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불안함은 절대 착각이란 걸 하지 못한다.
하나의 비리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때부터는 그 비리 뒤에 열 개, 스무 개의 잠재적 비리가 아직 숨어있음을 의심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보장받게 되는 거 같다.
법인장과 본부장을 향한 박 부장의 추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난 여기에 탄력을 받는다.
“그럼 전 다른 부분을 조금 더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는 나다.
하지만 이 당연한 물음은 감사팀과 법무부에서 차출된 에이스들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원래는 의전팀으로 구성된 당신들이 찾아내야 하는 비리인데, 아무래도 이곳에선 당신들보다 우리 영업부 사람들이 좀 더 뛰어날 것 같으니 우릴 지원하란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최대한 다 긁어봐요.” 하는 상무보의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본사 내의 소속 부서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난 상무보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박 부장은 큰 건을 해냈다는 의미로 그런 나의 손을 소파 아래에서 꽉 잡아주었다.
법인장을 상대로 하는 박 부장의 추궁엔 큰 관심이 없었다.
철저하게 분업이 되어야 한다.
안 그럼 오늘 안에 절대 다 못 끝낸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오후 3시 정도에 출장 일정이 하루 딜레이 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렇게 우린 어쩔 수 없이 토요일까지 반납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누구 하나 앓는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일정이 하루 딜레이 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살짝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담배 한 대의 여유 정도는 괜찮겠다 생각을 하게 됐던 거 같다.
여전히 살얼음판.
특히 현지 주재원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은 완전한 잿빛으로 변해있었다.
“손 팀장님.”
“응.”
“우리 인간적으로 담배 한 대씩만 피고 합시다.”
“빨리도 말 꺼낸다, 씨이...아까부터 미치는 줄 알았어.”
소파 쪽에선 한 층 더 강도가 높아진 추궁과 변명, 의심과 해명이 오고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손 팀장은 그 소파를 조심히 지나쳐 사무실을 나왔고, 흡연에 관대한 나라답게 담배 냄새가 폴폴 풍기는 건물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직 건물 안에서 담배를 펴도 되는 모양이다, 이 곳에선.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건물 복도에 스탠딩 재떨이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었고, 흡연이 가능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재떨이 속엔 담배 꽁초들이 꽂혀져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타인의 흡연 냄새까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나가서 피죠.”
“여기선 괜찮아. 저거 봐, 저 아저씨도...크흐, 진짜 멋지네.”
용역 업체에서 나온 사람인 걸로 예상이 되는데, 입에 담배를 물고 밀대질을 하는 아저씨 한 분이 보였다.
그 와중에 여유를 찾고, 나와 손 팀장은 그 여유 속에서 잠깐이지만 웃음을 발견했다.
잠시 뒤 안 대리가 나왔다.
그리고 안 대리의 “괜찮아요, 피세요. 여긴 외부에서 손님이 오시면 사무실에서도 피고 그럽니다.”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와 손 팀장은 각자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손 팀장이 무겁게 뭉친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시선은 여전히 창 밖으로 던지고 있으면서 이런 말을 꺼낸다.
“안 대리.”
“네, 손 팀장님.”
“앞으로 정말 잘해야겠다.”
담배를 피지 않는 안 대리.
하지만 이런 자리가 너무나 익숙한 듯 역할 것 같은 담배 냄새에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손 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쳐다봤다.
“우리야 직접 와서 눈으로 보니까 그동안 안 대리가 얼마나 이런 부분에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는 거지, 본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안 대리를 볼 거 아냐.”
“...그렇겠죠.”
“남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디 좀 많아?”
그 말에 안 대리는 그저 피식하고 웃으며 걱정을 대범함으로 위장시켰다.
“거기다 해외 사업부까지 해체가 된 마당에 이곳 법인까지 초토화가 나고 나면 안 대리의 팀장 승진에 더 말이 많이 나올 거다.”
“그렇겠죠.”
“안 대리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런 널 안고가야하는 공 팀장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언제부터 날 챙겼다고...
하지만 딱히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불편한 말을 꺼내는 것 같지는 않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증명해줘야 돼, 안 대리가.”
“...”
“안 그럼 이곳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쓸데없는 말들을 지어내기 시작할 거야. 회사가 어디 이런 부분을 적나라하게 다 까서 회사 전체 직원들에게 이야기해주겠어?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음모론 좋아하고 뱀심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한 번 꼬아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해버린다고. 그게 회사야.”
“그렇죠.”
“앞으로 안 대리가 스스로 증명을 해내지 못하면, 공 팀장 많이 피곤해질 거 같다. 실력으로 증명해, 안 대리가 그냥 주재원 근무 다녀온 이력, 이곳의 비리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다른 동기들 보다 빨리 팀장을 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안 그럼 주재원 근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계속 비리 천국인 지금에 머물러 있을테니까.”
자기가 주재원 근무를 하게 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
참 얌체인데, 손 팀장의 말에 틀린 건 하나 없었다.
안 대리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가 확실하다.
이렇게 현지 법인까지 초토화를 시켜놨는데, 여기서 안 대리가 다른 직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버리면, 안 대리를 팀장으로 올리는 회사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안 대리의 팀장 승진 역시, 그동안의 관례처럼 주재원 근무를 하고 돌아왔기 때문인 것으로 인식되기 딱 좋고, 그렇게 되면 점점 코너로 몰리는 쪽은 어쩔 수 없이 안 대리 본인이 될 것이기에.
