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차, 차 팀장. 차 팀장
항상 퇴근 후에 강혜선을 기다리는 은행 앞 삼거리였다.
난 회사로부터 제공받은 따끈따끈한 신차의 내부 옵션들을 작동시켜 보며 강혜선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은행 뒷문 쪽에서 한 무리가 쏟아져 나왔고, 난 그곳에서 강혜선을 발견했다.
그녀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날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인도를 끼고 있었기에 클랙슨을 울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창을 내려 나 여기에 있다고 강혜선을 부르자니 고함을 질러야 할 만큼 거리가 있었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미처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을까 왔던 길을 뒤돌아보며 열심히 날 찾기 시작하는 강혜선의 모습을 훔쳐보는 게 오늘따라 유난히 재밌었다.
결국 난 강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건너와.”
-어느 쪽으로?
“지금 막 신호 바뀌었네. 건너와.”
-약국 앞이야? 없는데?
“아, 그냥 건너와.”
강혜선은 목을 길게 빼 날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결국 신호가 깜빡거리기 시작하자 종종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넜다.
-어딘데?
“약국 앞.”
-안 보이는데?
난 차창을 내려서 강혜선이 날 발견할 수 있도록 손을 흔들었다.
“여기.”
-어디?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데도 날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강혜선이었다.
“아, 여기 약국 앞에.”
-어?
마침내 나와 눈이 마주쳤고, 강혜선은 스마트폰을 가방 안으로 챙겨 넣으며 이게 뭔가 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건 또 뭐야? 누구 차야?”
“회사에서 주더라, 타라고.”
“왜?”
“오늘 승진 발표 날이라고 했잖아.”
강혜선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심 설레는지 미소가 번진 얼굴로 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앞으로 당신 차야?”
“회사 차지. 타 얼른.”
다행이다.
좋은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차에 올라서도 차 내부 여기저기를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걸 왜 주는 거야?”
“내가 좀 그런 사람이야.”
“당신만 타는 거야?”
“당신도 같이 타는 거야.”
“뭐야, 진짜… 완전 헐이잖아….”
“더 대박이 뭔지 알아?”
난 강혜선 앞으로 차량 유지에 사용할 수 있는 법인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서프라이즈… 내가 그동안 이거 숨기느라 입이 얼마나 간지러웠게. 우리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 차 뽑은 기념으로 드라이브 한번 해야지?”
“해야지. 오… 대박. 그랜저… 당신 이제 그랜저 타는 남자야?”
“아, 이제 이 정도는 타야지.”
“키키킥….”
“듣고 싶은 노래는?”
“아델.”
“크… 선곡 좋고.”
“오늘 당신 승진 턱은 내가 쏜다!”
“멘트 죽이고.”
정확한 영어 가사는 다 모르지만 그래도 멜로디는 아니까.
블루투스에 연결시킨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틀어놓고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차를 몰았다.
종로명가라고 나도 처음 가본 곳인데,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 여기는 최소 평균은 해주는 곳이다… 하는 기분이 드는 인테리어가 펼쳐졌다.
테이블 세팅부터 시작해서 식사 중인 손님들의 모습, 종업원들의 수준 정도만 봐도 고기 상태는 직접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식당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예상은 어지간하면 다 맞아떨어진다.
“오….”
특히 와사비가 예술이었다.
생와사비를 손님들이 찾을 때마다 바로바로 갈아서 내주는 집 같았다.
딱히 소금을 찍을 필요 없이 와사비만 살짝 찍어서 먹어도 될 정도로 고기 상태가 너무 완벽한 집이었다.
“소주 한잔 안 해도 돼?”
난 강혜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왜? 한잔해. 오늘 같은 날.”
“술 마시기 싫어서 양 팀장… 아니, 양 차장이 술 한잔 같이 하자는 거 억지로 거절하고 온 거야. 흔들리니까 유혹하지 마.”
“뭐 어때, 오늘 같은 날 마시는 거지.”
“괜찮아. 사이다면 충분해.”
내가 못 먹는 음식은 없어도 한자리에서 뭘 많이 먹는 스타일은 절대 아닌데, 꽃등심 4인분에 냉면 한 그릇을 나보다 더 양이 작은 강혜선과 함께 다 먹었다.
