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스스로 극복해야 되는 부분
사람을 상대로 이런 비유를 들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의 복귀는 내 입장에서 그동안 차곡차곡 부어놓았던 적금이 만기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긴 거다.
만기가 됐다고 해서 그 돈을 바로 어딘가에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부장을 달고 부서를 이끌어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직원들 개개인의 역량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직원들 개개인의 역량을 체크하고 적절한 포지션닝을 시켜주는 게 부장의 진짜 역할이 아닌가 싶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해주고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아직 자신의 몫을 해주기에 시간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친구는 지금쯤이면 마땅히 자신의 몫을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 해주고 있기도 한다.
하지만 반면 혼자서 2, 3인분의 몫을 거뜬히 쳐내 주는 친구들도 분명 있다.
대리급에서 이런 친구들이 많이 나와주면 참 좋은데 홍성 영업부의 성장이 급했던 만큼, 대리 역할로 허리를 단단히 받쳐줘야 하는 인물들 중 아직 믿을 만한 친구가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어지간하면 다 팀장으로 승진이 된 상태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지혜는 조만간 혼자 2, 3인분의 몫을 해줄 예비 에이스 대리였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일이라는 건 하다 보면 자기가 늘기 싫어도 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어디 뭐 특수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업계는 아니지 않나.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일을 하는 게 미친 듯이 좋아서 매사 신이 나 있는 상태, 그리고 그 에너지를 다른 팀원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였다.
반대로 현재 영업 마케팅부는 좋은 에너지가 아닌 패배 의식에 찌든 바이러스가 전염되고 있는 중이었고.
“이지혜 씨 저 좀 봅시다.”
이지혜의 본사 복귀 3일째.
아침 출근과 동시에 이지혜를 내 자리로 불렀다.
“네, 부장님.”
“다른 게 아니라 본부장님한테 어제 연락이 왔더라고.”
“본부장님이라면 어디 본부장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디긴 어디야, 파리지.”
“아,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으으음… 그런 게 아니라 지혜 씨 후임은 언제 보내주느냐고 계속 물어보시네.”
이지혜 같은 경우는 정확하게 딱 1년을 다 채우고 본사로 복귀한 게 아니었다.
프랑스 노동법에 의해 이지혜는 4주의 휴가를 써야만 한다.
이지혜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나라 노동법 자체가 그렇다고 한다.
1년에 4주의 유급휴가.
물론 그 휴가를 돈으로 받아도 되지만, 본사 복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지혜는 남들 다 휴가를 떠날 때 그 휴가를 아껴두고 있다가 파견 근무 마지막 달에 한 방에 몰아서 사용하고 한국으로 복귀를 한 거다.
물론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이지혜는 다음 달에 프랑스 법인에서 한 달 치의 월급을 더 받기만 하면 되는 거다.
“장 팀장 팀의 보람 씨가 가기로 된 건 알고 있죠?”
“네, 안 그래도 어제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거기 생활에 필요한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해 줬습니다.”
“아… 벌써 해줬어요?”
“먼저 찾아와서 파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부터 어떤 업무를 주로 보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어제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 줬습니다.”
“어떨 거 같아요?”
“보람 씨요?”
“응.”
“제가 어디 누굴 평가할 자격이나 되나요. 그냥… 애살은 대단해 보였어요.”
“다시 본사로 복귀할 거 같아요?”
“하하하….”
이지혜는 민망한 미소를 흘려놓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장향은의 사무실 쪽을 몰래 눈치 본 다음 어깨를 한번 들었다 놓았다.
“거기가 본인 적성에 맞으면 좀 더 연장을 하지 않을까요?”
“지혜 씨는 왜 연장 안 하고 바로 왔어요?”
“저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기회 좋았잖아. 본부장님도 지혜 씨 없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잡으셨던 거로 아는데… 휴가도 거의 한 달 가까이 되고, 또 파견 근무 수당에 생활비 일부 지원, 숙소비 지원… 사실 조건만 놓고 보면 본사 근무보다 훨씬 더 괜찮지 않나?”
“꼭 외국 생활을 한다고 해서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뜬금없이 던진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튀어나오는 이지혜의 대답은 너무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만큼 파견 근무를 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적성이나 외국 생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봤다는 뜻이겠지.
