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처세가 아니라 실적인데
돌발상황.
그 돌발상황 속에서 난 습관처럼 박 이사와 상무보의 눈치를 살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특히 박 이사 보다는 상무보의 눈치가 더 많이 봐졌다.
그리고 상무보를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물어봤다.
왜 눈치를 봐?
뭐 잘못한 거 있어?
회사를 상대로 죄지은 거 있어?
상무보에게 해선 안될 실수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눈치를 봐?
순간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내게 혼자 차분하게 생각을 해볼 시간이 주어진 듯, 기분상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난 긴장하지 말라고, 눈치보지 말라고 꾸준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게 너무 단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난...영업 기획부 차장 공은태는 차장으로서 우리 부서 팀들의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다.
반칙을 하지도 않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업무 동조 차원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상무보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박 이사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뭘 크게 잘못을 한 건 아니지 않나.
어디까지나 실무자들끼리 아이디어를 공유한 것 뿐이고, 그 아이디어를 종합 정리해서 법인 담당자가 위의 승인을 받기 위해 이런 발표자리를 가진 건데, 그게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그런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되지?
누구 눈치를?
그렇게 생각이 정리가 되자, 운영부장의 돌발행동도 딱히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양심적으로, 있는 그대로 말을 한 게 아닌가.
자기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아닌 건 맞지.
우리 영업부가 준 소스로 준비한 발표가 맞는 거고.
난 오히려 예전의 운영본부장이었음 그냥 자기가 조사해서 만든 발표 내용이라며 입 싹 닦고 그냥 넘어갔을텐데, 이젠 사람이 조금씩 바뀌네...하는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정리가 되자, 난 더이상 위축이 될 이유도 없고, 상무보, 박 이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만약 이만한 일로 나중에 박 이사나 상무보가 날 따로 불러 뭐라고 한 소리 하면 그냥 욕 한 번 얻어먹으면 그만이다.
뭐 그만한 일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해놓고 남의 눈치까지 봐야하나 싶었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것일까.
누가 누구의 눈치를 살피는 게 맞는 것일까.
그리고 진짜 갑은 누구인 것일까...
오만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더이상 을이 아닌 거 같았다.
따지고 보면 상무보 자기 아빠 회사잖아.
난 그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이고.
그것도 최근 반 년간은 어느 누구보다 많이 벌어다 주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당연히 자기가 나한테 잘 보여야지.
나 아니라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대신 쳐낼 사람은 많겠지만, 나 역시 홍성이 아니더라도 일 할 곳은 많다.
"영업부에서 준 소스라고?"
전무님이 물으셨고, 그 질문에 박 이사가 입맛을 다시는 동안 난 장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네, 제가 몇 가지 방법을 제안했었습니다."
장 부장에게 눈빛으로 허락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무님께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상무보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저희 영업 기획부에서 기대하는 어마운트를 맞추기 위해선 중국 법인이 그만큼의 물량을 받아줘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현재의 법인 영업력으로는 힘들겠단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법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해외 영업부 팀장과 중국 법인에서 넘어온 안낙현 팀장을 통해 몇 가지 아이디어를 수집했고, 그렇게 수집된 아이디어를 운영본부장에게 제시를 했습니다. 오늘 발표 내용은 그 아이디어들을 현재 법인 실정에 맞게끔 조율시킨 최종내용인 거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대답인 거 같았다.
전무님이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전사적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 그 중에서도 부서장, 차장급이 앉은 배석원석이 아닌 'ㅁ'자 모양의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임원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사자가 되어보자.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해야하는 직장 생활, 순한 토끼, 양, 사슴과 같은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기회만 엿보는 하이에나가 되어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지 말고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라면 그냥 시원하게 사자가 한 번 되어보자.
사자가 어디 싸움만 잘해서 백수의 왕이라고 불릴까.
따지고 보면 사자보다 크고 쎈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그런 덩치크고 전투력 강한 맹수들을 다 뒤로하고 사자가 백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그런 맹수들이 뛰어다니는 초원 아무곳에서나 어느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바닥에 배 딱 깔고 몇 시간씩 여유롭게 낮잠을 잘 수 있는...그런 배짱이 있기 때문 아닐까.
힘들게 저 임원 자리까지 올라간 분들의 세월과 노력을 무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 세월과 노력은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앉아있는 저 자리를 신격화 시킬 필요까지 있을까란 생각.
아닌 말로 내가 상무보의 라인을 타겠다고 이 회사에 입사를 한 건 아니지 않나.
상무보의 사람이 되어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초,중,고, 대학까지 나오고 비싼 돈들여 어학연수를 다녀온 건 아니지 않나.
자기가 생각을 했을때 나란 사람이 자신이 시키는대로 잘 안따라온다 싶으면, 뭐 나와 비슷한 다른 누군가를 찾겠지.
내가 그거까지 생각하며, 그의 관심거리 밖으로 밀려나가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닐까.
이미 난 벌만큼 벌고 있고, 또 가질만큼 가지고 있다.
또 H.I 편집샵을 대박으로 이끌어 업계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언제라도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마흔 전에는 동종업계 어디로든 이직이 가능한 입장이다.
은행에 가지고 있는 대출?
