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피아노가 있는 집
피아노가 있는 집이라...
전혀 예상을 못했던 물건이 거실 한쪽 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을 못했던 물건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강혜선의 이미지에 교양이라는 느낌을 더해주기에 충분했다.
현관과 거실 사이에 유리로 된 미닫이 중문이 하나 있었다.
그 중문은 이미 벌써부터 활짝 열려져 있었고.
중문 안으로 들어자 현관 입구까지 강혜선의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선한 인상이셨다.
이미 강혜선의 스마트 폰에 저장되어 있는 가족사진을 통해 봤었지만, 사진으로 봤던 것 보다 더 선한 인상이셨고, 긴장하며 찾아온 손님을 위해 따뜻한 미소까지 지어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내가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건네받으시며 집안으로 안내를 해주시는 강혜선의 아버지.
집안으로 들어서자 거실 한쪽에 검은색 피아노 한 대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옆으로는 놀랍게도 런닝 머신이 세워져 있었다.
집을 이렇게 꾸밀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매치가 안되는 조합인데, 평소 정리정돈을 잘해서인지, 아님 의도하고 저렇게 배치를 시켜서인지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어서 와요.”
그리고 주방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모습을 드러낸 강혜선의 어머니.
속으로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선은 몇 차례나 자기 어머니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었다.
마치 내게 경고라도 하듯.
그런데 내 눈엔 강하기는 커녕 무척이나 온화해 보이셨고, 또 나 못지 않게, 아니 나보다 더 긴장을 하고 계시는 거 같아 보였다.
“뭐 이런 걸 다 사가지고 왔어요?”
강혜선의 어머니는 남편이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와 이제 막 내가 건넨 와인병을 동시에 받으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집에 있던 거 한 병 가지고 왔습니다. 와인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좋아하긴요. 그냥 병원에서 술을 마실 일이 있으면 간단하게 와인을 한 잔씩 하라고 해서 취미를 붙인 게 어쩌다보니 계속 와인만 마시게 된 거지.”
“파리 출장을 갔다가 그곳 현지인이 괜찮은 와인이라고 추천해서 한 병 사본 건데, 맛이 어떨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안 먹어봤습니다.”
“맛있겠지. 아무튼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요. 혜선아.”
“응?”
“과일이라도 좀 미리 내와야겠다.”
목소리까지도 상당히 따뜻하신 분이었다.
오히려 불편한 쪽은 강혜선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분명 선한 인상을 가지고는 계셨지만 말수가 적으셨다.
강혜선이 과일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들고 계시던 리모컨을 건네시며 “보고싶은 거 있음 봐요.” 라고 하신 게 전부.
난 “아닙니다, 아버님 보시고 싶으신 거 보세요.” 라고 대답했고 그 이후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다행히 강혜선이 과일 접시를 올린 쟁반을 가지고 와서 소파가 아닌 바닥에 앉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줘서 망정이지, 강혜선이 없었다면 무척이나 불편했을 거다.
“아빠 왜 말이 없어?”
“무슨 말?”
“집에 사람을 불러놓고 왜 텔레비만 봐? 사람 불편하게...”
“아빠는 뭐 편해 보이냐, 지금?”
나도 모르게 피식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역시도 사위가 될지도 모를 사람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고, 또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걸 그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다.
“그...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서른 넷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아버님.”
“그거야 뭐 저녁 먹으면서 같이 소주 한 잔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고...고향이 부산이라고?”
“네.”
“나는 통영.”
“아...”
“말투 딱 보면 대충 답 나오잖아.”
“네, 안그래도 저희쪽인가? 했습니다.”
“술 좋아해요? 하긴 뭐 영업직이면 안좋아해도 말술이겠지.”
“좋아합니다. 좋아하기도 좋아하고 또 그 덕에 직장생활 처음 시작할 때 점수도 많이 땄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분이셨다.
난 당연히 그 뒤로 뭘 더 물어보실 줄 알았는데, 그냥 낚시 채널에 시선을 돌리시더니 그 후로 말이 없으셨다.
“왜 자꾸 텔레비만 봐. 평소엔 잘 보지도 않으면서...”
“생각 중. 뭘 물어볼까...”
여전히 낚시 채널에 시선을 고정시키신 채 그렇게 말씀하셨다.
“평소에 운동은 좀 하나?”
“아뇨, 안하고 있습니다.”
“해야 되는데...”
아마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아...이분들도 나 못지 않게, 아니 나보다 더 많이 긴장을 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긴장이 옅어지기 시작한 게.
