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회사의 매뉴얼은 실수를 하면 안된다
아직은 이름을 해외 사업부로 그대로 쓰고 있는 그들의 사무실.
하지만 벌써부터 비어있는 자리가 많이 생겼다.
부장, 차장 자리는 물론이고 몇몇 팀장의 자리까지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전사적 이행.
전사적 집단에 포함이 되지 못했을 땐 그 전사적이라는 표현이 그렇게나 멋있고 힘이 들어간 집단처럼 보였다.
권위의 또다른 상징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막상 상무보의 지휘아래 해외 사업부를 해체시키는 전사적인 실무자가 되어보니 딱히 멋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전사적 회의.
말 그대로 회사 전체적인 차원에서 실무자들이 모여 해외 사업부 해체에 대한 구체적 회의가 이루어졌다.
박 부장 이하 나와 손 팀장이 영업부에서 차출되었고, 인사부, 영업 지원부, 그리고 감사팀, 법무부의 핵심 실무진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우린 각자의 업무를 분할받고 얼굴에 감정을 지우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손 팀장을 대신해 해외 사업부 사무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문 대리님.”
“네, 팀장님.”
“현재 중국 법인이 케어하고 있는 브랜드들 재무제표 좀 뽑아주세요.”
공기가 싸늘하다.
모두가 숨을 죽인채 각자의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지만, 그들이 가진 눈치라는 감각은 이미 내게 모두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다.
재무제표를 보여달란 말은 해외 사업부의 모든 걸 보여달란 소리와 같다.
물론 그것으로 내가 할 건 그들의 비리를 추가로 밝혀내는 게 아니다.
앞으로 해외 영업부로 편성될 그들을 영업 기획부가 어떻게 무리없이 끌어안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니까.
패잔병들의 모습이 저럴까.
난 문 대리가 서류를 챙기는 동안 숨소리 조차 마음놓고 흘리지 못하는 그들을 지켜보고 또 지켜봤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온 핸즈 온스 계약 관련 내용도 모두 뽑아주세요.”
순간 문 대리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고, 난 본능적으로 그 불안한 눈길이 향한 곳으로 함께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 팀장.
나 보다 5년 입사 선배인 걸로 알고 있다.
딱 그 정도 나이가 많을 것이고.
문 대리를 향해 그렇게 해주라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는 박 팀장이었다.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아뇨, 다른 부분은 감사팀이 와서 확인할 겁니다. 전 그냥 업무 분할 요청서를 만들 수 있는 서류 몇 가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문 대리가 어디 바보인가.
특정 브랜드 계약 관련 내용을 모두 긁어가겠단 말은 해당 브랜드의 비리를 파겠다는 경고다.
물론 영업 기획부가 할 일은 아니다.
난 다만 감사팀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을 뿐이다.
문서에 적힌 숫자를 가지고 팩트 체크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약 당시 업계 분위기나 실상 오고갔던 마진 비율의 타당성 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능력까지 감사팀이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감사팀에서 그 능력을 나에게 빌려달라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난 곧바로 온 핸즈 온스 본사로 전화를 걸었다.
“홍성 인터네셔널입니다.”
그렇게 난 어차피 감사팀에게 걸릴 비리였지만, 한 발 앞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리의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퇴근을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내가 세워둔 차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한 남자.
해외 사업부 박 팀장이었다.
“여긴 어떻게...”
이때부터 서로가 불편해진다.
온 핸즈 온스의 비리 당사자와, 그 비리를 아직은 혼자만 알고 있는 자.
불편한 분위기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공 팀장, 아니 공 팀장님.”
“...네, 팀장님.”
“우리 이야기 잠깐만 합시다.”
자기 딴에는 모든 걸 내려놓는다고 내려놓았겠지만, 내 눈엔 오히려 무엇인가를 더 꽉 잡기 위해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시간만, 아니, 아니...30분. 딱 30분만 빌려줘요.”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도 물 수 있다는 표현을 아마 그동안 난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건...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인 모양이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럼에도 그것만이 살 길이란 희망으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겠지.
“말씀하세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여기서 하시죠, 팀장님.”
“나 좀 살려줘요, 공 팀장님.”
“...?”
“나 2퍼센트 먹었어. 고작 2퍼센트 먹었다고. 그것도 본사 복귀하기 전 현지 본부장이 맡기 싫다는 거 억지로 온 핸즈 온스 나한테 넘기면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가져가라고 해서 말이에요.”
“...”
“보통 기본 5퍼센트야. 그나마 줄이고 줄여서 인간적으로 티 안나게 한 게 2퍼센트였다고요.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안 대리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내가 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나 진짜 깨끗하게 한다고 한 사람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첫째 이번에 초등학교 입학했어요.”
난 손안에 든 차 리모트 컨트롤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내가 회사 손실을 배상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에요, 지금. 알잖아.”
“팀장님, 전...”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전 회사가 아닙니다. 제 회사가...아닙니다. 전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실무자일 뿐이지,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지하 주차장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며 두 눈을 감아버리는 박 팀장이었다.
