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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77화 (77/325)

# 77

달만 하니까

상대는 그럴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건넨 명함을 잠시동안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표정을 풀며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더 잘된 거 같네요. 그렇지 않아도 디파트먼트 매니저 포지션도 필요한 상태였거든요.”

디파트먼트 매니저?

혹시 헤드 오브 디파트먼트, 즉 부장 포지션을 저렇게 부르는 건가?

같은 업계라도 회사마다 사용하는 타이틀의 명칭은 다 조금씩 다를 수 있는 것이니까...

난 그렇게 혼자 속으로 짐작만 해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소개하는 CGM 한국 사업부의 대략적인 조직도를 통해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제가 듣기론 팀장님이셨는데, 그 사이에 또 승진을 하신 모양이네요. 공은태 차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막스로부터 처음 들었을 땐 이제 막 팀장 승진을 하고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나크리스였다고...”

“그분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으신 게 꽤 오래 전이신 거 같네요.”

“아뇨, 저 한국 발령 받고 입국하기 바로 전에 집으로 초대를 해주셨어요.”

“한국 들어오신지 한 달 정도 되시나 봅니다.”

서로에 대한 탐색전은 그만하면 충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뭐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형찬 담당자님이 절 소개해줬다는 부분이요. 분명 나크리스는 아직 저희 홍성과 같이 할 일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막스 역시 그 부분에 대한 염려가 분명 있으셨어요.”

상대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인 후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래서 만약 접근을 하더라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괜히 중간이 끼어서 자기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면서...”

나 역시 함께 다리를 꼬아 앉으며 커피잔을 접시째 들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처음엔 막스한테 부탁을 했었죠. CGM으로부터 이런이런 포지션을 약속 받았는데, 나랑 같이 한국에 들어갈 생각이 없느냐고.”

“처음부터 CGM 소속은 아니셨던 모양입니다?”

“아뇨, 시작은 고야드에서 했어요.”

“아...고야드. 시작부터 대형 브랜드에서 하셨네요. 혹시 고야드 본사에서 시작을 하셨던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파리 본점 담당 VMD로 시작했죠.”

이력이 참 독특하다 싶었다.

“저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저한테 세일즈 재능이 있더라고요?”

가볍게 미소를 흘리며, 분명 우린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마치 꽤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사이처럼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상대였다.

“그러다 세일즈 일도 현장에서 몇 년 정도 해봤고, 또 VMD 이력을 인정받아 에르메스 쪽에서도 한 몇 년 재미나게 일을 했었죠. 그러다가 막스랑 인연이 됐던 거예요. 막스가 제게 공 차장님을 이렇게 소개하더라고요. 한국에만 있기엔 분명 많이 아까운데, 다르게 생각을 해보면 그만큼 한국 안에서는 최대 가성비를 뽑아낼 수 있는 인재라고.”

“언제 담당자님 한국 들어오실 일 있으면 제가 제 사비로 저녁 식사라도 대접을 해야할 거 같네요.”

“혹시라도 저희와 같이 일을 안하시더라도 막스가 몸담고 있는 나크리스 쪽엔 불이익이 안 갔음 좋겠네요.”

“그럴리가요. 지금 이 자리는 저 개인적인 시간이고, 또 개인적인 자리입니다. 회사와는 별개죠.”

“제 입장에선 막스로부터 받은 공 차장님의 레퍼런스가 워낙 매력적이라 컨텍을 안해볼 수가 없었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막스가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나크리스가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저만 만나면 홍성 인터네셔널과 공 차장님 이야기를 하더군요.”

“감사하네요. 그런데 담당자님은 왜 CGM과 같이 안하시는 겁니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나크리스에 있는 것 보다는 CGM 쪽으로 갈아타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애가 있다보니까 힘드신 모양이더라고요.”

“아...”

“조건만 놓고 보면 한국에 들어오는 게 훨씬 좋죠. 그런데 이미 현지화가 되어버린 가족들을 다 데리고 한국에 들어오기엔 현실적으로 걸리는 게 많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애 교육부터 언어...여러가지 장애 요인이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렇겠네요. 그런데 지부장님은...?”

“저요? 하하하...저는 이미 돌아다닐 만큼 충분히 돌아다닌 거 같아서요. 멋모르던 20대를 역마살 낀 사람처럼 틈만 나면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다보니, 어느덧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렸네요. 한 몇 년 됐던 거 같아요, 한국에 들어올 기회만 엿보기 시작했던 게. 그런데 파리 현지에서 받아오던 조건을 맞춰줄 회사를 한국에서 찾는 게 그리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렇겠죠.”

“회사 입장에서도 한국 시장 진출이 큰 도전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반드시 성공을 시켜야하는 프로젝트인 셈이죠.”

“흐음...”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최대한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 아직 업계에 내놓을만한 필모그래피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사람인데...”

“음...이런 거예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세를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은 상대.

“가능하면 동종 업계에 있는 타 기업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인재를 영입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어차피 CGM의 한국 진출이라는 것 자체가 이슈거리인데, 여기에 다른 잡음까지 섞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현지 직원 영입에 관해선 저희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 몇 군데 헤드헌팅 업체에 의뢰를 해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공개 채용도 준비중이고요. 저희는 인터뷰만 보는 거죠.”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긴 CGM 정도면 굳이 인재 영입에 반칙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경력 사원 모집 공고만 띄우면 서로 오겠다고 할 게 분명한데 말이다.

