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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14화 (214/325)

# 214

내 호의에 넌 성의라도 보여라

만약 회사가 아닌 밖에서 만났더라면 안 차장은 분명 나와 좋은 친구가 됐을 사람이다.

그것도 회사에서와는 달리 내가 더 애를 쓰고 더 많이 좋아하는 친구.

비단 나뿐만 아니라 안 차장은 어느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좋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그냥 사람 자체가 괜찮다.

안 차장은 거의 모든 술자리에서 가급적 자신이 먼저 계산을 하려고 하고, 또 어딜 갔다 올 때마다 꼭 주위 사람들의 선물을 챙기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안 차장이 그러는 이유를 알고 나면 틀림없이 그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또 거부감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안 차장에게 중국이라는 나라는 대충 이런 나라였던 거 같다.

젊었을 때 원없이 놀아 봐서 더 이상 노는 것에 미련을 남지 않게 도와준 나라.

안 차장의 부모님은 중국 개방 초창기에 한국에서 하시던 사업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넘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료 사업으로 무척 큰 돈을 버셨다.

안 차장에게 들은 말인데, 당시 중국에서 비료 사업과 같은 국가적인 사업을 개인이 따내기 위해선 어지간한 꽌시로는 힘이 들고, 또 그걸 외국인이 따낸다는 건 불가능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안 차장의 부모님은 비록 동업의 성격이 짙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꽌시의 도움으로 그 사업에 돈을 투자할 수 있었고, 결국 큰돈을 버는 데 성공을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난징에(뭘 생산하는 공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형 공장을 매입하셨다고 한다.

안 차장의 학창 시절은 비록 언어와 문화가 다른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정서적인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유로운 생활은 곧 안 차장에게 자신감이라는 무기를 선물해 주었으며, 그 자신감으로 그리 힘들지 않게 언어라는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걸로 봐진다.

안 차장에게 중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안 차장은 베이징 대학이라는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부를 잘할 필요가 크게 없었다고 한다.

외국인인데 중국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할 수 있었으니 한국으로 따지면 특별 전형 같은 걸로 베이징 대학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

졸업을 하기 위해선 한국의 대학들과는 달리 대학인데도 논문 같은 걸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물론 안 차장은 공부에 큰 취미가 없었고, 학교는 그냥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을 거다.

2학년까지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군대에 입대를 했고, 전역 후엔 베이징이 아닌 상하이로 가서 상하이 교통대학에 다시 입학을 했다.

상하이 교통대학 역시 베이징 대학만큼은 아니지만 꽤 명문대에 속한다고 한다.

그때부터 안 차장은 정신을 차리고 학업에 집중을 했고, 다행히도 졸업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안 차장은 베이징과 상하이 양쪽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비록 베이징 대학을 끝까지 다녀서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전역 후 상하이로 옮긴 이후에도 베이징 대학을 다닐 당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들이 상하이에 놀러 올 일이 있거나, 혹은 안 차장이 베이징에 놀러 갈 일이 있으면 꼭 만나면서 그 우정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베이징에 있는 친구들과 상하이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을 서로 소개시켜 주기도 했고, 그와 비슷하게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기도 했다고 한다.

안 차장의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는 그때도 그렇고 아직까지 중국 여자들에게 한국 남자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한국 남자의 환상 같은 게 그들에게 있다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특히 안 차장처럼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딱 봐도 한국 사람처럼 생긴 한국 남자들은 인기가 무척 높다고.

그러다 보니 성격 좋고 통이 큰 안 차장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중국인 친구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구들 대부분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안 차장과 수준이 비슷한, 큰 사업을 하는 집안의 자제들, 공산당 고위 당원의 자제들, 흔히 말해 푸얼다이(재벌 2세), 꽌얼다이(권력 2세)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보다 결혼 적령기가 많이 빠른 중국이다 보니, 그의 중국 친구들 대부분은 이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그 친구들의 배우자들 역시 이젠 자신의 친구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끼리끼리 만나서 하는 게 결혼 아니겠나.

안 차장의 중국 인맥은 홍성에 입사를 하고 센젠 생활을 할 때에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었다.

중국은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형제의 개념이 무척 강하다고 한다.