“냉면 이거는 진짜 당신만 한 젓가락 거들어 준다고 하면 한 그릇 더 시켜서 먹고 싶다. 어지간한 냉면 전문점보다 더 맛있네.”
“시켜.”
“더 먹을 수 있어?”
“아니, 난 지금 목까지 찼어.”
“혼자 한 그릇 다 못 먹어.”
“남기면 되지.”
“남길 거면 안 시키지. 그냥 수정과나 마실란다. 당신도 마실래?”
“난 진짜 지금 아무것도 못 먹어. 완전 풀.”
종업원에게 디저트로 수정과가 나오는지 물어봤다.
이런 집에 수정과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수정과 한 그릇을 부탁해놓고, 그 종업원에게 식사는 다 끝났으니 테이블 정리를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말했다.
종업원이 테이블 정리를 해주는 동안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강혜선에게 말했다.
“우리 회사 재무부장님 애가 이번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어.”
“근데?”
“올해 쉰둘인가? 그럴 거야, 아마. 사모님이랑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안 날걸? 그때 한번 회사 근처에서 뵌 적이 있는데 진짜 차이가 많이 나 봤자 다섯 살 정도? 그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날 거야.”
“…?”
“결혼하고 거의 10년 넘게 애가 안 생겼다더라고. 재무부장님 이야기 유명해, 우리 회사에서.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는 거 다 시도해 봤는데, 그래도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하고 있다가, 애가 생긴 거야. 병원까지 다니면서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도 안 되던 게,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생겨버린 거야. 애도 건강해. 잔병치레 한 번 한 적 없었다고 하시더라고.”
“흐음….”
“마음 편하게 가지자. 스트레스받을 거 하나 없어. 우리 결혼한 지 뭐 얼마나 된다고 벌써부터 스트레스를 받아?”
“….”
“나는 당신이 그 일로 스트레스받는 모습이 더 스트레스야. 편하게 생각하자. 응? 이건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아닌 말로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병원에선 아무 문제 없다고 하잖아. 문제가 있어도 요즘 의학 기술이 좀 좋아? 정 안 되면 그때 병원 가서 실험관을 하든 뭘 하든 하면 되잖아.”
“후우….”
“당신은 당신 나이가 걱정인 모양인데, 김 차장님 이야기 들어 보니까, 김 차장님 셋째 태어났을 때 산후조리원에 마흔 넘어 첫 출산 한 산모들이 널리고 널렸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 강혜선이 상상임신이라는 걸 했었다.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해본 건 아니었는데 아마 상상임신이 맞을 거다.
정상적으로 마법에 걸려야 하는 날이 이틀 정도 지났는데 마법에 걸리지 않으니까 자기 혼자 살짝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다 보니, 강혜선의 날짜가 지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런데 갑자기 속이 안 좋다고 하더니 저녁 먹은 걸 화장실에서 다 게워냈고, 다음 날 약국에서 테스트기를 구입해서 확인을 했었다.
그런데 이 테스트기가 참 애매한 게 한 줄은 정말 선명하게 나타났는데, 다른 한 줄이 보일랑 말랑 하는 거였다.
억지로 두 줄이라고 우기면 우길 수도 있었겠지만, 선명하게 나타난 줄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제품에 하자가 있거나 아님 원래 그렇게 자세히 보면 표시 정도는 보이는 선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예 안 보이는 게 아니다 보니 강혜선은 기대를 하기 시작했고.
그런데 다음 날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정확하게 확인을 해 봐야겠다고 하더니 그때 바로 마법에 걸려버린 거다.
사실 위로를 하기엔 나도 살짝 실망 아닌 실망을 했었고, 또 이게 과연 위로를 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거 같다.
나는 그냥 강혜선이 이 부분에 대해 좀 무덤덤하게 시간과 여유를 갖고 기다렸음 좋겠던데, 이게 또 여자의 감수성과 남자의 감수성이라는 게 다르다 보니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최근 들어 당신 갑자기 거기에 너무 집착을 하는 거 같아.”
“흐음….”
“그러지 마. 편하게 마음먹자, 편하게.”
“나도 생각은 당신이랑 같아. 편하게 생각하고 싶어. 근데 진짜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돼.”
“….”
“억지로 편하게 생각하는 게 더 스트레스야. 어떤 느낌인지 알지?”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뭐?”
“나도 시간이 필요해. 딱 1년만 그냥 편하게 지켜보자.”
