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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54화 (54/325)

# 54

자기 속이 자기 속인 사람

“...장향은 입니다.”

장향은은 결코 무례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안낙현과의 첫만남에서부터 불쾌한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미소띈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장향은을 오래 봐온 내 입장에선 저 미소가 어떤 미소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지혜 입니다.”

“크흐...팀장님.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다같이 막창에 소주 한 잔 어떻습니까? 여기 이렇게 넷이서.”

시한폭탄은 중국에서 핵폭탄으로 변해 우리팀으로 떨어졌다.

“갑시다, 제가 살게요. 콜? 콜? 향은 씨, 지혜 씨 콜? 막창집 그대로 있죠, 그거?”

“...”

“왜 그 영업부 전체 회식할 때 자주 가던 그 집 말이에요.”

입에 모터를 달면 저렇게 되는 걸까?

쉬지않고 이어지는 안낙현의 수다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거 같았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장 차장이 우릴 살렸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장 차장님!”

그렇게 장 차장을 급하게 불러놓고 내게는 “가서 인사만 하고 금방 올게요.” 하며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을 하는 안낙현이었다.

“...왔냐?”

“아니 어떻게 된게 4년 동안 오히려 더 젊어지신 거 같습니다? 차장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뭐 그런 겁니까? 그나저나 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안그래도 부장님한테 인사 드리려고 내려왔다가...”

다행히 목표물이 바뀌었다.

장 차장 옆에 딱 달라붙어서 다시 조잘조잘 거리기 시작한 안낙현.

안낙현이 장 차장을 따라 부장, 차장 자리가 있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 장향은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설마 업무 시간에도 저렇게 정신없는 건 아니겠죠? 정말 주위 사람들 혼을 쏙 빼놓는 분이시네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첫인상 임팩트는 확실하네요.”

“아까 그...미모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는...”

“신경 쓰지마세요. 그래도 미녀 1,2호 소리 들었잖아요?”

장향은은 자신은 괜찮다는 식으로 미소를 지어보인 후,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안낙현.

사실 나는 안낙현을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한다.

내가 홍성에 입사를 하고 7개월 째인가, 8개월 째인가에 중국 주재원 근무를 가버렸으니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이 들어봤다.

특히 장 차장이 나와 안낙현을 두고 했던 말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너랑 3팀의 안낙현이 둘을 딱 섞어놔야 하는 건데...”

시종일관 경직되어 있었던 신입사원 시절의 나.

당시 장 차장은 그런 날 보며 아직 군기가 살아있어서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또 필요 이상의 긴장으로 안해도 될 실수를 할 때엔 안낙현과 날 비교하며 조금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을 자주했었다.

안낙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호불호가 확실하게 나뉜다.

나는 불호 쪽이었고, 양 대리는 긍정적으로 괜찮게 보는 모양이었다.

자기 속이 자기 속인 사람.

왜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라도 입버릇 처럼 “지금 내 속이 내 속이겠냐?” 와 같은 말을 한 번쯤은 하거나 들어봤을 거다.

그런데 아마 안낙현은 100퍼센트 자기 속이 자기 속인 사람일 거다.

눈치 같은 걸 잘 안보고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모나거나 강해서 선배들을 상대로 도전을 하거나 개기는 스타일은 절대 아닌 걸로 알고있다.

자칫 애매한 경계를 절묘하게 잘 지켜가며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야하나?

아니, 편하게 한다고 하기 보다는 절대 손해보는 일은 안 당하는 스타일?

신입사원의 부당함.

당시 난 그런 걸 따지지 않았었다.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냥 말 그대로 까라면 까는 스타일이었다.

난 그랬다.

이게 부당하다, 아니다를 따지는 게 내 입장에선 더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었으니까.

그냥 하라는 게 있음 최대한 빨리 해치워버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대부분의 신입들이 나와 비슷했을 거다.

하지만 안낙현은 달랐다.

실실 웃는 얼굴로 선배들에게 자신은 좀 빼달라는 말도 할 줄 알았고, 부당한 부분에서 선배들한테 혼이 나면 겁을 먹기 보다는 삐치는 모습을 보여 혼을 냈던 선배 당사자를 당혹스럽게 만들 줄도 알았다.

그리고 영업부 전체 회식 때엔 유일하게 고기를 굽지 않는 팀 막내였다.

보통 회식 자리에선 막내가 고기를 굽기 마련.

하지만 안낙현이 있는 팀에선 그의 바로 위에 선배가 고기를 굽고 안낙현은 대리, 팀장들의 빈 술잔만 확인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일전에 팀 회식날 고기를 다 태웠다고 한다.

고기를 굽다가 하도 못 구워서 그의 바로 위에 선배가 그냥 집게랑 가위를 달라며, 자기가 직접 구울테니 넌 그냥 먹으라고 했는데, 그때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집게와 가위를 넘기며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던 건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그리고 지금의 안낙현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가장 강력한 일화가 바로 중국 주재원 근무 신청에 관한 일화이다.

당시 홍성에선 해외 사업부의 파워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사드가 터지기 몇 해 전이었다.

한국 브랜드에 대한 중국인들의 만족도가 절정을 찍고 있을 때였으니까.

물론 주재원 근무는 경쟁이 치열했다.

인사부가 올린 신청 조건은 입사후 1년이었지만, 사실상 그건 말이 안되는 거였고 최소 대리급에서나 신청이 가능했다.

그것도 평소 윗선에 잘 보인 대리급.

일반 사원급에선 100퍼센트 해외사업부 직원들만 갈 수 있었던 게 바로 중국 주재원 근무였다.

