명적일 만큼 많다.
그 실수가 중간에서 아무런 확인도 이뤄지지 않고 매장으로 바로 풀리게 되면, 결국 이탈리아 쪽의 실수는 영업부의 실수가 되는 거고.
이건 비단 홍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컨트롤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우선 장 팀장 쪽 맨파워를 빼서 창고에 보내놓겠습니다. 늦어도 오늘 중으로 코드 뽑아내야 하는 것들이라… 다른 브랜드들 바코딩 작업도 밀려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안 차장님은요?”
“전 병원 가서 애 상태부터 확인하고 창고로 가겠습니다.”
웃음기가 쫙 빠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안 차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계산이 정확했다.
난 곧바로 박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인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보고했다.
-아니, 뭐 도대체 일을 어떻게 시켰길래 팔레트에 깔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창고에 보냈냐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 반응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욕이 목 끝까지 치솟는 순간.
누구는 사고가 날 줄 알았나.
말 그대로 사고 아닌가.
이미 터진 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져 책임을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럴 거면 미리 맨파워라도 충분하게 챙겨주던지.
우린 뭐 생각이 없어서 생신입을 현장에 투입시켰겠나.
우린 뭐 사고를 내는 게 좋아서 그 사고를 기다리고 있었겠나.
없는 맨파워에 어떻게든 꾸역꾸역 일을 쳐내고 있다는 거 뻔히 다 알 거면서…. 이럴 땐 같은 편이 더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한다면 몰라도 누구보다 영업부의 형편을 잘 아는 박 이사가 그런 소릴 하니까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많이 다쳤대?
“아직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안 차장이 조금 전에 병원으로 갔습니다.”
-일단 알았어. 하아, 씨… 이걸 어떻게 해야 돼?
“상무님께는… 제가 보고드릴까요?”
-너한테 욕하고 위로부터 욕 얻어먹는 게 내 역할이야.
“…!”
-왜 내 역할까지 벌써부터 네가 하려고 해? 공 부장 넌 현장만 컨트롤해.
“네.”
-일단 알았다. 그럼 현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장 팀장이 커버 쳐 주기로 했습니다. 박 대리가 직원들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다 붙여. 다 달라붙어서 치우면 금방이잖아. 사무실에서 놀고 있는 직원들 다 보내. 일반 케이스도 아니고 사람이 팔레트에 깔렸는데 팀별 업무가 뭐 그렇게 중요해?
“알겠습니다.”
과연 사장 아들이었다.
민규의 부상으로 인해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장 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의 전화가 이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는 그가 영업부 차장이었던 시절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상무님께서 지금 현장에 같이 가 보자고 하시네.
“창고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그때 난 살짝 겁을 먹고 있었다.
민규의 부상에 부서장으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내가 홍성을 자신감 있게 다니고 있다는 것과는 약간 별개의 문제였다.
-응. 공 부장도 준비해. 내가 상무님 모시고 갈 테니까 공 부장은 따로 오고.
“왜….”
-응?
“병원으로 먼저 안 가시고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그냥 사고 난 현장에 가보자는 말씀만 있으셨어.
“하아… 네, 알겠습니다. 분위기 안 좋죠?”
-좋을 수가 있겠냐?
난 우선 장향은을 시켜서 박기태와 다른 인원들을 현장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창고에 전화를 걸어서 해당 사고가 날 당시에 지게차가 운행 중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해당 CCTV는 손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팔레트에 깔렸다고 했다.
창고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경험상 당시 사고 장면을 상상해 보니 상당히 아찔했다.
팔레트에 깔렸다는 말은 팔레트가 이 층으로 쌓여 있었다는 말이다.
보통 한 팔레트에 박스가 서른 개 정도 올라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박스는 신발 한 켤레가 들어가 있는 작은 박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신발 사십 켤레가 들어가 있는 큰 박스를 말하는 거다.
남성화가 어디 좀 무겁나.
그런 큰 박스 서른 개 정도가 래핑 기계를 통해 무너지지 않도록 고정이 되어 한 팔레트에 실어진다.
