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7화 (17/325)

# 17

집사람 월급 받으면 바로 갚아줄게

"씰떼없는 소리 하지말고 밥이나 무라."

역시나 어머니는 시크하셨다.

낮은 탁상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로 집에서 준비해오신 보온 밥통과 몇 가지 밑반찬, 그리고 이제 막 사가지고 오신 아구찜을 풀고 계시던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아들이 회사에서 또 승진을 했다는 말을 하셨다.

"엄마, 아빠가 어디 모지란 사람들로 보이나?"

"...!"

"승진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나이에 팀장 단 거도 남들보다 많이 빠르단 걸 누가 모리나? 근데 뭔 또 승진이고?"

"진짜라니까."

"고마해라 했다이. 엄마 화낸다."

어머니는 엄한 표정을 지으시며 아버지 앞으로 보온 밥통에서 덜은 밥을 내려놓으셨다.

"니는 그냥 니 인생 살아라."

어머니의 말씀을 끝으로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밥을 먹어야 했다.

"느그 누나도 일 새로 시작했고. 엄마, 아빠도 아직 일 하고 있는데 니까지 그랄 필요 없다."

"아영이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잖아요."

"그기 와? 아영이 그기 니 아가?"

"말 참 예쁘게 하신다, 우리 엄마."

"아영이 고등학교 올라가는 걸 와 니가 신경을 쓰노? 니는 그냥 니 벌어가 장가를 가든, 혼자 살든 니 앞가림이나 하면 돼."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아들의 장가 문제에 한 발짝 뒤로 포기하는 입장을 취하고 계신다.

딱 작년 이맘 때 쯤 부터였다.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비트코인.

우리 집에도 그 비트코인 탑승자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아신 이후부터 상당히 시크해지신 어머니.

그 전까지는 한 번씩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는 여자들과 선자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셨는데, 누나와 매형이 아영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많은 부분 포기 아닌 포기를 하고 계신다.

"집에 어른이 몇 명인데 아 공부 뒷바라지는 제대로 해주야 안되겠어요."

"누가 아 학교를 안 보낸다나, 아님 공부할 책을 안 사준다나. 느그 누나가 다 알아서 할끼다 그 정도는. 그거까지 우째 다 신경을 써줄끼고."

"그런 소릴 할 거면 애초에 밖에서 얼어죽든 굶어죽든 알아서 하라고 안 받아줬어야지."

울컥하고 뭔가가 목울대를 자극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말 없이 식사에 집중하셨고, 어머니는 크게 한숨을 토해놓으신 뒤 내 앞으로 밥 한 그릇을 내놓으셨다.

"니 뭐 느그 매형 닮아가나?"

"...!"

"씰떼없는 오지랖 그만 부리고 그냥 밥이나 무라."

나도 안다.

내가 지금 상당한 발암기가 섞인 고구마짓을 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이건 꼭 로또와는 상관없이 어떻게든 내가 하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조카가 공부를 잘한다.

아버지 되는 사람이 무능하다보니 알아서 철이 빨리 든 케이스다.

학원도 자기가 필요 없다며 안 다니는데, 전교 10등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공부에 독을 품고 있는 녀석이다.

자기 아버지가 봐야 할 눈치를 딸이 대신 보고 있다.

애가 무슨 죄겠나.

내가 누나와 매형을 직접적으로 도와주긴 싫은데...그건 정말 싫은데...아영이는 어떻게든 자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줄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마침 13억이라는 돈이 내 수중에 들어왔고, 그걸 부모님께 매달 백만 원씩 챙겨드리면 그 돈으로 두 분이서 이야기를 맞춰 알아서 외손주 교육에 신경을 쓰실 거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분들이시니까.

당신들이 하지 못하셨던 공부.

그 공부에 대한 기회를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하셨던 분들이다.

하물며 하나 밖에 없는 외손주인데 그걸 가만히 놔두실까.

하지만 지금 부모님 형편으로는 많이 힘드실 거다.

누나 내외는 현재 그냥 부모님 집에 얹혀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2천만 원이라는 빚까지 가지고 들어와 살고 있는 중이니까.

그 빚은 죽이 되든 밥이되든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 할 문제이고, 난 아영이 녀석 공부에 관한 부분만이라도 신경을 써줄 생각이다.

내가 직접하기 보다는 부모님이 그걸 대신 해주시게끔 뒤에서 지원만 해줄 거다.

