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사인해
-차량 관리 과장입니다.
“네, 과장님.”
-부장님 차량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아, 네….”
-오늘 점심시간 땐 제가 사장님 차량 정비 입고를 시키러 가야 해서….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나보다 10살 이상 많으신 분이다.
오다가다 마주친 적이 많기 때문에 얼굴은 알고 있지만, 그에게 과장이라는 타이틀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지하 주차장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간이 사무실.
말이 사무실이지 분할된 CCTV 모니터 두 대와 책상, 그 외에는 딱히 중요한 게 없는 일반 아파트 경비실 비슷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사실 난 이곳에 올 일이 아예 없었다.
임원 주차 공간 귀퉁이에 만들어져 있는 곳이다.
주차장 입출구와도 거리가 멀고 또 내가 자주 차를 세워놓는 주차 공간과는 거의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까지 들어올 일이 아예 없었다.
“누군가 했네.”
그 역시 내 얼굴을 기억한다는 투로 키 꾸러미를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근데… 부장… 이에요?”
“네, 이번에 승진했습니다.”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
난 그저 쑥스럽게 미소를 지었고, 그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키 꾸러미를 툭툭 손바닥 위에서 낮게 던졌다 받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자, 일단 이거 받으시고.”
그는 기본 차 키 하나를 내게 주며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올해 몇이요?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서른일곱입니다.”
“서른일곱에 부장이면… 아이고야, 출세했네.”
“경상도세요?”
“창원.”
“전 부산입니다.”
삐빅.
그의 사무실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앞으로 내가 타게 될 차가 세워져 있었다.
회색의 신형 그랜저.
얇은 체인에 꿰여 있는 차 키 꾸러미.
차 키 하나하나에 모두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영업부장이라는 견출지가 붙어있는 차 키로 그 차의 조수석 문을 연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조수석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든 서류들을 꺼내 하나하나 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평일 출퇴근 시간에야 내한테 연락하면 되는데, 혹시라도 주말이나 내가 휴가 가 있는 동안 차량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고가 나면 여기 이쪽으로 연락하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차는 항상 여기 세워놓고. 여기가 부장님 자리니까.”
“저도 여기다 주차를 합니까?
“그라믄?”
“여긴 임원 주차 공간 아닙니까?”
“그런 게 어딨노. 한데 모여 있어야 내가 관리가 수월하지.”
“아…”
“내가 출근하는 날은 매일 기본적으로 외부 세차하고 내부 청소기 한 번씩은 돌리거든요.”
“네.”
“부장님은 다른 거 신경 쓸 거 전혀 없어요. 그냥 차만 여기다 대놓으면 돼.”
기본급 연봉 1억 800만 원에 회사 차량 제공.
나의 부장 첫해 연봉 계약 조건이었다.
업계 평균 부장 첫해 연봉이 9천만 원 초반대인 걸로 안다.
이미 기본급 연봉만으로도 회사는 내게 업계 최고 초임 부장 대우를 해주고 있는 거였다.
물론 이 차량 제공이라는 게 영업이라는 특성상 완전 특혜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영업 차량이 아닌 임원 차량을 제공받았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어디선가 읽었다.
패션 매거진에서 읽었던 내용인지, 아님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에서 읽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디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한국어 자막에서 읽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어디선가 읽었다.
당당함과 오만함은 한 끗 차이라고.
그리고 난 그 당당함과 오만함의 사이에서 진심을 지키려면 바른 태도와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차장 때까지와는 달리 부장 연봉 협상은 인사부가 아닌 전무님의 사무실에서 그것도 전무님과의 일대일 면담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그때 난 그게 연봉협상 자리라는 걸 모르고 불려갔었다.
아마 알고 갔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두 달 전 연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내년 부장 승진 건으로 인사부에서 연락이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올해를 넘기고 내년에 연봉 협상 이야기가 나오려나… 하고 기다리고만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그냥 사인만 하지 않을 용기를 품고 있었다.
사실 말이 연봉 협상이지,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외국계 기업들도 특수한 부서가 아닌 다음에야 회사가 오퍼하는 조건에 그냥 사인을 하는 게 전부인 연봉 협상 아닌가.
박 이사와 장 부장까지 영업부에서 빠진 지금, 내 몸값이 곧 홍성 인터내셔널 안에서 영업부의 파워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이미 내가 욕심내도 될만한 조건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전무님의 직접적인 호출이 있었고, 난 아마도 모리엘츠 건이나 링겐 관련 아동 유아복 프로젝트 건으로 날 찾으시는 건 줄 알았다.
이미 내가 차고 나가게 될 영업부의 인사 조직도는 박 이사의 승인을 받고 인사부장과 함께 진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공 차장이 직접 공 차장 입으로 말해봐. 희망 조건.”
전무님 앞이라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는데, 또 전무님 앞이었기에 시원하게 지를 수 있었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만약 차장 승진 때처럼 인사부장과 마주 보고 연봉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인사부장의 연봉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
“괜찮아. 편하게 이야기해. 나도 공 차장이 어느 정도까지 기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거기에 맞춰서 조율이라는 걸 해볼 거 아냐.”
그리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이미 난 장 부장을 통해 회사가 내 부장 초임 연봉으로 업계 최고 대우를 해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태였으니까.
다만 내가 곧바로 대답을 못 했던 이유는 인사부장이 없는 그 자리가 내 연봉 협상 자리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전무님이었고.