그런데 거기에 안낙현이 신청서를 넣었다.

팀장을 통하지 않고, 바로 인사부에 가서 직접 신청을 했다.

물론 당시 영업 3팀장을 비롯해 많은 고인물들은 안낙현을 비난했다.

비난의 이유는 집단 생활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였고, 지나치게 뺀질거린다는 부차적인 이유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안낙현의 도전을 조용히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처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사람들,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뒤에서 조용히 안낙현의 중국 주재원 근무 신청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밌게도 모두가 안 될 줄 알았던 안낙현의 중국 주재원 근무 신청이 통과가 되면서, 그 후로는 신입들도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신청은 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난 안낙현을 내 회사 생활 경쟁 상대로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저런 스타일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고 확신을 했으니까.

그를 비난했던 고인물들과 비슷하게 나 역시 사회 생활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안낙현를 판단했던 거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제와 생각을 해보면, 정작 사회 생활이 뭔지 몰랐던 건, 군대에서 배웠던 딱딱한 위계질서가 몸에 익었던 내가 아니었나...하는 의심도 든다.

그를 뒤에서 욕했던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홍성을 떠났고, 안낙현은 비록 나보다는 승진이 늦은 편이지만 입사 동기들보다는 빨리 팀장을 달고 다시 홍성 본사로 복귀를 했으니까 말이다.

“잠깐만요.”

박 부장, 장 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안낙현.

그는 날 향해 손을 뻗어 잠시만 기다려달란 말을 남기고 엘레베이터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10분 정도 후에 작은 박스 하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자, 이건 우리 공 차장님 선물...”

“이게 뭡니까?”

“보이차, 운남성에 여행갈 일이 있어서 그때 샀던 거예요. 낱개로 들어있어서 그냥 머그컵에 한 알 넣고 물 부어 마시면 돼요. 하루종일 우러날 거니까 이렇게 한 알 넣어놓고 계속 물만 부어서 마시면 돼요. 그리고 이건 우리 향은 씨꺼. 향은 씨 앞으로 나랑 같은 팀이라면서?”

“...네.”

“그래서 특별히 꽃차. 이거 공 팀장님한테 드린 거 보다 더 비싼 거예요. 국화 한 알만 넣으면 돼. 그리고 영업부 최고 미인 우리 지혜 씨는 이거.”

“가, 감사합니다.”

“정직원 확정 났다면서요? 대박...완전 축하해요. 그리고 이거 나머지는 탕비실에 좀 옮겨줘요. 다른 팀 직원들 다같이 나눠 마시게. 원래는 해외사업부 탕비실에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거기 사람들이 날 딱히 반겨주지를 않네. 완전 실망. 그래서 그냥 영업부 사람들이랑 나눠마시려고. 역시 날 반겨주는 건 영업부 뿐임. 오늘 마치고 다같이 한 잔하는 거 잊지말고. 그럼 난 퇴근시간 맞춰서 다시 온다. 아차, 아차...내 정신 좀 봐. 잠깐만, 잠깐만...”

그러더니 박스 안에서 중국 술 두 병을 꺼내 다시 차장, 부장실로 향했다.

“우와...정말 정신 없네요.”

장향은이 이번엔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나타난 안낙현은 자신의 손목 시계를 손짓하며 퇴근 후 약속을 잊지 말라는 듯 아무도 못 알아듣는 사인만 남기고 영업부 사무실을 떠났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네요.”

“하아...예전엔 저렇게까지 하루종일 업된 스타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근데 오늘 마치고 진짜 술 마시러 가야하는 건가요? 전 지금 이번주 내내 베터리 한 칸으로 버티로 있는 상태예요.”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향은 씨랑 지혜 씨는 바로 퇴근하세요. 다같이 하는 술자리는 양 대리님 출장 복귀하면 그때 가지는 걸로 하죠.”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낙현이 다시 영업부 사무실을 찾았다.

“저기 안 대리님.”

“네, 팀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좀 힘들 거 같아요.”

“뭐가요?”

“양 대리님이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며칠 동안 거의 죽어나고 있어요.”

“아...”

“이틀 뒤에 양 대리님 출장 복귀하시면, 그때 2팀의 이 대리까지 불러서 다같이 한 잔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향은 씨, 지혜 씨 둘 다 방전되기 일보직전 상태거든요.”

“...할 수 없죠.”

“회식 분위기는 다음에 다같이 내는 걸로 하고 오늘은 그냥 저랑 같이 저녁이나 할까요?”

“크흐...역시 최소 배우신 분!”

개인적으로 몇 가지 당부할 게 있었다.

안낙현이 가고싶다고 했던 막창집에서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건 아니고...그냥 편하게 들어주세요. 앞으로 잘 해보자는 의미로 하는 말이니까. 아까처럼 홍성이 여직원들 뽑을 때 외모 보고 뽑느냐느니 그런 말은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오케이, 오케이. 조심할게요. 내가 아까는 너무 하이였어요. 오랜만에 영업부 사무실 냄새를 맡으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버렸어. 앞으로 조심할게요.”

이런 사람이다, 안낙현은...

자기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상대의 힘을 빼놓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난 이 말을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같이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인정을 해버리면 내 입장에선 힘이 빠질 수 밖에.

그래도 알아듣고 주의를 하겠다고 하니 마음은 놓였다.

그래, 사차원이기는 해도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가 주의를 준 부분은 알아서 신경을 써 줄 것이다.

“중국 생활은 어떠셨어요? 주재원 근무 할 만 하던가요?”

“...?”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제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요?”

“제가 왜 주재원 근무 연장 안하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는지 모르고 계세요?”

“아뇨?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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