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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8화 (18/325)

# 18

현금으로 13억이 있습니다

30만 원만 해달라는 말,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누나가 월급을 받으면 갚아주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또 반복되는 상황에 숨이 막히고...그런 감정이 들었던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또에 당첨이 되고 지난 2주 동안 나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뭐라도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었던 거 같다.

그게 분명하다.

내 안에 베이스를 깔고 있는 "마땅함"이라는 감정이 날 그렇게 만들었던 거 같다.

생각해보면 난 로또에 당첨이 안됐을 때도 그 "마땅함"을 내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고 있었는데, 로또 당첨이 그 "마땅함"의 기준을 올려놓았던 모양이다.

정말 가족들로부터 지원 한 푼 받지 못하고 시작했던 서울 생활.

어머니는 살고 계신 집을 담보 잡아 원룸 전세금이라도 만들어주겠다 하셨지만, 내가 싫다고 했었다.

그 와중에도 그 "마땅함"을 다하기 위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부모님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드렸고,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조카 용돈에 때에 따라 집안 경조사비, 그리고 작년부터는 지금처럼 매형에게 10만 원, 20만 원, 정말 많을 때엔 50만 원씩 야금야금 뜯겨 왔었다.

다른 돈은 다 하나도 안 아까운데...매형한테 뜯기는 돈은...그래 이 돈도 크게 아깝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여기서 더 하면 결국 내가 바보고 문제인 놈이 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로또에 당첨이 안됐다고 생각하자.

나 그냥 지금부터 그러려고.

어머니 말씀 하나 틀린 거 없다.

없던 돈이 생기니 어느새 내게도 매형이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생겨져 있었다.

내가 미쳤지.

어머니, 아버지한테 매달 백만 원씩을 보내드려?

진짜 미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한테는 절대 안된다.

기죽어 있는 사위 보기가 안쓰러워, 그 불편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또 아들이 올려드리는 용돈으로 한 푼, 두 푼 매형을 챙겨주실텐데, 그걸 드리겠다고?

그나마 어머니는 이제 매형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그으셨다.

그리고 이젠 매형이 더이상 해먹을 재산도 없고.

현재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재산이라고 해봤자 현금은 아예 없고, 살고 계신 명륜동 아이파크 34평 짜리 한 채와 수선집 상가가 전부다.

그건 매형이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부분.

어머니도 몰라서 당했지, 매형의 스타일을 진작에 알았다면 이런 어이없는 실수는 안하셨을 거다.

나머지는 이미 진작에 매형이 다 해먹었다.

부모님이 아들 장가갈 때 목돈을 만들어주실 거라고 연산동에 월세를 놓고 있던 LG아파트도 매형이 깔끔하게 해드셨다.

부모님이 가지고 계시던 노후대비 만기 적금까지 다 깨드셨고.

어제 어머니가 아영이 포함, 누나 내외에 대해 이야기 하시는 뉘앙스만 봐도, 어머니 역시 이젠 확실하게 선을 그으신 게 분명하다.

생각을 해보니까 난 더이상 불안해 할 게 없는 몸이다.

짧은 1초 사이에 그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한 번에 명쾌하게 정리가 됐다.

누나가 월급을 받으면 갚아주겠다는 그 한 마디 덕분에.

매형은 날 똑바로 볼 자신이 없던지 애먼곳으로 시선을 돌려 맥주캔만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30만 원이랬나?

이건 지난 2주 동안 내 안에서 생겨난 가족에 대한, 더 정확하게 말해 누나 내외에 대한 이유없는 책임감으로부터 해방시켜준 댓가라고 생각하고 그냥 줄 생각이다.

30만 원으로 더 크게 나갈 돈을 막아버린 느낌이다.

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누른 뒤 5만 원권 6장을 눌러놓고, 명세표는 받지 않겠다고 버튼을 눌렀다.

이 돈은 지금 이 순간 이후 바로 기억에서 지워버려야지.

돈이 준비되는 동안 ATM에 붙어있는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똑똑히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나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내려놔라.

착한 아들이 되겠다는 욕심, 좋은 동생이 되겠다는 욕심...그것들 조금만 내려놔라.

네가 그걸 내려놔야, 부모님도 누나도 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 같다.

이미 넌 충분히 할 만큼 했다.

그러니 이제 조금만 내려놔라.

그렇게 나 자신에게 말하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나왔다.

"출근하고 싶다..."

내가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혼잣말 같은 건 잘 안하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출근을 하고싶다는 말이 툭하고 튀어나왔고, 그 순간 회사가 부모님 집보다 더 편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돈을 찾아서 나왔다.

매형은 여전히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맥주캔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건넨 돈을 받아 접어서는 티셔츠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아직 절반 이상 남은 커피를 들고 일어났다.