“오히려 저는 거기서 파견 근무 1년을 하는 동안 홍성 본사에서보다 더 좁은 세상 속에서 단순 업무만 했던 거 같아요. 이리저리 현지에 적응하는 데 몇 달을 날려버리고, 또 업무 적응하고 시스템 잡는데 몇 달…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절반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던데… 새로운 환경에서 리프레시를 해봤다는 점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1년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더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안 들더라고요.”
“아깝지 않나?”
“뭐가요?”
“언어에도 욕심이 있었잖아요. 처음 파견 근무 확정되고 가 있는 동안 언어를 좀 제대로 익혀 오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파견 근무 생활 첫 달 때 제가 크게 느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뭐요?”
“아무리 언어가 자유로워져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절대 말이 안 통하겠다… 하는 걸요.”
“크흐… 명언 나오네.”
“사실 파견 나가 있는 동안 현지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가 됐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말 통하는 본사 파견 근무자들끼리 문제가 계속 일어나더라고요. 그것도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그것만큼 피곤한 게 없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덕에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는 걸 제대로 배우고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센터 업무 보면서 그 부분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요. 물론 장 팀장님처럼 능수능란하게 여러 가지 언어를 다 구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게 안 된다고 해서 센터 업무를 못 보는 건 아니란 걸 이번에 확실히 배우고 왔습니다.”
“다 배웠네.”
“그런데 부장님.”
“네.”
“혹시…”
이지혜는 다시 한번 주위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조심히 말을 이었다.
“팀별 회식 같은 건 이제 안 하나요?”
“왜요?”
“아직 팀장님이 그 부분에 대해 말씀이 없으셔서…”
“지혜 씨 왔는데 아직 환영 회식을 안 해줬구나?”
“아니 꼭 회식을 해달라는 게 아니고…”
“차 팀장이 별말 안 하던가요?”
“아뇨,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고요.”
“….”
자신이 가진 공황장애를 다른 팀원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차 팀장.
그리고 그런 차 팀장은 지금 술을 멀리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공황장애에 술은 쥐약이라고 한다.
난 이지혜에게 차 팀장의 상태를 말해주지 못했다.
그저 알아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한번 유도해 보라는 정도로만 이지혜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양 차장이 기획 1팀의 새로운 편집샵 론칭 기획서를 들고 날 찾아왔다.
“제가 봤을 땐 괜찮은 거 같은데… 일단 부장님이 한번 보시고 결정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차 팀장은 좀 어때요?”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지금도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흐음…”
“본인은 참 힘들고 괴롭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선 사람이 너무 예민해서 저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직장 생활 하는 사람 치고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 팀장이 많이 예민해요?”
“그런 편이죠.”
“일단 알겠습니다. 천천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기획서를 훑어보는 동안, 아… 이건 차 팀장이 만든 게 아니라 이지혜가 만든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기획안에 보충 자료 첨부시키는 순서가 너무 눈에 익었다.
이건 내 스타일이니까.
새로운 편집샵 론칭의 중요성보다 현재 홍성이 하지 않고 있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그리고 그 사업을 우리가 해야 하는 당위성을 업계 타 기업들의 매출을 근거로 제시했고, 그 사업에 필요한 프로젝트 비용보다 그 사업에 꼭 섭외를 해야 하는 브랜드들을 정확하게 나열해서 그 브랜드들을 어떻게 섭외할 것인지 방법을 먼저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해당 브랜드들을 섭외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량을 주문해야 하며, 또 현재 만토바 쪽에서 어느 정도 물량을 컨사인먼트로 받아서 매장에 깔 수 있을지를 덧붙여 놓았다.
여기서 재무리스크팀과 함께 뽑은 초기 투자 대비 손익 분기점이 들어가 있는 것이 이 기획안 초안이 이지혜의 작품이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네, 부장님.
난 기획안을 재차 확인한 다음 양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네요. 이거 디테일만 다시 잡아서 프레젠테이션 준비시키세요. 기획 1팀 상반기 프로젝트는 이걸로 밀고 나가면 되겠습니다.”
-네 바로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차 팀장… 진짜 괜찮은 거 맞죠?”
-뭐가…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때 우리 앞에서도 그렇게 발작을 일으켰는데… 전무님 계신 자리에선 압박감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저도 아직 제 첫 임원 상대 프레젠테이션 생각하면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해야죠.
