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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10화 (110/325)

# 110

그게 우린 더 눈치가 보여

마침 그 다음주 화요일이 국가 공휴일이라서 월요일에 징검다리 휴가를 내어 4일 쉬는 날을 붙여버렸다.

결혼식 준비로 할일은 많은데, 계속 주말만 이용을 하려다보니 스텝이 꼬이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특히 웨딩 스넵 촬영과 이사 문제는 주말만 이용을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강혜선 역시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나와 함께 4일을 확보한 상태.

난 금요일 저녁 회사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회사 앞에서 그녀를 태워 앞으로 신혼 생활을 하게 될 집으로 향했다.

둘 다 저녁도 못 먹은 상태였다.

이미 장모님이 그곳에 먼저 도착을 해서 텅 빈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계셨다.

"사람들이 뒷손이 너무 없다."

뭔가가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거실 벽 타일을 물걸레질 하시며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시간만 조금 더 있었으면 아예 처음부터 딱 달라붙어서 챙기는 거였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렇게 해놓고 갔네."

내가 봤을 땐 깔끔하게 다 청소를 해놓고 돌아간 거 같은데, 장모님 눈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강혜선 역시 집안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꼼꼼하게 청소 용역 업체 사람들이 치우고 간 자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방쪽을 살필 때엔 그녀의 얼굴에도 짜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걸 이렇게 해놓고 갔어?"

"그러니까 말이다."

강혜선은 이건 진짜 좀 아니라는 표정으로 청소 용역업체 사장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다.

난 그런 강혜선을 재빨리 말리며 장모님께 물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이래놓고 어디 밥맛이 있겠어?"

"에이...안그래도 곧 새 짐 들어오면 다시 또 청소해야 되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가서 식사나 하시죠."

"아무리 다시 청소를 해야 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온 돈 주고 반 머리 자른 거 아냐."

"제가 다시 할게요."

"그럴거면 뭐하러 돈 주고 사람을 불러?"

"기분 좋은 공간 아닙니까.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세요. 당신도 대충 확인했음 나갈 준비해."

주방 싱크대와 모든 방문을 새 것으로 교체하고 도배와 장판도 싹 다 새로했다.

그래서인지 내 눈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집같은 느낌이었다.

간단하게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32만 원짜리 청소 용역 업체를 불러 집청소를 시켰는데, 그쪽 스케줄이 안나와서 어쩔 수 없이 금요일 오후에 사람들이 와서 청소를 하고 갔다.

현관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어서 장모님이 우리 대신 집에 와 문을 열어주셨고.

그런데 중간에 외손주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걸려 믿고 집을 비웠는데, 돌아오니까 청소 상태가 이모양이었다고.

난 아무래도 좋았다.

좁은 원룸 골방에 귀신이 나올 것처럼 해놓고 혼자 몇 년을 살다보니, 이정도면 내 눈엔 이미 5성급 호텔보다 더 완벽한 집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집에 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차 공격으로 가구들이 먼저 들어왔고, 그 가구 배치가 다 끝날 즈음 전자제품들이 도착을 했다.

그 모든 시간 계산을 완벽하게 해서 주문을 한 건 당연히 강혜선이었고.

나와 강혜선의 생년월일을 섞어 현관 출입문 비밀번호를 설정했고, 다잡아 놓은 가구 배치가 다시 보니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거 같아서 혼자 낑낑대며 맞추는 동안 강혜선은 주방 용품들을 정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헹주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강혜선은 더는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저녁 7시.

다음날 있을 스튜디오 웨딩 촬영을 위해 얼굴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는 강혜선을 데리고 그녀가 미리 예약을 해놓은 피부관리실을 찾았다.

"피곤할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그럼 내일 몇 시에 데리러 오면 돼?"

"8시까지 와. 오는 길에 김밥 몇 줄 사가지고 오고. 인터넷 찾아보니까 촬영하는 동안은 밥 먹을 시간도 없대."