그렇게 우린 한 달 넘게 만에 만나서 누나 내외 이야기가 잠시 나오기가 무섭게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식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혁대 함 풀어봐라."

식사를 끝내고 부모님의 삶터를 나서려고 할 때였다.

아버지가 허리띠를 풀어보라고 하셨다.

난 언제나처럼 아버지께 매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건네드렸고, 아버지는 전기 인두로 허리띠 구멍 부분을 지지셨다.

그리고 마술처럼 그 부위를 몇 번 꾹꾹 눌러서는 고리 모양대로 늘어난 허리띠 구멍을 새것처럼 만들어주셨다.

"얼굴 살은 홀쭉하니 빠짔는데, 배는 많이 나왔는갑다. 구멍이 한 칸 늘었네."

"...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적당히 마시라이. 아빠가 보니까 이거 다 술살이다, 술살."

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식사를 했던 자리를 정리하시며 어머니가 한 말씀 하셨다.

"지현이 만나러 간다고 했제?"

"네."

"지 결혼 할 여자 소개시키 주는 자리가?"

"소개는 무슨...예전에 한 번 봤어요."

"예쁘드나?"

"예쁘면 뭐하노,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에휴..."

에휴...

어머니가 내뱉은 그 한숨 속엔 참 많은 뜻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알았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일찍일찍 들어온나."

"기다리지 말고 거실에 이불만 깔아놓고 먼저 주무세요."

"또 그때처럼 코가 삐뚤어질때까지 마시고 들어와가 아영이 와있는 것도 깜빡하고 아 자는 방에 들어가가 아 기겁하게 만들지 말고."

"푸훕...크크큭...난 그거 기억도 안난다, 엄마. 그때 아영이 그거 비명까지 질렀다메?"

"지르지. 얼마나 놀랐겠노?"

"놀랄기 뭐있노, 삼촌인데."

"암만 삼촌이라도 여자아들은 남자아들하고 다르다. 조심해주라. 이제 다 컸다."

"크크큭...알았어요, 알았어."

지현이를 만나는 건 그냥 부산에 내려올 핑계에 불과했다.

가족들이 보고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싶었던 부모님도 식사 한 번 같이 하는 걸로 충분했고.

지현이와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4시간 넘게 남아있는 상황.

백화점에 들러 예전에 컨트롤했던 이탈리아 남성 의류 코너를 찾았다.

"아이고, 김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이게 누고! 공 대리님 아니십니까? 아니구나, 아니구나 이제 팀장님이죠?"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야 뭐 똑같죠."

"주말인데 백화점에 사람이 이래 없어서 어쩝니까?"

"하루, 이틀입니까, 어디."

"구두 하나 보여주세요."

"구두? 팀장님이 직접 신으시게?"

"...네."

몇 가지 디자인을 추천받았고 가격대비 그나마 무난한 놈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이거 275 한 번 신어볼게요."

내 발 보다 한 치수 큰 걸로 부탁을 해서 양쪽 모두 신은 다음 거울 앞으로 섰다.

"좀 큰데? 270으로 한 번 신어보이소."

"원래 좀 크게 신어요."

"암만 그래도 뒤에 이렇게나 남는데..."

"이걸로 하나 가져갈게요."

"...?"

"실장님 직원 할인 넣어주실 거죠?"

난 슬며시 웃으며 윙크를 보냈다.

"누구한테 줄라고 사는건데?"

"제가 신을 거라니까요."

"훗, 알았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장사도 안되는데, 이렇게 직접 오셔서 팔아주는 게 어딥니까. 30퍼센트 넣어드릴게요."

"구두 닦는 솔하고 깔창 두 개도 좀..."

"당연히 챙겨드려야지."

그렇게 지현이에게 결혼 선물로 줄 구두 한 켤레를 장만해놓고 센텀까지 가서 롯데와 신세계에 입점되어 있는 우리 팀 브랜드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1시간 먼저 지하철을 타고 동백역으로 가 마린 시티를 한 바퀴 둘러봤다.

마린 시티를 둘러봤다고 하기 보다는 한 집 걸러 하나씩 있는 부동산 앞을 지나치며, 그 앞에 붙어있는 아파트 시세, 그 중에서도 월세 가격을 확인해봤다.