하긴, 옛날에 누나가 처음 매형을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전날부터 대청소를 하시고 또 매형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 누나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고, 또 외출할 때나 입으시는 옷을 차려입으시고...
지금 이 분들도 그때 내 부모님과 비슷한 기분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됐던 거 같다.
“아버님은 운동 하십니까?”
“예전에 회사 다닐 땐 테니스도 좀 치고 했는데, 요즘은 시간 날 때 산이나 한 번씩 올라가지 그것 말고는 딱히...”
“아버님은 약주 좋아하십니까?”
“그냥 뭐...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거짓말. 이거 거짓말이에요. 매일 마셔, 매일. 소주 한 병? 어떨땐 한 병 반.”
딸이 하는 고자질에도 강혜선의 아버지는 여전히 낚시 채널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셨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즈음 현관쪽에서 비밀번호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강혜선이 일어나며 “언니 왔나봐요.” 하고 말했다.
난 재빨리 일어나 강혜선과 함께 현관쪽으로 갔다.
강혜선의 언니와 형부, 그리고 참 말 안듣게 생긴 6살짜리 남자 아이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나눴고, 어색한 분위기라는 걸 느껴볼 겨를도 없이 강혜선의 어머니가 준비한 식탁에 빙 둘러 앉았다.
의자가 하나 부족해서 형부라는 사람이 책상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와 거기에 자신의 아들을 앉혔다.
“오 서방도 소주 한 잔 해야지?”
“당연히 해야죠, 오늘 같은 날.”
그리고 또 한 번 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선에 의하면 형부라는 사람은 오냐오냐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가진 전형적인 스타일이어야 하는데, 의외로 서글서글했다.
이제는 처가 식탁이 편한 듯 자신이 먼저 일어나 장인의 술잔을 채우고 내 잔까지 채워주었으며, 또 내가 일어나서 술을 따르려고 하자 괜찮다며 편하게 앉아서 달란 말까지 했다.
“홍성 인터네셔널이면 그 회사잖아요, 저기 그 뭐냐...왜 갑자기 기억이 안나? 여보 그 브랜드 있잖아.”
“뭐?”
“왜 예전에 당신 하얀 원피스 샀던데.”
“JR?”
“그래, 그거. 그 브랜드 중국에 유통시키는 회사잖아요. 대기업이에요, 홍성 인터네셔널이면.”
이 역시 약간 의외였다.
홍성 인터네셔널이 업계에선 탑이지만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홍성이 취급하는 브랜드들은 어지간하면 다 알겠지만 말이다.
홍성이 국내 여성복 브랜드 JR을 중국에 유통시키고 있다는 걸 알 정도면 평소 경제 신문을 챙겨보는 사람이거나 주식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 말 맞죠?”
“네, 맞습니다.”
“거 봐, 맞잖아. 근데 주로 국내 브랜드를 해외로 유통시키는 것 보다 해외 명품을 가지고 들어와서 국내에 유통시키는 게 더 많지 않나요?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네, 그것도 맞습니다. 제가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회사 전체 매출 80퍼센트가 해외 명품 쪽에서 올라왔습니다. 근데 지금은 해외 유통 쪽도 무시 못할 정도로 커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저기...은태 씨한테 말하면 가방 같은 거 좀 싸게 살 수 있는 거예요?”
강혜선의 언니가 물었고, 그녀의 남편은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브랜드에 따라 가능한 것도 있고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꺼려지는 브랜드도 있고 그렇습니다.”
“만약에 싸게 사면 얼마나 싸게 살 수 있어요?”
“참 질문 퀄리티 뛰어나다, 진짜. 그게 지금 집에 손님을 불러놓고 할 질문이야? 안 그렇습니까, 장모님?”
“싸게 살 수 있으면 싸게 사면 좋지.”
와인잔을 기울이며 강혜선의 어머니가 말씀하셨고, 형부 되는 사람은 본전도 못 건지고 입맛만 다시며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그동안 내가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식사 자리 내내 그런 가벼운 질문, 얼마든지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말고는 딱히 받아본 질문이 없었다.
조금 조심스럽게 대답을 해야하는 질문이라고 해봤자 요즘 직장인들 평균 정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업계는 어떻냐는 정도?
그것 역시 구체적인 대답을 원하고 하신 질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하신 질문 같아 보였고.
집안 형편이나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가족들의 신상에 대해선 일절 물어보지 않으셨다.