하지만 안 대리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안 대리가 만들어내는 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그의 성격이 아닌, 자신의 불안함을 숨기는 위장이라는 걸.
“에이, 저 안낙현입니다.”
“그게 뭐?”
“명품 아동복 편집샵 프로젝트...설마 제가 그거 하나 못 띄우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팀장님.”
마지막에 ‘팀장님’ 이라는 타이틀을 부를 때 안 대리는 손 팀장이 아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빤 다음 천천히 코로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손 팀장이 말한다.
“공 팀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뭐.”
다시 들어간 사무실.
앞으로 차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어쩌면 현지 본부장의 역할까지 대행하게 될지도 모르는 손 팀장을 바로 옆에 세워놓고 난 현지 주재원 근무자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렀다.
손 팀장에게는 조금 미안한 감정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달리 중국 법인 일에 본사가 직접적인 컨트롤을 하게 된다는 부분을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작업이었으니까.
손 팀장 역시 크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저 “이 놈 봐라?” 하는 식의 놀람을 억지로 숨기고 있을 뿐.
여기서 치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법인 상황을 체크하는 일이 수월해진다.
백날 위에서 이런이런 지시가 떨어지면 뭐하나.
그런 주문들을 잡음없이 쳐내야 하는 실무자들의 높낮이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쉬운 일도 돌아가야 하는 게 회사 일인데...
난 여기서 앞으로 내가 손 팀장의 업무까지 모두 본사에서 확인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손 팀장 본인 스스로 그걸 인정하게 만들어야 했다.
“스톱합시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오늘 저희 눈치 살피면서 보고 계시던 업무들...잠시 스톱하는 걸로 합시다. 딱히 중요한 업무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쪽 추궁의 현장에서 몇 개의 시선을 날아와 내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사무실 전 직원을 모아놓고 주문을 시작하는 내게 집중되는 시선들.
상무보, 박 부장...그리고 법인장과 본부장.
난 일부러 자리를 바꿨다.
현지 법인의 사무실 직원들이 그들을 등지고 서게 만들었고, 내가 상무보 쪽을 바라보고 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
“까도까도 계속 나올 거 같습니다. 어디까지 썩은 건지 짐작도 못할만큼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재원 근무자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 거 같네요.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다 파내놓고 가야 직성이 풀릴 거 같은데, 저만 그렇습니까?”
손 팀장을 쳐다봤다.
손 팀장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전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저한테 정황을 가져오세요.”
“...!”
“본인이 깨끗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저한테 정황을 가져오세요. 조금 전 배송비 부분처럼 저희가 직접 밝혀내면 그때부턴 답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런이런 의심사항이 있지만, 난 아니다. 난 인볼브 되지 않았다...하는 부분들을 지금부터 가져와주세요.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우리 모두 영업 뛰는 사람들 아닙니까.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이 모른다는 건 숨기는 거거나 아님 무능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주말은 주말답게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쉽게 갑시다.”
정말 거짓말처럼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하는 누적된 비리의 정황들.
기억은 거짓말을 해도 문서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문서에 찍힌 숫자들은 착각을 할 수 있어도 그 문서를 만든 사람들의 불안함은 절대 착각이란 걸 할 수 없다.
그게 현장의 특징이라는 거다.
비품 관련 비리가 하나 밝혀진다.
홍성이 브랜드 본사로부터 디스플레이 소품을 받을 땐 따로 경비 처리를 하지 않고 무료로 대여를 받는다.
말이 대여이지 그냥 공짜로 받는 거다.
그걸 이곳 법인에서 에이전트에게 경비 처리를 해서 마진을 잡았다.
교묘하다.
정말 똑똑하고.
그 경비 처리는 에이전트가 지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 측 윗대가리들이 반띵을 하는 장면이다.
도대체 얼마나 해먹었을까.
이래서 전문 경영인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겠지.
가족 경영이 아닌 전문 경영인 체제의 가장 극단적인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해먹을 거 다 해먹고 자기는 임기만 채우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 그 뒤에 바톤을 이어받은 새로운 경영인은 이전 경영인이 해먹은 로스를 채워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다른 비리 루트를 뚫을 수 밖에 없는.
개인적으로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선호하지만, 이런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단점이 부각되는 순간 그 한계는 극명해진다.
“...”
다음날.
몇 명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전날 내가 모두를 불러놓고 지시를 내렸던 현장에 있었던 몇 명이...
그들의 지각, 혹은 양해없는 불출근은 그들도 어느정도 비리에 연루가 되었음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상무보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의전팀 직원 몇 명이 우리 쪽으로 붙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 우린, 아니 난 중국 법인이 그동안 해왔던 비리의 최소 80퍼센트 이상은 뽑아낸 거 같았다.
더 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상무보가 휘두르는 칼의 더 확실한 칼날이 되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손 팀장에 대한 배려 정도는 남겨둬야 할 거 같았으니까.
그렇게 중국 법인을 초토화 시켜놓고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상무보의 호출이 날아온다.
“네, 영업 기획부 공은태 팀장입니다.”
걸려온 한 통의 내선 전화.
-접니다, 팀장님.
“아, 네.”
-지금 제 사무실로 좀 올라와주세요.
아침부터 뜬금없는 상무보의 호출.
난 벗었던 자켓을 다시 챙겨입고 화장실로 가 머리부터 손질을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