“우선…”
우선이라는 전제 조건을 깔아놓고 희망 기본급을 말했다.
“기본급은 1억 800만 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1억 800만 원. 어떻게 되는 거지? 월 900씩 계산을 한 건가?”
“네.”
전무님은 내가 내 입으로 꺼낸 억 단위 연봉에 스스로 민망해할 겨를도 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 정도쯤이야… 하는 반응을 보이셨다.
“또.”
“차량을 제공받고 싶습니다.”
“차량… 지금 장 부장이 제공받는 차량이면 충분할 거고…”
“네.”
“또.”
그때부터 살짝 이상해지는 거지.
그렇게 맞춰주겠단 대답은 아직 안 하셨지만, 내가 부르는 조건마다 보여주시는 반응이 너무나 쉽고 시원시원하니까, 원래 생각하고 계셨던 조건들보다 내가 너무 낮게 부르고 있는 건가 하는… 괜히 손해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끝이야? 그거면 돼?”
아쉬웠다.
더 부를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여기서 뭐 집을 해달라고 하겠나, 아님 인센티브 퍼센티지를 올려달라고 하겠나.
이럴 줄 알았음 기본 연봉이라도 조금 더 높게 불러볼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꼭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안 찍어 먹어 봐도 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무님은 내가 ‘네, 제가 희망하는 조건은 그게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알았어. 그렇게 맞춰 보자.’라고 대답을 하실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나. 끝이야? 진짜 그거면 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무게감 있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제가 희망하는 조건은 그게 전부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회사를 납득시켜 줘야지.”
“네?”
“네는 또 뭐가 네야? 협상하는 거잖아, 우리 지금.”
“….”
“한번 보자, 우리 공 차장 협상 능력. 왜 회사가 공 차장한테 그 연봉에 임원 차량까지 제공을 해줘야 하는지, 내가 납득을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냐.”
“….”
“그 정도 가치가 있다, 없다는 이미 공 차장이 지난 1년간 차장 생활 하면서 증명을 했으니까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고. 그럼에도 회사는 지난 1년간 공 차장이 올린 실적만큼 성과급으로 보상을 해줬잖아.”
“…네.”
“그럼 공 차장이 생각하는 조건에 다시 새롭게 납득을 시켜달란 요구 정도는 할 자격이 있는 거 아냐?”
그때 확실히 느꼈다.
아, 이제 나란 사람이 진짜 전무님 입장에서 특별 케어를 해야 하는 존재로 성장을 했구나… 하는 확신.
그리고 전무님은 단순히 연봉 협상을 하기 위함이나 날 시험해 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라, 내가 브랜드 본사들과 협상하는 모습을 이런 식으로 파악해 보고 싶어 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게도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우리 홍성 안에서만큼은 어쩌면 사장님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가.
아무리 모리엘츠가 이쪽 업계에선 하늘에 뜬 별과 같은 존재라도 우리 입장에선 모리엘츠 사장도 그냥 단순히 거래처 사장일 뿐이다.
내가 홍성을 떠나지 않는 이상 전무님은 그 어떤 세계적인 브랜드의 수장들보다 더 상대하기 껄끄럽고 또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자신을 납득시켜 보라고 기회를 주시니, 내 입장에선 당연히 한번 해봐야지.
“그럼 저도 조건 하나만 더 붙이겠습니다.”
전무님의 얼굴은 말 그대로 포커페이스였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으셨고, 그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며 날 쳐다보시는 게 전부였다.
“내년에는 조금 전 제가 희망했던 조건들보다 좀 더 비싼 조건을 걸고 전무님과 이런 자리를 한 번 더 가져보고 싶습니다.”
전무님의 양쪽 광대뼈가 도드라지게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런 조건이야 언제든 환영이지.”
“감사합니다.”
난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으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입안을 적셔놓고 말했다.
“제가 기대하는 내년 부장 연봉과 차량 제공은 회사로부터 받아야 하는 최소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최소한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능력과 가치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홍성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업부를 이끌어갈 사람의 몸값이라면 말이죠.”
“….”
“저는 제가 내년에 초임 부장으로 영업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안 하고 있습니다. 초임이다, 아니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임이라고 내년 홍성의 매출을 이 정도까지만 올리면 된다, 초임이니까 이 정도 책임감만 가지면 된다, 초임이라고 이 정도 실수 정도야 이해를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전무님이 기대하고 있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아내는 건 너무나 간단했고.
그냥 전무님의 입장에서만, 회사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정답은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회사가 무슨 학교, 학원도 아니고 부장씩이나 되는 타이틀에 앉힌 인물에게 뭔가를 가르쳐가며 일을 시킬 수는 없을 거 아닌가.
“업계 1위 기업 홍성 인터내셔널의 영업부장으로만 대우받고 또 그 대우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내가 공 차장이 제시하는 조건에 오케이를 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하자고 한 거다, 그렇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대가 크다. 기대가 큰 만큼 걱정도 크고. 영업부 차장, 팀장 맨파워 평균 나이가 너무 젊어. 젊다는 건 또 다른 의미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할 거고.”
“네.”
“그런데 그걸 좋게 보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쩌면 겁이 없을 수도 있는 거야.”
“….”
“공 차장이 현 영업부 약점을 장점으로 잘 한번 살려봐.”
“네.”
“인사부장한테 방금 공 차장이 말한 조건들로 맞춰놓으라고 전달해 놓을 테니까 사인해.”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