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본격적으로 다이나믹 해지겠네
점심 시간.
탕비실의 키 낮은 냉장고 위로 비타500 네 박스가 올려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영업부 전 직원들을 향한 한 통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그동안 부족한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홍성 인터 영업부 전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저는 오늘까지만 근무를 하고 홍성 인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장님, 차장님 이하 각 팀의 팀장님들 그리고 많은 선배 대리님, 후배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 홍성 인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영업 3팀 대리 장광웅 올림. -
드디어 때가 오기 시작했다.
상반기 인사 시즌에 비해서는 그나마 덜 하겠지만, 그래도 올해는 특히 많은 이동이 예상되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진행되는 하반기 인사.
주 대리의 팀장 승진이 공고에 붙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3팀의 장 대리가 인수인계를 모두 마치고 오늘을 끝으로 홍성을 떠나게 됐다.
사직서를 제출했단 소릴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른 모양이다.
장 대리가 남긴 짧은 편지 아래로 그가 준비한 비타 500을 한 병씩 챙겨간 영업부 직원들이 롤링 페이퍼처럼 그에게 한마디 씩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일종의 전통이다.
우리 홍성 영업부의 전통.
떠나겠다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 만들어진 전통.
사실 말이 그렇고, 그 실상은 업계가 워낙에 좁다보니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미리 약을 치는 거다.
장 대리 같은 경우는 꽤 대형 브랜드 지사로 팀장 자리를 제안받고 옮겨간다고 들었다.
그 브랜드가 혹시 나중에 홍성을 상대로 라이센스 계약을 요청해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
어차피 가겠다고 결심한 사람.
보낼 때 보내주더라도 서로 기분 좋게 안녕을 하고 나중을 도모하자는 영업맨들 특유의 계산이 바닥에 깔린 전통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나 역시 비타 500 한 병을 꺼내들고 편지에 한 마디 남겼다.
-당신의 새로운 도전을 멀리서나마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영업 5팀 팀장 공은태-
점심 식사를 끝내고 약을 챙겨먹기 위해 탕비실을 찾았던 장향은이 장 대리가 올려놓은 비타 500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차례대로 장 대리의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탕비실을 찾았고, 마침 내 차례였다.
난 탕비실을 나와 3팀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장 대리는 다른 팀 직원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오늘이었어요?”
“네, 팀장님.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정신이 없다. 언제 간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게 오늘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H.I 건으로 그동안 눈코뜰새 없이 바쁘셨잖아요.”
“그래도 같이 소주 한 잔 못하고 이렇게 보내자니까 너무 아쉽네.”
“명함 한 장 주십시오, 팀장님.”
이 역시 일종의 전통이다.
난 내 명함 한 장을 꺼내 장 대리에게 건넸고, 장 대리의 명함을 받아 그 자리에서 스마트 폰에 장 대리의 전화번호를 저장시키고 다시 돌려주었다.
“진짜 언제 시간 만들어서 소주 한 잔 해요.”
“네, 그리고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뭘?”
“차장 진급...”
“아...아직 한참 남았어요.”
“그래도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른 직원들이랑 인사 나눠요.”
며칠 뒤면 영업 1팀의 신입사원 한 명도 적성을 핑계로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을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인사 시즌만 되면 다들 각자의 입장들로 사무실 전체가 어수선해지기 마련.
특히 며칠 전 박 부장이 주 팀장의 팀장 승진 공고가 붙자마자 주 팀장을 포함한 팀장 전원을 소집해서 앞으로 분할되게 될 영업부 청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그 이후부터 더 많이 어수선해진 거 같다.
나의 차장 진급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걸 기반으로 김 팀장이 끌고 갈 영업 마케팅부와 내가 끌고갈 영업 기획부가 정해졌다.
그리고 손 팀장이 이끌던 영업 2팀은 완전히 분해시키기로 결정났다.
그 미팅 자리에서 박 부장은 김 팀장을 지목해서 팀 세 개만 가지고 가라고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김 팀장은 그게 무슨 뜻인지 따져 고민해보지도 않고 오로지 차장 타이틀 확정에 흥분해서 그렇게 하겠다 대답했다.
현재의 2팀을 분해시키고 3팀을 2팀으로, 4팀을 3팀으로 당기는 이 작업은 김 팀장의 입장에서 최대한 막을 수 있으면 막았어야 하는 부분인데, 그걸 하지 못했다.
내 눈엔 박 부장의 의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던데, 그게 안보였던 모양이다.
아님 보였지만,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거나.
며칠 전 팀장 미팅 자리.
“현재 손 팀장이 데리고 있는 이 대리는 앞으로 영업 기획부 소속으로 옮겨.”
손 팀장이야 어차피 갈 사람이다 보니 발언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였다.
각 팀의 부족한 맨파워를 2팀을 분해시켜 충당하라는 지시였는데, 영업 기획부 입장에서야 큰 상관이 없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브랜드를 그대로 다 가지고 가면서 팀을 새롭게 정비해야 하는 영업 마케팅부의 입장에선 여러 잡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지시였다.