"벌써 갈라고?"

"가야죠."

"...그래, 고맙다. 잘쓸게."

"..."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갚는다더니...

갚는다더니 돈을 받은 뒤엔 그냥 잘 쓰겠다며 마치 내가 그냥 돈을 준 것마냥 말을 바꿔버린다.

저 뻔뻔함...정말 할 수만 있다면 매형을 반품시켜버리고 싶다.

"저 저번에 왔을 때 얼른 장가가라고 하셨죠?"

"..."

"저 진짜 장가 갈 수 있을까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매형도 같이 좀 걱정해주세요, 말만 하지 마시고."

"...!"

"저 가요. 적당히 드시고요."

아영이의 독서실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1분, 1초라도 빨리 탈출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부산역에 도착해서 아영이에게 전화는 한 통 걸었다.

"똥깡아지."

-삼촌 어딘데?

"삼촌 지금 서울 올라간다."

-벌써?

"어, 갑자기 일이 좀 생깄다."

-혹시 또 아빠하고 일 생긴 거가

"뭔 소리 하노? 아이다, 그런 거. 회사 일이다. 아빠하고 삼촌 아무 일도 없으니까 니는 그런 거 신경쓰지말고 공부나 해라."

-일요일에 뭔 회사 일이고?

"원래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다. 삼촌이 점심 때 독서실 잠깐 들리가 우리 똥강아지 좋아하는 스파게티라도 같이 먹을라 했드만,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뿠네. 다음에 내려와서 사줄게."

-또 언제 내려오는데?

"2주 뒤에. 지현이 삼촌 결혼식 있다이가."

-아, 맞다.

"우리 똥깡아지."

-아, 와자꾸 똥깡아지라 부르노!

"삼촌이 우리 똥깡아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제?"

-뭐라노 또...

"라고 할 줄 알았나. 공부 안하고 딴 짓 하다가 걸리라 진짜...죽는다. 1등이 바로 코앞이다. 긴장 풀지마라."

-아, 됐다고, 재미없다카니까 그 철지난 아재개그 와 자꾸 하는데.

"크흐흐흐...알았다, 알았다. 너무 빡세게 하지말고, 쉬엄쉬엄 해라이. 삼촌 인자 기차 탄다."

-전화할게.

"말만 하지 말고..."

-...알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지난 2주 동안 지를까, 말까, 지를까, 말까...지르면 언제쯤 지를까를 몇 천번도 더 고민했던 일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일요일인데 영업을 하시네요."

난 공인 중개소 안으로 들어가며 안에서 혼자 업무를 보고 있던 50대 중반의 여성에게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렸다.

"해야 이렇게 손님도 받죠? 하하하. 어떻게 오셨어요?"

"음...집을 좀 보려고 하는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다.

한 번 들어왔다고 무조건 이 곳에서 집 계약을 해야하는 건 아니겠지만, 일단 결심을 했고, 그걸 실행에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이 살짝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어떤 집을 찾으시는 건가요?"

"어...제가 직접 들어가 살 집은 아니고요, 월세를 좀 놓을 수 있는 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여자는 편안한 미소 뒤에 그 정도 정보만으로는 전혀 감이 안온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위치나 아님 생각하고 계신 타입이 있으세요?"

부동산 초짜인 걸 들켜도 상관없다.

어차피 다른 공인 중개소도 가능하면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볼 생각이니까.

일단 현재 내 컨디션을 있는 그대로 다 까놓고 정보를 수집하는 게 더 현명할 거 같았다.

"현금으로 13억이 있습니다."

여자의 눈썹 끝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크게 놀란 거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 의외네? 하는 감정만이 살짝 스며있을 뿐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을 그렇게 하고 봐서 그렇다는 거지, 여자가 노골적으로 그런 뉘앙스를 풍긴 건 아니었고.

여자는 정중했다.

"그런데 이 13억이 인터넷으로 좀 알아보니까 강남권에 부동산 투자를 하기엔 상당히 어중간한 액수더라고요."

"글쎄요...뭐 얼마나 큰 수익을 기대하고 계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때 13억을 현금으로 가지고 계시다면 전혀 어중간한 액수가 아닌데요?"

"은행 대출 같은 거 가급적 안 받고, 가지고 있는 돈 안에서 그나마 월세가 꾸준히 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아파트를 하나 사고 싶거든요."

여자의 두 눈이 진지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냥 간을 보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듯 해 보였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커피말고, 그냥 물 있으면 한 잔만 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뒤 작은 에비앙 생수통에 종이컵을 뒤집어 씌운 걸 가져와 내 앞으로 내려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상가나 오피스텔 쪽은 관심 없으시고요?"