"오케이. 얼른 들어가."

"안 피곤하면 당신도 같이 들어가서 이참에 관리 한 번 받아보던지."

"됐어. 난 가서 내 짐 마저 싸야지."

"그냥 다 버려요."

"옷 말이야. 옷이랑 신발...꼭 필요한 것들 말이야."

"아직 안 했어? 미리 좀 해놓으라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하여간 집안 일 미루는 건 선수야. 어차피 해야할 거 왜 그렇게 미뤄?"

"내가 미뤄야 당신이 하니까."

"참 말 예쁘게 한다."

내 가슴을 제법 강하게 때리며 눈을 흘기는 강혜선.

난 그녀의 몸을 피부관리실 쪽으로 돌려놓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돌아간 원룸.

오늘이 마지막 밤이 아님에도 그냥 이상하게 오늘따라 이 집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 혼자 사는 이 좁은 골방에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지.

막상 생각없이 잠만 자며 생활을 할 때에는 잘 몰랐는데, 한 번 사놓고 몇 번 쓰지도 못한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낚시대 세트부터 시작해 한 번씩 해외 출장을 나갈 때마다 면세로 사모은 고급 양주들까지...새 집으로 가지고 가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거기다 나도 내가 왜 양주를 저렇게 사모았는지 모르겠다.

양주를 마시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약간의 로망이 있었던 거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수시로 차를 바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맨날 일해서 번 돈을 아둥바둥 모으기만 하고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나를 위해 한 번씩이라도 약간의 사치를 해주고 싶었는데, 그 사치품이 나에게는 출장을 갈 때마다 면세로 사는 양주였던 거 같다.

술집에서 마시면 한 병에 백만 원이 넘어가는 고급 양주부터 시작해서 가격이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구하기가 힘든 특수 컬렉션까지.

그리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까 로또에 걸린 이후부터는 외국으로 출장을 가면서 더이상 양주를 사지 않았던 거 같다.

그 양주들을 두 번에 걸쳐서 차 트렁크에 실어놓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스튜디오 웨딩 촬영.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가장 많은 컨셉이 포함된 패키지 상품을 선택했었는데, 촬영을 다 마치니까 어느덧 오후 2시였다.

나보다는 강혜선이 고생이 많았다.

한복을 포함해서 웨딩 드레스만 4벌을 입었으니.

마지막 컨셉 촬영을 끝내놓고 스튜디오 소파에 퍼져버린 강혜선.

난 그녀의 한쪽 다리를 내 무릎 위로 올려놓고 마사지를 해줬다.

"결혼식 두 번 했다간 결혼 생활 하기도 전에 늙어 죽겠다."

"왜? 한 번 더 할 생각이었어?"

"어떻게 죽을 때까지 한 남자하고만 쭉 같이 살아요?"

"오호...이렇게 나와주면 나야 완전 땡큐지."

"거기서 땡큐라고까지 말 하기 있음?"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내가 해주는 마사지를 받으며 강혜선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내용을 보아하니 장모님이랑 통화를 하는 거 같았다.

"지금 막 끝났어. 뭐하러 그래.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이 사람도 피곤해. 어제도 하루종일 집 정리한다고 거기 매달려 있었고, 오늘도...하아...알았어. 잠시만요."

스마트폰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살짝 가려놓고 강혜선이 물었다.

"저녁 집에 와서 먹으라는데?"

"그러자."

"당신 괜찮겠어? 틀림없이 아빠 또 술상 받으라고 할텐데?"

"뭐 어때. 내일 쉬잖아."

"내일 짐 옮겨야지."

"아, 늦게라도 옮기면 되지. 그게 뭐가 문제야?"

"그럼 알았다고 한다?"