“그리고 영업 기획부는 빠른 시일 안에 나크리스 단독 매장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최대한 많은 매장 확보할 수 있도록 하고, 그거 완성되는대로 영업 마케팅부로 넘겨.”
“네.”
확실한 교통정리였다.
영업 마케팅부는 지금껏 홍성 영업부가 해왔던 영업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를 하는 부서, 그리고 내가 맡아나갈 영업 기획부는 편집샵이나 다른 특수 종목을 발굴하는 부서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케팅부로 넘기라고 했지만, 나크리스는 아무리 빨리 정상화를 시킨다고 해도 최소 반 년 이상은 걸릴 브랜드다.
H.I 편집샵과 동시에 나크리스에서 올라올 매출을 당분간은 영업 기획부로 잡아주겠단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장 차장이 좀 더 구체적인 부서 맨파워를 거론했다.
사실상 상반기 인사 확정이 그 자리에서 나고 있는 거였다.
“양 대리가 팀장으로 올라가면서 이 대리가 그 뒤를 받쳐주면 될 거 같고, 어차피 나크리스는 이지혜가 컨트롤 하고 있는 브랜드니까 이지혜도 양 대리가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씀은 그 안에서 다른 팀을 하나 더 만들란 말씀이십니까?”
“그럼, 당연하지. 현재 2팀 분해해서 이 대리까지 영업 기획부로 옮겨주겠다 하시잖아. 그 맨파워를 가지고 달랑 1팀 체제로 간다는 건 말이 안되지.”
“그렇긴 한데, 한 팀에 최소 4인은 붙어줘야 하는 상황에서 고작 이 대리 하나 받는다고 팀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거기다 장향은과 박기태. 그 둘을 팀장없는 체제로 돌리는 것도 사실상...”
난 개인적으로 현재의 팀워크를 반으로 쪼개고 싶지가 않았다.
원래 내 스타일 자체가 분산 보다는 몰빵형이다.
H.I를 계속 파다보면 다른 파생되는 아이템이 눈에 보일 거란 확신도 있었고.
하지만 내가 언뜻 비춘 뜻에 장 차장이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뒤에 숨어있는 듯했다.
“안낙현이 있잖아.”
“...!”
속으로 숫자 18이 계속 떠오르는 순간이다.
“안그래도 다음주가 한국 복귀라고 하더라고. 근데 현재 해외 사업부엔 팀장 티오가 하나도 안 남아있고...우리가 받아줘야지. 원래 우리 식구였잖아.”
“낙현이 그 놈 아직 대리입니까?”
손 팀장이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곧 자신이 가게 될 중국 주재원의 실정이 궁금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손 팀장 너는 여기 후배 팀장들 다 있는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싶냐? 그리고 그정도면 딱 정상적인 거지 뭐. 들어와서 팀장 달면 그래도 동기들 중엔 빠른 편이잖아. 그 이상 얼마나 더 빨리 팀장을 달 수 있겠어? 회사가 어디 너네들 승진 시켜주려고 존재하는 곳이냐?”
“아니,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4년 전에 중국 넘어갈 때 이미 대리 달고 갔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난 4년 동안 계속 대리를 달고 있었다고 하시니까 혹시 뭐 가서 사고라도 쳤나...해서요.”
“사고를 쳤음 진작에 한국 보냈겠지. 아님 거기서 바로 커트를 했던가.”
“하긴...”
“정상적인 거야. 대리 달아서 보내주고 4년 뒤 팀장 달아주면 맞는 거지. 안 그래.”
“네, 맞습니다.”
“나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 하다가 이 이야기 하고 있는 거냐?”
“안낙현이 한국 들어온다고...”
“나도 요즘 나이가 들어서 오락가락해. 내가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면 옆에서 말려야 할 놈이 삼천포로 빠지게 만들고 있어. 아무튼 안낙현이 오면 영업 기획부 2팀장 자리 하나 줘서 장향은이랑 박기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세팅 해 놔. 내년 상반기 인사 있기 전까지는 다들 조금 아쉽겠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어. 차장 대리, 팀장 대리 체제로 가는 걸로 하고. 손 팀장 넌 있는 동안 현재 2팀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분산 제대로 해놓고 가라. 그거까지 똥싸놓고 가면 나 진짜 너 두 번 다시 안본다.”
“부장님도 참...”
차장 대리를 하는 건 큰 문제가 안된다.
어차피 승진이야 확정이 된 상태이고, 영업 기획부가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기 전까지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기에.
그정도는 나도 그렇고 양 대리 역시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안낙현을 받아야 한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안낙현...
딱 나와 양 대리 사이에 끼인 기수다.
나나 양 대리처럼 홍성 상반기 공채 출신은 아니고 하반기 상시모집을 통해 홍성에 입사한 인물인데, 입사 후 1년을 딱 다 채우고 2년차에 들어서자마자 자진해서 중국 주재원 근무를 신청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개인 사업을 하셔서 고등학교까지 중국 텐진에서 나왔고, 중국어가 자연스럽다보니 주재원 발탁에 큰 가산점을 받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 덕에 오랫동안 중국 주재원을 준비하고 있었던, 지금은 이미 홍성을 떠난 어느 누구는 주재원 근무의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었고.