한 바퀴 주욱 둘러보면서 확인을 해보는 것 만으로도 대충의 부동산 경기를 알 것 같았고, 확실히 부동산은 서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아무리 달맞이 쪽으로 LCT가 올라오고 용호동 쪽에 W가 올라갔다고 해도 그래도 명색이 마린 시티인데 몇 년 전에 우연한 기회로 부동산을 확인해 볼때와 비교해 가격에 큰 변화가 없었다.

약속 시간까지 20여분 남은 상태.

난 그제야 부랴부랴 지현이에게 줄 구두가 든 쇼핑백을 들고 백사장을 따라 파라다이스 호텔 쪽으로 걸어갔다.

파라다이스 호텔 근처에 거대 갈비라는 소고기 집이 있다고 한다.

나도 이름만 몇 번 들어봤다.

부산에서 제일 비싼 소고기 집이라고.

지현이가 거기서 소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나보고 자기 결혼식 사회를 봐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장을 한 벌 맞춰주겠다고 하길래, 정장은 됐고 맛있는 거나 사라고 했다.

매일같이 입고 출근을 하는 정장이야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아무래도 패션 업계에서 오래 일을 하다보니 옷을 보는 눈도 높아졌고.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잡으면 최소 백만 원이 넘어갈텐데, 사회 한 번 봐주고 그 정도 금액의 정장을 얻어입는 건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부담을 줄이자고 마음에도 안 드는 걸 골라 결혼식 당일 하루 입고 집에 가만히 쳐박아 두느니 그냥 평범한 정장 금액만큼 맛있는 걸 얻어먹는 게 더 경제적일 거 같았다.

그리고 사회를 보라고 하니 축의금을 내기도 애매하고 해서 축의금으로 생각하고 있던 50만 원 언저리로 구두를 하나 준비한 거고.

사실 내가 할인을 받아서 그 돈을 주고 산 거지, 정상적으로 샀음 80만 원은 넘어가는 구두다.

"아마 송지현으로 예약이 되어있을 거 같은데..."

"따라오세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룸으로 향했다.

미닫이 문 앞으로는 구찌 스니커즈화와 지미추 힐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건 또 뭐고?"

지현이는 내가 들고 들어온 쇼핑백을 눈짓하며 물었고, 난 녀석의 물음은 쌩까고 그냥 그 옆에 앉아있던 제수 씨 될 사람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언제 왔노?"

난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

"우리도 금방 왔다."

"자, 한 번 신어봐라."

"뭔데? 내끼가?"

"결혼식날 입장할 때 신으라고 하나 샀다. 신발 닦을 일 있으면 그냥 매장에 들고 가라. 공짜로 닦아줄끼다."

"매장에서 그런 거도 해주나?"

"그 브랜드는 그렇게 한다."

"크흐...역시."

"솔직히 니꺼 말고 제수 씨꺼 살라고 했는데, 내가 어데 제수 씨 싸이즈를 아나, 취향을 아나. 제수 씨꺼는 니가 알아서 더 좋은 걸로 사주라."

사실 제수 씨 될 사람은 몇 달 전에 친구들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처음 보고 오늘이 두 번째 보는 거다.

두 번째 보는 자리에서 뭔가를 선물을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될 뿐더러, 어지간한 명품은 성에 안 차는 스타일이란 걸 진작에 알고 있어서 그냥 지현이 신발을 샀던 거다.

듣자하니 여자가 있는 집 외동딸인 모양이다.

차도 검은색 벤츠 지바겐을 몰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가방만 봐도 확실한 거 아니면 취급을 안하는 스타일.

거기다 인품도 좋고 외모도 수준급이다.

말하고 보니까 사기캐네.

근데 진짜 사람이 괜찮다.

이젠 결혼이란 거에 어느정도 초탈을 한 나지만, 괜히 배가 아프고 또 장가 한 번 잘 간단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지현이는 괜찮은 상대를 만났다.

식사 자리 내내 제수 씨 될 사람은 운전 때문에 맥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전에 만났을 때 보니까 술도 곧잘 마시고 놀기도 잘 노는 스타일인 거 같던데, 느끼한 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참는다라...

거기다 고깃집을 나와서는 자기가 2차 장소까지 데려다 줄테니 둘이서 편하게 마시라는 배려까지 해줬다.

크흐...부러웠다.

저런 여자라니.

지현이는 최소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다.

다시 마린 시티 쪽으로 넘어와서 조선호텔 맞은 편에 있는 더베이 101 야외 테이블에 앉아 홍콩 야경이 연상되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을 올려다보며 지현이와 단 둘이 맥주를 마셨다.