물론 그럴일은 없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마포에 산 아파트 한 채만 포기를 하면 되는 거다.
아쉬울 게 전혀 없는데, 왜 내가 지금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해놓고도 상무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임원들을 한 번 쭈욱 훑어보다가 내 시선이 가장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이문 차장, 아니, 이문 본부장이었다.
본부장의 타이틀로 유일하게 임원 테이블에 앉아있는 존재.
그 존재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쪽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올려놓고 날 향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도 함께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의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난 그냥 지금 이 분위기가 은근히 재밌다는 뜻을 담아서...
그 뒤부터 난 어느 누구의 표정도 읽지 않았다.
그냥 말 그대로 회의에만 집중을 했고, 그 회의 내용중 우리 영업 기획부에 꼭 필요한 내용들만 필기를 했다.
전사적 회의가 끝이나고 난 전무님을 시작으로 임원들이 모두 회의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장 부장 옆에 딱 달라 붙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임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또 숙였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그때부터 묘한 떨림이 시작됐다.
걱정이 섞인 떨림이 아니라, 회의장에서 내가 만들어낸 배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기대 섞인 떨림이었다.
2시 20분.
모니터 화면 귀퉁이에서 혼자 깜빡거리고 있는 디지털 시계가 현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회의가 길어진 탓에 점심도 못 먹고 지금 이 시간까지 사무실에 붙잡혀 있었던 거다.
난 회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서 사내 메신저로 각 팀장들에게 보내놓고, 늦은 점심이나마 따끈한 국물이 있는 걸로 먹어야겠단 생각에 자켓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내려간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이문 본부장님과 마주쳤다.
"응?"
회사 지하 주차장엔 엘리베이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임원 전용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사급은 그랜저, 상무급은 제네시스, 전무, 사장 차량은 에쿠스.
그 차량들만 매일같이 따로 관리를 해주시는 차량 관리 직원도 한 분 계신다.
매일같이 물걸레와 차 키 묶음을 들고 다니시면서 임원차량에 한해 차 내부 청소를 하고 또 차 상태를 관리해주시는 분인데, 사실 그가 하는 진짜 업무는 리스 회사에 계약기간이 끝난 차량을 반납하고 신형 차량을 가지고 오는 거다.
그런데 그것만 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고 또 할 일이 크게 많지 않다보니 회사에서 그에게 계약직으로 건당 얼마씩 받으며 일을 할래, 아님 매일같이 출근을 해서 차량 관리를 해주며 월급을 받을래...해서 지금처럼 매일같이 출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정확하게 본사 소속이다.
임원 전용 주차 공간에서 이문 본부장과 그 관리 아저씨가 전자담배를 함께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이문 본부장님이 지금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고.
"점심 먹으러 갑니다."
"아직 안 먹었어요?"
"네, 회의 내용 정리하느라..."
"먹고 하지."
"오후에 외근 나가는 팀장이 있어서요. 외근 나가기 전에 회의 내용 확인하고 나가라고..."
"참 열심히도 한다."
"식사 하셨습니까?"
"나야 먹었죠."
"네...근데 여기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나도 이제 회사가 주는 차 몰아봐야 할 거 아냐. 맨날 사장님 옆에 붙어서 사장님 차 얻어타는 것도 좀 그렇고. 하하하."
"아..."
"뭐가 좋을 거 같아요? 이 색이 괜찮나, 아님 이 색이 괜찮나?"
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거겠지만, 이문 본부장의 선택은 제네시스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사급에게 주어지는 그랜져가 아니라 상무급이 선택할 수 있는 제네시스에...
진한 회색과 남색을 차례대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가 좋겠냐고 물어보는 이문 본부장.
난 망설이지 않고 남색이 더 괜찮지 않냐고 대답했고, 그에 이문 본부장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얼른 가서 식사해."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참, 공 차장."
"네, 본부장님."
"항상 지금 처럼 해. 바뀌지 말고."
"...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하라고요. 아까 회의실에서 너무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순간 설렜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하면서 말이에요. 보기가 너무 좋았어요. 만약 아까 사장님이 그 회의 자리에 참석을 하셨다면 틀림없이 저 친구 누구야? 회의 끝내고 따로 한 번 불러봐...하셨을 거야."
"...?"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그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공 차장이 했던 것처럼. 특정 누군가에게만 하는 충성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아니죠? 회사에 대한 충성은 본인이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확신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확신이 섰으면 그때부턴 마이웨이 하는 거고. 멋졌어."
"...감사합니다."
"참 요즘 친구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의 개념이 뭔지를 잘 모르는 거 같아요. 그냥 이리저리 아부떨고 달달한 소리만 하는 게 충성인지 알지. 진짜 회사에 대한 충성은 처세가 아니라 실적인데. 공 차장이 이번에 진짜 잘 한 건 법인 본부장한테 회사에 충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토스해줬다는 거야."
"..."
"항상 응원합니다. 얼른 가서 밥 먹어요. 근데 진짜 남색이 더 낫지?"
"하하하...네. 저라면 남색을 할 거 같습니다."
내 말에 이문 본부장은 옆에 있던 아저씨에게 남색 차량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케이. 그럼 이걸로 한 대 리스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