물론 실력이다.
안낙현의 실력이 확실하다.
그것까지 부정하면 그건 진짜 피해의식인 거고.
실력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기에 그 부분에 비난을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로 인해 당시 영업부 내의 분위기가 썩 그리 좋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중에 별도로 인사부에서 공고를 붙일 건데, 현재 있는 계약직 직원들.”
마치 노이로제 걸린 사람들마냥, 자리에 모인 팀장들 모두는 계약직 직원들이라는 박 부장의 한 마디에 숨을 죽였다.
“딱 지금있는 애들까지만 받고 더 이상은 계약직을 받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눈알을 굴리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상황.
현재 있는 계약직 직원들에게 재계약의 기회조차 없다는 뉘앙스였으니까.
그리고 그 인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을 시키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년 상반기 공채때 홍성에서 계약직 생활을 한 부분에 대해 가산점을 주기로 했다. 자세한 부분이야 공문 내려오면 그때 알아서 챙겨보고, 공채에 관심이 있는 인원들에 한해서 팀장들 능력껏 준비시켜라.”
냉정한 말이지만, 어쩌면 새로 부임한 인사부장의 입장에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패를 꺼내든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모두를 만족시키겠나.
재계약, 정규직 전환을 미끼로 1년, 2년, 길게는 3년까지 싼 값에 쓰고 있는 계약직 직원들.
분명 가능성이 없는 직원들도 있을 건데, 각 팀 팀장들은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로 희망이라는 고문을 가해가며 어떻게든 팀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게 현 실정이다.
“대신 그 자리에 6개월 짜리 인턴들을 뽑아 넣기로 했다.”
신의 한 수가 될런지, 아님 절대 꺼내들지 말았어야 할 패를 꺼내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부장이 계약직 직원들에 관한 부분에 확실한 변화를 주기로 작정을 한 건 틀림없었다.
이럴 땐 쓸데없는 걱정 보단 응원을 해주는 게 맞는 거 같단 생각이 든다.
“인턴 시스템이야 다들 어색할 거다. 나도 사실 인턴이랑 계약직이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 잘 모르겠고. 1년이냐 6개월이냐의 차이지,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게 아닌가 싶은데, 또 인사부장 생각은 그게 아닌 거 같으니까...아무튼 다들 금방 적응하리라 믿고, 인사부장이 처음 인사부장 타이틀로 진행하는 일이니까 최대한 협조 할 수 있도록.”
팀장 미팅을 끝내고 팀원들에게 미팅 내용을 전달할 때였다.
“안낙현...”
유일하게 양 대리만이 그 이름에 반응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팀에서는 나와 양 대리 말고는 아무도 그 존재를 실제로 본 사람이 없다.
“회사 생활 본격적으로 다이나믹해지겠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정확하게 몰랐을 거다, 그때 양 대리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딱 거기까지가 며칠 전에 있었던 팀장 미팅, 그리고 그 미팅 내용을 팀원들에게 전달하며 양 대리와 장향은의 승진 확정을 더이상 묵히지 못하고 알리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신세계 측으로부터 H.I 편집샵 오픈 1차 컴펌을 받아낸 우린 곧바로 다음 시즌 컬렉션 오더를 위해 재무 리스크 팀과 대대적인 미팅을 가졌다.
주문량이 세 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기에 만토바측과 마진 조율을 새롭게 해야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마진을 1퍼센트라도 더 깎아보기 위한 만토바 출장은 양 대리가 박기태를 데리고 가기로 최종 결정됐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 양 대리가 박기태를 데리고 만토바 출장을 가있는 동안 중국에 주재원 근무를 갔던 안낙현이 본사로 복귀한다.
물론 복귀는 영업부가 아닌 해외 사업부로 했다.
하지만 자기도 들은 게 있겠지.
인사를 하겠다고 영업부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와 장향은, 그리고 이지혜가 정신없이 업무를 쳐내고 있던 바로 그 때 우리팀 사무실 파티션을 두드렸다.
“하이, 브라더!”
마침내 올 것이 온 건가...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 오랜만이네요, 은태 씨. 아니다, 아니다...내가 미쳤구나. 오랜만이에요, 공 팀장님! 이야...얼굴 좋은 것 좀 봐. 난 지금 썩을대로 썩었는데. 확실히 서울 물이 센젠보다는 나아요, 그렇죠? 근데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썰렁해요? 양 대리님도 같은 팀이라고 들었는데...”
“만토바 출장가셨습니다.”
“크흐...만토바. 벌써부터 설레는구만...그건 그렇고 요즘 뭐 홍성 본사는 여자 직원들 뽑을 때 얼굴 보고 뽑아요? 하나같이 다들 왜 이렇게 미모가 출중해?”
장향은과 이지혜을 향해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금방 목소리를 낮춰 주위 다른 팀을 확인하는 척 연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구나...이팀에 영업부 미녀 1,2호가 다 모여있는 거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막 중국에서 넘어온 안낙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