간헐적으로 한숨을 흘리는 그를 놔두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보건말건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놓고 차에 시동을 걸어 그가 주는 부담감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이 흘러 중국 출장 전날이 되었다.
상무보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웠던 박 부장이 무거워진 표정으로 다시 사무실을 찾았고, 나와 손 팀장을 따로 불렀다.
손 팀장은 세상 고민없는 사람 같았다.
자기 입장에서야 재수지.
자기가 법인 생활을 하기 전 그동안 자행되었던 비리가 모두 걷어지게 생겼고, 또 그만큼 타이틀에 비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시작을 할 수 있을테니.
이래서 줄을 잘서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하긴 그 줄을 알아보고 놓치지 않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인가?
소형 회의실을 하나 빌려 영업부 전체적인 살림을 맡아야 하는 장 차장이 빠진 상태에서 박 부장과 나, 그리고 손 팀장 이렇게 셋이서 중국 출장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상무보님이...마음이 많이 무거우신 모양이야. 아무래도 본인이 춰야 할 칼춤에 맞아 떨어질 대부분이 챙겨야 하는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 더 그런 모양이지.”
“...네.”
“이 백 마진이라는 게 참 애매해. 영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배워놔야 하는 부분임에는 틀림없는데, 그 적당히라는 기준이 애매모호하잖아.”
“...그렇죠.”
거기서 또 그렇죠...라고 대답하는 손 팀장은 뭐란 말인가.
하여간 박 부장 똥구멍 핥는 거 하나 만큼은 우주 최강이다.
물론 박 부장이 흘린 뉘앙스를 나라고 왜 이해를 못하겠나.
하지만 백 마진으로 만든 이익은 마땅히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 거지, 개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선 안되는 거 아닌가.
난 그렇게 배웠고, 또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다.
안 그래도 버거운 회사 생활, 고작 그 몇 푼 때문에 불안까지 안아가며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것도 로또 당첨 때문일까?
아니다.
난 애초에 그런 게 싫었다.
의미없는 불안, 떠안지 않아도 되는 걱정 같은 건 그냥 체질적으로 질색이다.
“어디까지 날려야할 거 같냐, 공 팀장.”
질문의 요지를 잘 파악해야 했다.
아마도 박 부장은 비리에 연루된 모두를 다 쳐내고도 해외 사업부가 진행하고 있던 모든 업무를 무리없이 받아서 진행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물어봤던 거 같다.
비리는 걷어내되, 업무에 구멍이 생겨선 안되니까.
“회사는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매뉴얼까지 실수를 해선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박 부장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손 팀장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본인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건덕지를 제공한 건 회사가 맞는 거 같습니다. 회사의 철저한 컨트롤만 있었더라면, 살릴 수 있는 사람도 분명 많았을 것 같다는 게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제야 손 팀장 역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예외를 만들어버리면 회사의 근간인 매뉴얼이 흔들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회사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
“매뉴얼은 무겁고 두꺼워야 하고, 또 그 매뉴얼에 변화가 올 때엔 모두가 납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건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흐음...”
“얼마나 많은 계약직 직원들이 월 150만 원, 180만 원을 받아가며 전전긍긍 출근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지금은 거기에 변화를 줘보겠다고 수많은 인턴들이 그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들을...그들이 이번 일로 소외받게 만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손 팀장을 겨냥한 말이었다.
어치피 중국 법인까지 본사에서 컨트롤하기로 결정이 난 상황이다.
그리고 비록 장 차장을 거쳐야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컨트롤러의 핵심에 내가 앉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중국 법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특히 현지 직원이 아닌 주재원들의 경우는 넘쳐나는 혜택을 받고 있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소수의 혜택을 채워주기 위해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불합리성, 회사의 콘크리트적인 관행에 맞서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끌려가듯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그 부분을 잊지 말고 주재원 근무를 해달란 의미로 그렇게 말을 했던 거다.
그렇게 하게 된 중국 출장이었다.
감사팀과 법무부 직원들로 의전팀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상무보의 이번 중국 출장은 사장님 권한을 대행하기 위함이라는 증거였다.
비리를 완전히 걷어내기 위한 의전팀의 지휘자 역할과 더불어 나와 손 팀장, 그리고 안 대리에게 실무적인 부분을 주문해야 하는 입장이라, 박 부장의 어깨는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수속을 모두 다 끝내고 청사 내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몇몇 의전 담당자들과 함께 흡연실로 들어온 상무보.
난 상무보가 담배를 피우는지 몰랐다.
“혹시 멘솔 있는 사람 있어요?”
의전를 담당한 감사팀 직원이 권하는 담배는 자기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먼저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와 손 팀장에게 멘솔이 있느냐고 묻는 상무보.
손 팀장이 자신의 담배 한 개피를 건넸고, 불은 내가 붙여주었다.
“회사의 매뉴얼은 실수를 하면 안된다.”
“...?”
“그렇게 말했다고요?”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네, 상무보님.”
“순간 소름 돋는 줄 알았어요. 전무님이 입에 달고 계시는 말씀이시거든.”
“...아, 네.”
무슨 의미였을까...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려놓고 이제 막 하늘로 비상하는 창 밖 비행기만 가만히 쳐다보는 상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