베이징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달리 상하이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은 안 차장이 군대 전역 후 사귄 친구들이라 하나같이 안 차장을 형, 오빠라고 부르는데, 한국처럼 표현만 형, 오빠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친가족처럼 대해 준다고 한다.

그게 중국의 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중국의 문화를 너무 잘 받아들이고 있는 안 차장이었고.

비록 지금은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안 차장과 그의 인맥들의 관계는 무척이나 끈끈한 거 같았다.

안 차장은 명절 때마다 친구 자식들의 홍빠오(용돈)를 잊지 않고 스마트폰 결제로 보내주고 있었고, 그 답례로 그의 중국 친구들은 그가 평소 중국에서 즐겨 먹었던 각종 과자와 술 같은 걸 택배로 보내주고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부모님 세대의 구식 문화지만, 어느 정도 재력이 뒷받침되고 또 여유가 있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구식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안 차장은 많은 친구들을 얻기 전, 청소년기에 가족부터 잃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친구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사업이 말도 안 되게 커지면서 가정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외도를 하기 시작하셨고, 그런 아버지의 외도 앞에 어머니는 자식보다 돈을 더 먼저 챙기셨다고 한다.

안 차장이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외국에서 자신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보여준 무책임한 모습은 고스란히 안 차장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그가 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떨어져서 살고 싶었다고.

평생 안 보고 살 수는 없겠지만 떨어져 살고 있어서 편하다고.

예전에 내가 지나가는 말로 어떻게 매일같이 회사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냐며, 그렇게 외로우면 연애를 하든지, 그게 힘들 것 같으면 집에 고양이라도 한 마리 키워 보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안 차장은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책임질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고, 또 뜻이 담긴 말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안 차장의 집안 스토리를 본인 입을 통해 듣게 되니 앞으로는 장난으로라도 연애를 하라거나 언제 장가를 갈 거냐는 의미 없는 질문 같은 건 안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또 다른 의미로 회사 출근이 즐거운 사람.

나와는 또 다른 의미의 즐거움을 회사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

그런 안 차장에게 민규의 존재는 그저 새로 들어온 귀여운 신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안 차장은 진심을 다해서 민규를 가르쳤고, 또 혼을 냈다.

“서렌더 비엘을 모른다고?”

“….”

“아니 어떻게 컨트롤 기업에 입사를 한 놈이 서렌더 비엘이 뭔지도 모를 수가 있어? 거짓말이지?”

“….”

“농담이지? 농담이라고 해라, 좋은 말 할 때.”

“죄, 죄송합니다.”

“진짜 몰라? 야, 낙하산.”

“네, 차장님.”

“이놈 봐라? 그냥 웃자고 낙하산이라고 불렀는데 진짜 낙하산이었어? 아니 어떻게 서렌더 비엘도 모르면서 한성 공채에 붙었어?”

“….”

“야 인마, 우리가 하는 일을 굳이 분류를 하자면 우린 패션 쪽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무역 쪽이야. 근데 어떻게 서렌더 비엘이 뭔지를 몰라? 너 그냥 비엘은 뭔지 아냐?”

“비엘….”

“괜찮아. 혼내는 거 아냐. 모를 수도 있지. 절대 몰라선 안 되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다고 어쩌겠어. 내가 널 죽일 수는 없는 거 아냐. 비엘만 설명해. 그럼 오늘은 그냥 통과시켜 준다.”

“….”

“정확하게 설명 못 해도 돼. 시험 치는 거 아니잖아. 그냥 아는 만큼만 설명해 봐.”

“….”

“후우… 아니, 한성 걔네들은 면접 볼 때 그런 거 안 물어봐? 그냥 패션 관련해서만 묻고 땡이었어?”

안 차장은 들고 있던 플라스틱 자로 자신의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누구보다 업무 쳐내는 속도가 빠른 안 차장.

팀장, 대리들이 있음에도 안 차장은 자신의 업무를 빠르게 끝내놓고 민규의 교육을 직접 맡아서 했다.

“너 이거 내일까지 다 숙지해서 나한테 다시 가져와.”

“네.”

“오늘까지는 내가 웃는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너의 이 심각함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는 거야. 내가 보여주는 호의에 넌 성의라도 보여라.”

“….”