그런데 딱 한가지 식사 자리 내내 마음에 걸렸던 건, 형부라는 사람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그리고 밝게 행동을 하고는 있지만, 슬쩍슬쩍 장모의 눈치를 살핀다는 거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는데, 오히려 장모를 대하는 모습보다 장인에게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다.
강혜선의 언니 내외는 저녁 식사만 같이 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식사를 끝낸 그릇들을 설거지 하는 동안 모두가 거실에 모여앉아 까불랑까불랑 거리는 꼬맹이의 재롱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설거지를 끝내기가 무섭게 꼬맹이를 재워야 한다는 핑계로 먼저 돌아가버린 언니 내외.
나도 이쯤에서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강혜선의 아버지가 “술 한 잔 더 해야지?” 라며 식탁으로 다시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강혜선의 어머니가 간단한 음식으로 술상을 차려주셨고, 그렇게 부모님들과 나, 그리고 강혜선 이렇게 넷이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듣기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결혼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올 정도면 뭔가 우리 혜선이한테 확신이라는 게 섰기 때문이겠죠?”
“네.”
“어떤 점에서 그런 확신이 섰어요?”
참 난해한 질문이었다.
차라리 집안, 가족사를 물으시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해드리면 되는 건데,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몇 주 전에 회사로부터 중국 주재원 근무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질문을 하셨던 강혜선의 어머니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셨고, 아버지는 대답을 시작하는 날 자신의 사위로 삼아도 될런지 찬찬히 뜯어보셨다.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미 동기들보다 1,2년 정도 팀장 승진이 빠른 상태인데, 거기에 한 직급 더 올려 차장 승진을 시켜서 보내주겠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혜선 씨가 멀리 보자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혜선 씨의 생각이 100퍼센트 옳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혜선 씨의 말을 100퍼센트 따르고 싶었습니다.”
“흐음...”
“혜선 씨와 상의를 하기 전엔 조율이라는 걸 해보려고 했는데, 혜선 씨의 생각을 듣는 순간 그냥 난 앞으로 이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저보다 현명한 여자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조금 덜 현명한 사람이 조금 더 현명한 사람 말을 듣는 게 그 현명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도 들었던 것 같고...”
“똑똑하네.”
무슨 의미가 담긴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날 보며 똑똑하다고 말씀을 해주셨고, 그 말에 강혜선의 아버지 역시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혜선이가 하는 말이 결혼을 하면 회사 근처에 같이 돈을 모아서 빌라 같은 다세대 주택에 전세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던데...우리가 좀 도와줘도 괜찮나?”
“...?”
난 강혜선을 쳐다봤지만, 강혜선은 내가 아닌 그 말을 꺼낸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혜선이가 그러더라고. 은근히 자존심이 있어서 도움같은 건 안 받으려고 할 거라고. 근데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선 그래요.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서 가려고 하면 안타깝지. 부모가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도 아니고...”
“음...혜선 씨도 그렇고 저도 그동안 혜선 씨가 저한테 했던 말들을 살짝 오해했던 거 같습니다.”
“무슨...”
“결혼을 한 뒤로도 매달 부모님의 생활비를 용돈 삼아 챙겨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저희 집 형편과 비슷하다라고만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용돈이야 주면 당연히 좋지. 그걸 싫어할 부모가 어딨어요? 그건 그거고, 우리가 해주겠다고 하는 건 별개로 놓고 봐야지.”
그걸 별개로 놓고 볼 수도 있는 거구나...
강혜선의 집이 무척 잘사는 집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처음 이 집에 들어와서 본 거실의 크기, 그리고 거실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보는 순간, 내가 강혜선에게 들었던 것 보다는 형편이 괜찮은 집이란 걸 눈치챘다.
그리고 부모님이 아버지 은퇴 후 받은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열어 운영하시지만, 직접 편의점 브랜드 조끼를 입고 일을 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
알바를 쓰는 거겠지.
분명 강혜선은 자신의 집안 형편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내 기준, 내가 가진 경험만 가지고 이해를 해왔던 모양이다.
“1억 정도...혜선이 애 시집 보낼때 보태주려고 모아놓은 게 있어요. 애 언니 시집 보낼 때는 해줬는데, 애만 안해주기도 좀 그렇잖아, 부모 입장에서. 그동안 두 사람 열심히 일해서 모아놓은 돈에 그 1억 보태고 또 두 사람 회사 통해서 각각 대출 좀 받으면 회사 근처에 작은 거라도 깨끗한 아파트 하나 사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두 사람이 그렇게 시작을 했으면 좋겠는데...물론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도 들어봐야 하겠지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