“…?”
그때부터 난 강혜선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 그때 기억나? 왜 나 부장 승진 확정되고 갑자기 부담감 백배 돼서 혼자 스트레스받고 있었을 때. 뜬금없이 당신이 나한테 그랬었잖아. 차 새로 바꾸겠냐고.”
“아…”
“열심히 일만 하고, 또 그렇게 일해서 번 돈으로 가족들만 챙기는 내 모습이 보기 안쓰럽다고 말이야.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일만 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에게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했었지?”
“기억나.”
“당신 이야기 듣고 보니까 내가 정말 그렇게 살고 있더라고. 그렇게 살았더라고. 아마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지 않을까?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나한텐 가족이 전부인데.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질적인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보다, 지금 당장 이렇게 당신과 마주 보고 앉아서 나누고 있는 이 행복한 시간 자체가 선물이야. 그래서 딱히 뭔가 결핍을 못 느끼겠어.”
“….”
“좋은 남편이 되고 싶고, 착한 아들이 되고 싶고, 또 반듯한 사위가 되고 싶고… 다른 인간관계, 회사에서의 역할은 빼놓더라도… 갑자기 해야 할 역할들이 결혼 이전보다 배는 더 늘어버렸어.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
“애 갖고 싶어, 나도. 생기면 좋지. 나나 당신 나이가 더 이상 어린 나이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하나 낳아서 혼자 외롭게 크게 만드는 거보다는 조금 힘들더라도 둘을 낳아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의지하면서 크게 만들고 싶고. 둘째까지 낳을 생각이면 조금이라도 빨리 준비를 하는 게 맞다는 것도 알아. 근데 애 하나 태어나는 순간 우리 둘만 알콩달콩할 수 있는 젊은 시간은 완전히 끝이야. 다들 그러더라고. 나중에 애들 다 키우고 나서야 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그때쯤이면 나나 당신 나이 육십 넘어. 대학 공부까지는 시켜줘야 할 거 아냐. 안 징그러워? 그 전에 난 당신과 나, 아직은 젊을 때 우리 둘만의 젊은 추억도 좀 만들어 놓고 싶어.”
강혜선은 입술을 숨긴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금은 무조건 당신이랑 알콩달콩만 하고 싶은데, 사람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로 스트레스받느라 그 아까운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가방 하나 살래? 사줄까? 구두도 괜찮고.”
“진짜?”
“당연히 뻥이지.”
나도 안다.
내가 이렇게 백날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말을 해도 강혜선이 가지고 있을 스트레스는 절대 줄어들지 않을 거란 걸.
강혜선은 강한 사람이다.
강단이 있고, 또 긍정적인 사람이다.
이건 강혜선이 뭔가에 몰입이 심한 성격이라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점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님 아이 문제를 바라보는 남자 나이 서른일곱과 여자 나이 서른여섯의 차이점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 문제에 집착하는 강혜선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강혜선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고 담담한 내가 잘못된 거 같지도 않고.
가슴이 이해를 못 한다 뿐이지, 머리는 이미 강혜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난 강혜선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되겠지만, 최대한 그녀를 안심시키고 또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뒤 회사.
장담컨대 앞으로 내가 차 팀장과 홍성에서 함께 일을 하는 동안은 차 팀장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조건 계속 떠오를,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차, 차 팀장. 왜, 왜 그래요? 괜찮아요?”
“허억… 허억….”
“차 팀장, 차 팀장!”
양 차장과 영업 마케팅부에서 넘어온 나 팀장, 그리고 나와 차 팀장 이렇게 넷이서 소회의실을 하나 빌려 H.I 편집샵과 Kidshub의 아웃렛 쪽 푸시 전략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특히 영업 기획부로 팀장 승진과 함께 넘어온 나 팀장의 의욕은 대단했다.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는 명품 단독 브랜드들 같은 경우야 개별적인 푸시가 힘들지만, 홍성 브랜드의 편집샵들은 아웃렛 쪽을 푸시해서 이벤트를 따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걸 나 팀장이 설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양 차장이 차 팀장에게 H.I 편집샵과 Kidshub 외에 성인복 위주로 다른 명품 편집샵 브랜드를 하나 더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차 팀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꼭 급체한 사람처럼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았고, 내가 본능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 순간 차 팀장의 공황발작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