“내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뭔가에 임할 때엔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야. 그런데 네가 여기서 그 정도 성의도 안 보이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이 악마가 될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네.”

“다들 목숨 걸고 공부해서 입사했고, 입사 후엔 목숨 걸고 출근하고 있다. 설렁설렁 할 생각이면 빨리 말해. 우린 포기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냐. 어? 열심히 할 생각도 없으면서 포기까지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뿐이지.”

“….”

“네가 빨리 말해줘야 내가 널 그만큼 빨리 포기하고 너한테 쏟을 정신으로 다른 놈을 키울 거 아냐. 너도 요 며칠 봐서 알겠지만, 우리 영업부 맨파워 상당히 부족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믿어 본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안 차장은 최 팀장을 시켜서 민규를 인천 창고로 보냈다.

그곳에서 며칠에 걸쳐 중국으로 센딩하게 될 만토바 제품들의 코드 따는 법과 바코딩 작업을 가르쳤다.

“너 그 손가락은 또 왜 그러냐?”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 아프다.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왜 그러냐고.”

“창고에서 박스 정리하다… 박스 끝에 살짝 베였습니다.”

“참…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에이포지에 베이는 놈은 봤어도 신발 박스에 베이는 놈은 또 처음 보겠네. 일 못 하는 거 그렇게 티 내는 것도 능력이다, 그지?”

“…죄송합니다.”

“밴드는 왜 안 발랐어?”

“괜찮습니다.”

“누가 네 손 걱정해서 그래? 그렇게 찢어진 손으로 신발 박스 만지다가 박스에 피라도 묻으면 어쩔 건데? 그 피가 지워나 져?”

“…!”

“장 팀장.”

“네, 차장님.”

“혹시 대일밴드 같은 거 있어요?”

“네, 잠시만요.”

장향은에게 받은 밴드로 직접 민규의 베인 손가락을 감아주는 안 차장.

인천 창고에서 복귀한 민규는 더 이상 출근 첫날 때 보여줬던 것처럼 깔끔한 복장 차림이 아니었다.

정장 여기저기 먼저가 뽀얗게 묻어 있었고, 제품을 발라 고정시킨 머리엔 기름기가 좔좔 흘렀으며 넥타이 매듭은 볼품없이 늘어져 있었다.

거기다 신고 있는 구두엔 그 어떤 광도 나지 않았다.

패션 상사의 생신입 모습 그 자체였다.

“창고 갈 때엔 항상 긴장해라. 아무리 거기서 하는 일 자체가 단순 업무, 단순 노동의 반복이라도 창고는 창고다. 사무실하고는 달라. 사고 나면 크게 난다. 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밥은 먹었냐?”

“네.”

“최 팀장이 내일도 창고로 바로 출근하래?”

“네, 내일까지만 가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최 팀장 좀 도와줘라. 이틀이면 끝날 일을 너 데리고 가서 삼 일 동안 하고 있다. 이게 지금 될 일이냐?”

“…죄송합니다.”

“알았어. 퇴근해라. 내일은 회사로 복귀할 필요 없어. 창고에서 바로 퇴근해.”

“네.”

“뭐 해, 퇴근하라니까 안 가고….”

“아닙니다. 기다렸다가 차장님이 주시는 시험 통과하고 그렇게 퇴근하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피곤해서 안 되겠다. 오늘은 그냥 패스. 얼른 퇴근해.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가라. 괜히 딴 데로 빠지지 말고. 오늘 다 못 나른 거 내일 마저 날라야 한다며? 많이 남았냐?”

“아닙니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수고했다.”

“…네.”

그런데 다음 날… 인천 창고에서 대형 사고가 터져버린다.

“뭐!”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근무 중에 갑자기 안 차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통화 중이던 스마트폰을 귀에 붙인 채 고함을 꽥 내질렀다.

“그게 왜 무너져! 아니 도대체 뭘 어떻게 쌓았길래 그게 무너져?”

“…?”

다들 창고에서 무슨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 안 차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애 많이 다쳤어? 뭐 얼마나 찢어졌는데? 하아… 최 팀장 넌? 넌 괜찮아? 알았어. 일단 알았으니까 병원 주소 하나 찍어줘. 나 지금 바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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