난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놓고 다시 그녀의 뭉친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눈만 감으면 3초 안에 코를 골 수 있을만큼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잠시 뒤 촬영기사님과 스튜디오 코디가 나와 강혜선을 따로 불렀고, 함께 컴퓨터 모니터를 확인하며 그들이 어떤식으로 포토샵을 할 것이란 설명을 듣고, 또 어떤 스타일의 액자가 우리 신혼집에 어울릴지 결정을 한 뒤 계산을 끝내고 처가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식사 자리에서 장인 어른이 무척이나 민망한 제안을 하셨다.

제안이라고 하기 보다는 허락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눈치를 보아하니 장모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사안 같았고.

"그럼 공 서방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언제까지 비워줘야 하는 거야?"

"계약은 이미 지난달에 다 끝이 났습니다. 제 사정을 이야기해주고 한 달 정도 여유를 달라고 부탁을 해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 겁니다."

"그럼 뭐 당장이라도 옮겨야겠네."

"내일하고 그 다음날까지 쉬는 날이니까 천천히 짐 정리해서 옮겨야죠."

장모님과 눈빛을 교환하시는 장인 어른.

난 그때까지도 아무런 눈치를 못챘고, 그저 비어있는 장인 어른의 술잔에 소주를, 장모님의 와인잔에 와인을 채워드렸다.

"그럼 혜선이 너도...대충 필요한 것들 챙겨서...합쳐라."

싸해지는 분위기.

부모님 세대의 이해와 우리 세대의 죄송함이 만들어내는 싸함이었다.

정말 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장모님은 의미없는 젓가락질만 계속 하셨고, 장인 어른은 내게 같이 마시잔 신호도 주지 않고 혼자 술잔을 비워버리셨다.

그리고 강혜선의 얼굴은 더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냥 이런 느낌이었다.

나란 놈 정말 볼 거 아무것도 없는데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로 너무 예뻐해주시고 또 믿어주시는 거 같아 괜히 이유없이 도둑놈이 된 거 같았다.

"뭐 아빠나 엄마 생각은 그렇다. 너희가 애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같이 한 번 살아보고 결혼을 결정하겠다는 주의도 아니잖아. 지금 합치나 다음달에 결혼식 하고 합치나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

나와 강혜선은 침묵했다.

"너희가 우리 눈치 보는 거, 그게 우린 더 눈치가 보여. 대신 자주 와. 자주 찾아와. 그럼 되는 거지."

"아빠..."

"공 서방 혼자 그 집에 덜렁 들어가서 결혼식 전까지 지내는 것도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

"집이라는 게 사람 온기도 좀 있고 해야 잘 풀리지, 거진 한 달 가까이 혼자 거기서 지내겠다니까 우리 마음이 조금 그렇네."

감사하단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감사하단 말도 죄송스러웠고.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뭐 있어. 어차피 합칠 거 좀 미리 합치라는 것 뿐인데."

"..."

"그냥 우리 생각이 그렇다는 거야. 자네들이 다시 이야기 잘 한 번 해보고 결정해. 그래도 우린 얼마나 고맙나. 지척에 살고 있으니 언제든지 마음만 있음 볼 수 있는 거 아냐."

그 순간 장모님이 더덕무침과 소불고기의 자리를 바꾸며 내 앞으로 소불고기가 담긴 그릇을 밀어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우리집에 처음 인사오고 그 후로 지금까지 반듯하게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 것 만으로도 우린 그냥 그게 고마운 거지."

"...아닙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먼저 하는 게...참 쉽지는 않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릴 유별나다고 할지도 모르겠고. 근데 사람 살아가는 게 다 비슷비슷 한 거 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조금씩은 다른 사정이 있고, 사연이 있는 거 아니겠어?"

"..."

"아무리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혼자 산 기간이 길었다고 해도 우리 입장에선 공 서방 부모님이 서울에 계신 것도 아니고 혼자 타지 생활 하는데, 신혼집에 혼자, 그것도 한 달 가까이 되는 기간을 지내야 된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 뭐 그럴 필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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