"그나저나 느그 매형은 우짜노, 진짜..."

"하이고, 됐다. 그 양반 이야기 꺼내지 마라.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다."

"우리 어렸을 땐 느그 매형이 그래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는데...우리들 다 보는 앞에서 니한테 용돈도 팍팍 주고, 우리 다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도 자주 사주시고 했다이가."

"훗..."

"아닌 말로 우리 중에 나이키 맥스는 니가 제일 많았다이가. 느그 매형이 계속 사주가지고. 나는 그게 그래 부러울 수가 없었다. 기억 나나? 내 한 번씩 여자 만나러 갈 때마다 발에도 안 맞는 니 신발 한 번 빌려신어 보겠다고 느그집 찾아가서 신발 고르던거."

"기억 나지, 와 안나긋노. 니가 한 번 신고나면 신발 다 늘어나서 내가 얼마나 성질을 부렸노."

"참...그랬던 시절이 있었네, 우리도. 그라면 올해 느그 매형 연세가 어째 되시노?"

"연세는 무슨. 띠동갑 아이가, 우리하고."

지현이는 그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뭐 좋게 생각하면 다행이지."

내 말에 지현이는 피식하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좋게 생각해라. 안 그래도 서울 생활하면서 부산에 계시는 부모님 걱정 많이 했다이가. 인자는 뭐 누님하고 매형이 떡하니 한 집에 같이 살면서 모실낀데, 니 입장에서야 다행 아이가."

"맞다. 그래 생각하면 다행이지. 자주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때 되면 용돈만 부쳐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분데...그렇다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비슷한 직종이 부산에도 있어서 서울 생활 정리하고 내려올 수 있는 형편도 못되고."

"있다캐도 내려오지마라."

"...?"

"지금 부산은 지옥이다."

"...!"

"경기가 안 좋다, 안 좋다, 이래 안 좋은 건 또 처음이다. 서울이라고 크게 다르겠냐만, 부산 여기는 지금 특히 좀 심하다."

"그래도 아직 부산 물가는 서울에 비하면 숨은 쉬진다이가."

"재래 시장에서 장봐가꼬 집에서 맨날 밥 해먹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부산 홈플러스가 서울 홈플러스 보다 싸겠나, 부산 스타벅스가 서울 스타벅스 보다 싸겠나?"

"하긴..."

"고만고만한 퀄리티 유지하면서 살라카면 집값 빼놓고는 여기나 서울이나 큰 차이도 없을끼다."

"아참, 느그 신혼집은 구했나?"

"민락동에."

"아파트?"

"어, 동원 비스타라고 지어진지 2년 정도 되는 아파튼데, 또 나름 센텀존 아이가."

"아, 그 산 깎아서 만든 거."

"서울 사는 놈이 그건 또 우째 아노?"

"내야 뭐 부산 내려오면 센텀 신세계 계속 왔다갔다 한다이가. 거기서 뭐 바로 보이는데 와 모르겠노. 그거 비쌀낀데...사서 들어가나?"

"처가에서 해주시더라."

"졸라 부럽네..."

13억이 있어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지현이는 내가 지금 현재 술이 많이 고프다는 걸 눈치챘는지, 3차로 낙지를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마린 시티 안에 있는 오렌지 상가 안에 낙지 구워주는 집이 있다고 한다.

소주도 살짝 얼어있는 걸 판다며, 거기서 소주 한 병씩만 더 마시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렇게 소주 한 잔을 더 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벌써 12시.

음소거 된 티브이만이 어두운 거실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안 주무시고 거실 바닥에 누워 날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작은 방에서 누나가 나왔다.

"...왔나."

누나를 보는데...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누나를 보는데, 이상하게 취기때문인지 20대 시절의 그 예쁘던 누나의 얼굴이 오버랩 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부산에서 동아대까지 나온 사람이다.

교대와 동아대를 재다가 동아대를 선택했던 누나다.

당시 난 어렸지만, 두 군데 모두 다 붙어놓고 어딜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누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랬던 누나가 요즘은 집 앞 대형마트에서 캐셔를 보고 있다.

"자라."

"술 많이 먹었나?"

"얼마 안 먹었다. 들어가라. 들어가 자라."

"쇼파에 옷 내놨다. 갈아입고 자라."

"알았다."