"공격적인 고 수익을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간이 작아서 모험을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괜히 대출끼고 투자했다가 월세 들어올 사람이 없어서 대출 이자 갚느라 고생하는 것 보다는 그냥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월 한 300 정도 받을 수 있는 물건을 잡을 수 있음 좋을 거 같아요. 중간에 비는 텀 없이 세입자가 계속 들어와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심적으로 큰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는 투자를 하고 싶거든요."

"간이 작은 건 절대 아니신 거 같은데...13억을 한큐로 박겠다고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런가요?"

"흐음...월 300, 13억에 월 300이라...그럼 최대한 덜 받는다고 해도 보증금 5천에서 7천 사이는 들어올 거니까 14억 언저리로 찾아보면 될까요?"

"세금 같은 건 어떻게 되나요? 취득세나 뭐 다른..."

"물론 사람에 따라 무시할 수 없는 액수일 수도 있는데, 14억 언저리라는 기본틀이 나오면 또 어떻게든 그 안에 다 맞춰지니까요."

"아, 네..."

"급매로 나오는 물건 같은 경우는 집주인하고 잘만 쇼브 치면 14억 언저리에 월 300까지는 힘들어도 월 250정도 받을 수 있는 물건은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잡고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하던 여자.

잠시후 약간 아쉽다는 투로 이런 말을 꺼냈다.

"물론 사람 성향에 따라 매입 방식이 다 다르긴 하지만, 대출을 하나도 안끼고 사는 건 어떻게 보면 좀 아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개인적으로 말이죠."

"생각을 많이 안해야 되는 돈이라서 그렇습니다."

"...?"

"가만히 은행에 넣어두기엔 시간이 지날 수록 가치가 떨어질 거 같아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어디 주식이나 펀드 같은 곳에 투자를 하자니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간이 작아서 불안하고...그런데 또 은행 이자보다 높은 수입을 보고싶고. 훗, 거기다 한 방에 구입을 해버리면 나중에 진짜 큰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온전히 제 명의인 그 집 담보로 필요한 만큼 대출을 내서 쓰면 되니까요."

"직장인이시죠?"

"네."

"영업쪽?"

"와..."

"훗, 하지만 저희라고 무조건 다 맞추는 건 아니에요. 처음 들어오실 때 신혼집 알아보러 오신 줄 알았거든요."

"그랬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하하."

"저 역시 집 팔고 수수료 받아먹는 사람이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이 하는 말 백퍼센트 다 믿지는 마세요. 저희가 고객들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건 아니지만, 저희가 백퍼센트 옳은 추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이죠. 결정은 제가 하는 거죠."

"하지만 고객님 같은 컨디션에 이 마인드로 부동산에 접근을 하신다면 월 500은 플러스 할 수 있을 거예요."

"월 500이요?"

순간 깜짝 놀랐다.

"시세 차익이라는 게 있잖아요. 매달 들어올 월세 플러스 시세 차익도 생각을 하셔야죠."

"전 오히려 월세가 안나갈 수도 있다고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투자를 하는 중이라..."

"진짜 부동산 마인드는 다 갖추셨네. 13억이면 아무리 강남이라도 어지간한 브랜드 24평, 27평대는 다 찔러볼 수 있어요, 아직은. 물론 대형 브랜드 신축은 조금 애매하기도 하겠지만, 가급적 분양을 받는 게 아니라면 신축은 피하는 게 상책이기도 하고. 또 급하게 시세 차익을 기대하는 투자가 아니라 몇 년 꾸준히 묶어둘 생각을 하고 계신 거니까 몇 년 뒤 되파실 때 틀림없이 집 값은 현재 생각하고 계시는 것 보다 더 많이 올라 있을 거예요."

여자는 자신이 지금 내게 약을 팔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왜 강남 불패신화라는 말이 있겠어요? 못 들어와서 그렇지, 일단 들어만 오면 열에 아홉은 재미를 보고 나가는 곳이니까 그런 거죠. 사람에 따라 그 재미를 느끼는 강도가 달라서 그렇지, 재미는 무조건 봅니다."

흔들리면 안된다.

그냥 내가 처음 했던 생각과 계획대로만 밀고 나가는 게 상책이다.

"대치동, 도곡동 쪽이 월세 빼기는 최고예요. 그리고 대출 없이 13억이면 24평, 27평 정도 작은 평수 쪽을 봐야하는데, 그 평수가 나중에 되팔기도 훨씬 수월하고."

"나와 있는 거 있음 몇 개 좀 보여주세요."

"지금 당장은 힘들고 연락처 하나 남겨주시면, 제가 내일 집 주인들이나 세입자들이랑 약속 잡아서 스케줄을 한 번 만들어볼게요."

"점심 시간대 말고는 제가 딱히 시간이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일 마치고 오세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아, 그럼요. 오히려 집 보여주는 사람들도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그 시간대가 훨씬 더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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