무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부피만 놓고 봐도 여성 가방 팔레트에 비해 상당히 크다.
그래서 본사는 창고에 의류나 가방이 아닌 신발, 그중에서도 남성화 같은 경우는 이 층으로 쌓지 말아 달라고 주문을 한다.
하지만 그런 주문이 현장에서 제대로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창고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지난 몇 년 사이 만토바를 비롯해 링겐의 물건까지 대량 컨트롤을 하고 있다 보니 자리가 많이 부족한 게 사실.
한정된 공간에 계속 제품들을 밀어 넣고 있다 보니 현장에서도 본사가 내려주는 지침을 백 퍼센트 다 따를 수가 없는 게 사실이고,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전수칙을 강조할 수가 없는 형편 속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네, 안 차장님.
창고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민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안 차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팔레트가… 등으로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하아….”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래핑을 벗겨놓은 상태에서 떨어지다 보니 무너지면서 박스들이 분산이 됐던 거 같아요.
“괜찮습니까?”
-어깨 쪽으로 팔레트에 짓눌려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갈비뼈 두 대가 나갔습니다.
“하아….”
-등으로 떨어졌을 때 그냥 그대로 깔렸어야 됐는데, 버텼던 모양입니다.
“그 상황에서 깔리는 게 맞다는 걸 민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네.
“공간이 협소했습니까? 이 층으로 쌓았어야 했을 정도로?”
-나크리스 신상이 밀려 있는 상황이었답니다. 원래라면 어제 정리를 다 끝내고 오늘 바로 나크리스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줬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됐죠. 서로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사고가 났던 거 같습니다.
“지금 상무님도 장 본부장님이랑 같이 창고 현장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네.
“아마 사고 현장 확인하시고 바로 병원으로 가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안 차장을 통해 민규의 상태를 확인하고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장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민규의 부상 정도를 보고했다.
-일단 알았어. 창고에서 보자.
스피커 폰으로 나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상무님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그리고 창고에서 만난 상무님과 장 본부장.
상무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식어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한 얼굴.
저런 얼굴을 처음 봤기에, 난 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CCTV 한번 봅시다.”
상무님의 말에 창고 책임자가 쩔쩔매며 사무실 안으로 상무님을 모셨다.
그리고 난 장 본부장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고 장면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마음이 급해 보이는 민규.
커터칼로 팔레트 통째 래핑이 되어 있는 걸 찢는 손길에 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박스 하나를 들고 내려오던 중 와르르 쏟아지는 박스 더미에 그대로 깔려버렸다.
스르륵 밀려서 떨어지는 팔레트에 깔리는 게 치명타였다.
“….”
상무님은 말씀이 없으셨고, 덩달아 사무실 안의 공기는 얼어갔다.
쩌저적… 하고 살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CCTV 모니터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상무님이 물으셨다.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고가 나는 겁니까?”
나와 장 본부장, 그리고 창고 책임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상무님.
우린 고개만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
“어째서 이런 사고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보고가 되는 겁니까?”
“…?”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디테일하게 보고가 되는 게 정상이죠?”
난 상무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또 이런 사고가 나면 상무인 저는 사고 현장보다는 병원으로 바로 가서 직원 상태부터 살피는 게 맞는 거죠?”
“…네.”
“그런데 그동안 우린 왜 그 당연한 걸 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현장에서 일하다가 홍성 직원이 부상을 당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텐데… 어째서 저는 이런 직접적인 보고를 오늘 처음 받았을까요?”
“…!”
“본부장님.”
“네.”
“본부장님은 여기에 남아서 창고장님과 같이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세요. 장소가 협소하면 창고 부지를 새로 매입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면 대형 선반이라도 설치를 해서 공간을 확보하든지…. 본사에서 현장을 위해 해줘야 하는 게 뭡니까? 그리고 도대체 창고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 왜 아무런 건의도 하지 않았던 겁니까?”
“….”
“했는데, 중간에서 짬이 됐던 겁니까?”
“….”
“공 부장님.”
“네.”
“저랑 같이 병원에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