아버지는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셨고, 난 혹시나 아영이가 나오지는 않을까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렇게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뜬금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 놈의 돈이 뭐라고, 거의 날 업어 키우다 싶이 했던 누나에게 로또 당첨 사실을 말하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난 이 놈의 돈이 뭐라고 누나가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선뜻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그 모든 생각들이 교차되면서 조금 전 완전 동네 아줌마가 다 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던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주책맞게 새어나온 눈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작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난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남자 발 소리.

매형의 발 소리였다.

화장실을 가나 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 근처에 멈춰선 듯 했다.

그리고...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다시 바로 만져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난 계속 자는 척을 했고, 매형은 한참동안 그 주위를 맴돌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누나는 이미 일을 하러 나간 후였다.

일요일 아침이라 아직 부모님 두 분 모두 집에 계셨고, 어머니가 주방에서 아침밥을 준비하신다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신 덕에 잠에서 깼다.

"더 자라."

"다 잤어요."

"어제 술 많이 마셨더나?"

"아니요, 그냥 좀..."

난 냉장고 문을 열어 그 안에 든 냉수를 꺼내며 트림을 한 번 했다.

"씻을라면 지금 들어가서 씻어라, 아영이 일어나기 전에."

그렇게 시작된 아침.

식사 자리 내내 매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 역시 상당히 불편했고.

그리고 아영이는 자신의 아빠와 외삼촌의 눈치를 살폈다.

"중간 고사 몇 등 했노?"

어색한 식사 자리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아영이에게 물었다.

"5등."

전교에서 5등을 했다는 말이다.

"저번 기말 고사때 8등 했다고 안했나?"

"응."

"올랐네? 기분 좋겠네?"

"그냥 뭐..."

"얼마나 좋겠노, 삼촌이 이래 좋은데..."

"삼촌 뭐 잘못 먹었나?"

"라고 할 줄 알았나. 긴장 해라. 조금만 더 하면 1등이다."

"그라면 그렇지."

"니 뭐 화장했나? 눈티가 와글노?"

"화장은 무슨. 술 덜 깼나?"

"다 큰 걸 깔치뜯을 수도 없고...니 공부 안하고 딴 짓 하다가 삼촌한테 함 걸리라. 진짜 지근지근 밟아뿐다."

아영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더 무라."

"배 부르다."

"배 불러도 더 무라. 원래 공부는 밥심으로 하는 거다."

난 억지로 아영이의 그릇에 밥 한 숟가락을 더 담았고, 아영이는 억지로 다 먹은 후 다시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는 아영이를 불렀다.

지갑에서 꺼낸 오만 원 짜리 두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걸 아영이가 가로채기 전에 재빨리 숨기며 말했다.

"독서실 가가꼬 하라는 공부 안하고 남자아들하고 어불리다니다가 걸리라. 진짜 다 지 뜯어뿐다, 알았나."

"하아...진짜..."

아영이가 돈을 가로채는 순간 난 아영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그 주먹에 성의없이 자신의 주먹을 붙인 아영이는 운동화를 꺾어신고 현관을 나섰다.

"일찍일찍 댕기라."

"알았다고!"

아영이가 나가고 난 뒤 다시 찾아온 어색함.

어머니는 설거지를 시작하셨고, 매형은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내 방이라도 있음 낮잠이라도 한 숨 자고 서울로 올라가겠지만, 이젠 내 방도 없는 상태.

난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11시 쯤 옷을 갈아입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지금 갈라고?"

매형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봐야지요."

"그래..."

"..."

"같이 나가자."

"왜요?"

"그냥..."

난 매형이 왜 같이 나가자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라고 장인, 장모와 한 공간 안에 함께 있는 게 마음이 편하겠나.

평일이면 모를까, 일요일엔 부모님 두 분 모두 집에 계시다보니 집안에서 매형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맥주 한 잔 안할래?"

엘레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매형이 물었다.

"낮술만큼은 하지 마세요, 매형."

"그냥, 간단하게 편의점 앞에서 맥주 한 캔씩만 하자."

"..."

난 맥주 대신 캔커피를 골랐다.

그리고 매형이 맥주만 하나 달랑 고르길래, 땅콩도 하나 같이 집어서 계산대 위로 올려놓았다.

그렇게 편의점 앞 간의 테이블에 앉아 매형은 맥주를, 난 커피를 대화 없이 마셨다.

그리고 한참 뒤에 매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은태야."

"네."

"흐음...돈 있으면 한 삼십만 원만 좀 어떻게 안되겠나? 집사람 월급 받으면 바로 갚아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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