“그냥 그 프레젠테이션만 양 차장님이 대신 해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좀 그런가?”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해봤는데, 차 팀장이 하도록 만드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돕는 건 도와주는 게 아닐 수가 있습니다. 제가 그 프레젠테이션 대신 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요.
“흐음…”
-팀장이 하는 일 자체가 단독 프로젝트 만들어 끌고 가면서 팀 매출 올리는 자리인데, 아닌 말로 이 프로젝트도 따지고 보면 부장님이 소스 다 던져주고 한번 발전시켜 보라고 한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서 프레젠테이션까지 제가 해주면 차 팀장이 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뭘 또 그렇게 냉정하게 따지고 들어가십니까. 상황이 상황 아닙니까. 맞춰가는 거죠.”
-차 팀장이 극복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걸 못 하면… 안타깝지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한테 자리를 양보하라고밖에 못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
-처음 저한테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을 때 제가 그럼 다른 부서로 트랜스퍼를 시켜줄까 하고 물어봤었거든요. 근데 자기는 더 이상 부서를 옮기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영업부 일이 좋다고 합니다. 그럼 자기가 스스로 극복을 해야죠. 저는 차 팀장 본인이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충분한 기회를 줘보고 싶은 거고… 그런데 그렇게 해줘도 안 되면 어쩌겠습니까. 안타깝지만 부서 이동을 다시 한번 권하는 수밖에요.
맞는 말이었다.
냉정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차장의 위치에선 양 차장처럼 말을 하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양 차장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뭐… 알겠습니다. 준비 제대로 시키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프레젠테이션 당일 아침이었다.
차 팀장이 프레젠테이션 중간에 실수를 하게 될 것이 불안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오히려 그런 불안을 안고 프레젠테이션을 강행해야 하는 그의 입장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공황장애라는 게 내 입장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었기에, 그 발작을 할 당시 어떤 느낌일지 전혀 짐작을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10시 20분.
파티션 너머로 기획 1팀의 움직임을 힐긋거리며 살폈다.
차 팀장과 이지혜가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팀원들은 전쟁터로 떠나는 팀장과 대리를 향해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응원을 보냈다.
“저기, 차 팀장!”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제법 큰 목소리로 차 팀장을 불렀다.
차 팀장은 날 쳐다봤고, 난 그런 차 팀장을 향해 내 자리로 잠깐만 와 보라고 손짓했다.
“지금 올라가는 거예요? 너무 안 빠르나?
“컴퓨터 연결도 미리 좀 해놓고… 시작하기 전에 이 대리하고 마지막으로 발표 한 번만 더 맞춰 보려고요.”
“넥타이 좀 풀어 봐요.”
“네?”
“넥타이 좀 풀어 보라고. 발표하는 동안만 나랑 바꿔 맵시다.”
“….”
난 얼른 풀라고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며, 내가 하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기본적으로 임원진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같은 거 할 때엔 너무 고상한 컬러의 타이는 별로예요. 저희들보다 다들 이쪽 패션 업계 선배님들이시고, 그중에서도 뛰어나셔서 임원까지 다신 분들입니다.”
“…!”
“이런 사소한 타이 하나까지도 그분들 앞에 설 때엔 신경을 써야 돼요. 차 팀장이 주인공이면 안 되잖아. 프로젝트 내용이 주인공이어야지.”
“…네.”
“차 팀장은 그냥 소개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네.”
“그러니까 너무 돋보일 필요도 없고, 실수 안 하려고 긴장할 필요도 없어요. 샤넬이 왜 샤넬이에요?”
“…”
“매장 직원들이 아무리 말 잘하고 능수능란해도 브랜드가 별로면 안 사, 사람들이. 그런데 브랜드에 샤넬 로고가 딱 하나 박혀 있잖아요? 그럼 매장 직원들이 능수능란할 필요도 없고, 사라고 목숨 걸고 영업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사 가는 거야. 샤넬 로고 그거 하나 때문에.”
“네.”
“내가 봤을 때 차 팀장이 준비한 프로젝트는 샤넬이야. 안 사면 회사만 손해지, 안 그래요?”
“…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그냥 그렇게 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약은….”
“먹었습니다.”
“알았어요.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 위에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