“제가 헤드헌팅을 통하지 않고 저 개인적으로 프로포즈를 하는 건 공 차장님이 유일합니다. 이력서에 들어가는 몇 줄의 필모 보다는 전 막스의 안목을 믿거든요.”

그녀로부터 연봉 8900만 원을 제안받는다.

현재 업계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몸값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현재 홍성에서 받고 있는, 곧 내년부터 받게 될 차장 초봉 6500만 원과 비교를 해본다.

상대는 연봉 8900만 원을 제안하면서 처음 1,2년 정도는 현지 사정에 맞춘 한국 사업부의 시스템 스탠다드를 만드는데 집중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해당 1,2년 동안은 특별한 성과급이 없을 거란 소리로 해석을 했고.

애초에 홍성을 나올 생각은 없었지만, 직접 CGM측 관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가 홍성을 나올 이유는 더 없어지고 있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입장도 아니고, 애초에 외국계 기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홍성에서 내가 잡고 있는 영업 이사 - 전무 - 상무보로 이어지는 황금 라인과 비교할 조건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홍성에선 스타 플레이어로 뛰며 골만 넣으면 되는 입장인데, 괜히 CGM쪽으로 옮기면 그들이 한국 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판을 닦는 일만 해야할 게 분명했으니까.

인재 영업하고, CGM의 한국 현지화 시스템을 만들고...머리 아프다. 생각만 해도 피곤한 작업의 연속이 분명했다.

그날 난 CGM 한국 사업부 지부장이라는 상대에게 고민을 조금 해보겠다는 말로 정중하게 사양의 뜻을 전달했다.

이런 만남에서 고민을 해봐야할 거 같단 말만큼 확실한 거절은 없는 거니까.

그리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상대측과 만난 자리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 중 김형찬에 관한 이야기만 제외하고 모두 장 부장에게 전달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땐 대비를 해야겠지만, 향후 1,2년 안엔 직접적인 타격은 없을 거란 사실에 장 부장은 내심 안심을 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렇게 CGM이라는 거대 공룡 기업에 대한 두려움이 현재 치고나가고 있는 프로젝트에 가려져 조금씩 무뎌지고 있을 때였다.

“차장님.”

“네.”

“커피 한 잔 안하실랍니까?”

양 팀장이 살짝 근심이 낀 표정으로 내게 개인적인 면담을 요구해왔다.

그러자고 했는데, 탕비실이 아닌 회사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그 역시 오케이.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각자의 커피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도 이 대리가 그쪽으로 가게 될 거 같습니다.”

“그쪽이라면...CGM?”

양 팀장은 입을 꼬옥 다문채 고개만 끄덕였다.

크게 놀라울 건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쪽으로 옮기게 된다면, 아마도 그 1순위 그룹에 이 대리가 포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줄곧 해오고 있었으니까.

영업부 전체적으로 대거 인사 승진이 준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이 대리.

꼭 승진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나이에 비해 빨리 결혼을 해서 애 까지 있는 이 대리 입장에선 홍성에서 받는 대리 월급만으로는 혼자 가정을 책임지기가 빠듯했을 거다.

“와이프가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며칠 하지도 못하고 그만뒀다고 하네요.”

“왜요?”

“부부가 나가서 일하고 있는 시간동안 처가에서 애를 대신 봐주기로 했는데, 장모 되시는 분이 혼자 낮에 애를 보기엔 도저히 기력이 딸려서 못하겠다고 두 손을 들어버린 모양이에요.”

“푸훕...”

웃어야지 뭐 어쩌겠나.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또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가 되다보니, 웃어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었겠죠.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댄 것일 거고.”

“그렇겠죠. 알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대체 인원 하나 정도 미리 채워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기태 있잖아요. 안 팀장한테는 내가 말해놓을테니까, 기태 데리고 가요. 어차피 기획 1팀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 자체가 원래 우리 영업 5팀이 하던 프로젝트의 확장판이잖아요. 기태 입장에서도 고향 온 기분일 거고.”

“대리급이 필요합니다.”

“올려주면 되지. 이 대리 빠지면 대리 티오 하나 남잖아요. 당장 내년 상반기 인사에는 못 들어가더라도 하반기 인사 때는 노려볼만 하잖아요.”

“하지만 기태는 대리 달면 언제라도 브랜드 업체 쪽으로 옮겨보겠다고 준비하는 놈 아닙니까.”

“그러라고요.”

“네?”

“양 팀장님 말씀처럼 언젠가는 나갈 친구 아닙니까. 꼭 붙잡아두고 있는 것보다 적당한 당근 하나 던져주면서 있는 동안 최대치의 능력을 뽑아내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하단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는 죽이되든 밥이되든 자기가 해보고 싶다는 일 한 번 해보라고 응원을 해주고 싶기도 하고. 이 대리 빠진 자리를 기태 만큼 잘 채워줄 인원도 현재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다시 회사로 복귀한 후 난 곧바로 양 팀장을 시켜 박기태를 내 자리로 불렀다.

그리고 이 대리의 이직에 관한 귀띔을 미리 해주며 당장 대리 승진은 어렵겠지만, 그 자리로 들어가서 이 대리가 현재 하고 있는 업무를 받아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

박기태의 얼굴에 많은 생각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왜? 부담스러워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

“예전에 만토바 출장에서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대리는 달아라고. 대리까지는 달고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네, 그랬죠.”

“근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올려주려는 거냐?”

“아뇨, 나갈 걸 뻔히 다 아시면서 왜 이런 결정을 하시는 건지...”

“나는 알아도 위에선 모르잖아요.”

“...!”

“달만 하니까, 달 때 된 거 같으니까 해보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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