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화 (2/325)

# 2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된다

"로또 당첨금 수령하러 왔습니다."

농협 서대문 지점.

로비 한 쪽에 자리한 데스크로 가서 로또 당첨금을 수령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행운 고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엘레베이터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3층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하긴 나야 처음이지,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매주 몇 명씩 당첨금을 수령하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할 테니 그리 놀랍지도 않을 거다.

청원 경찰인지, 아님 그냥 농협 직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반팔 와이셔츠 차림의 삼십대 남성이 대신 엘레베이터를 잡아주었고, 보안 마그네틱으로 3층 버튼을 눌러주었다.

그리고 3층에 도착하니 조금 전 엘레베이터를 잡아준 남성과 같은 복장의 다른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행운 고객님."

반응이 다들 너무 담백하다.

사실 폭죽이라도 터뜨리며 축하를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전혀 없고 사무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각자의 역할만 이행할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담백한 반응이 쉽게 이해가 됐다.

대리석 페인팅 타일이 깔려있는 좁은 통로를 따라 당첨금 수령을 도와줄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복권사업팀 대기실이라는 곳에 이미 나 말고도 두 명이나 먼저 와서 말 그대로 대기를 하고 있는 거다.

날 안내해준 남성이 앞의 당첨자 업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한 번 읽어보라며 투자 관련 상품 팜플렛을 건넸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되었을 땐 내 뒤로 수령금을 받기 위해 한 명이 더 왔다.

혹시라도 로또 1등에 당첨됐다면, 그것도 나처럼 중복 당첨자가 많이 나온 회수차에 담첨이 됐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수령을 받고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가급적이면 월요일은 피해서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타이밍 잘못 잡히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내 순서가 왔고 난 신분증과 1등 당첨 용지를 챙겨 담당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담당자의 사무실 역시 예상했던 것보다는 단촐해서 솔직히 조금 놀랐다.

농협 직원은 아닌 거 같았다.

아니면 농협 직원이지만, 그정도 멋을 내도 괜찮은 포지션이거나.

꽤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스커트와 흰색 자켓을 멋스럽게 차려입을 사십대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날 맞이했다.

그녀는 자신의 명함과 당첨금 수령 안내서를 동시에 건네며 수령받을 통장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 당첨 용지와 신분증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정말 축하드려요. 너무 좋으시겠어요."

"실은 아직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여기 오시는 대부분의 분들이 똑같은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렇겠죠."

"그런데 의외로 담담하시네요?"

"흥분은 이미 주말동안 충분하게 했습니다. 하하하."

여자는 이 일에 능숙해 보였다.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고, 수령 통장을 만드는 동안 쉬지 않고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자기네 투자 상품들에 대해 나중에 따로 설명을 들어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난 별도로 투자를 할 생각은 아직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만히 통장에 넣어두고 계시는 것 보다는 기본적인 상품 몇 개 정도는 들어놓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기대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천천히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돈이라 그런지 지금 당장 이걸로 뭔가를 한다는 게 괜히 불안하네요. 그리고 아직 실감이 안나서 그런지, 해주시는 말들이 귀에 잘 안들어 옵니다. 하하하..."

"그러시겠죠. 이해합니다. 그럼 수령 통장 계설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일반 예금 통장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몇 군데 정보를 기입하고 사인을 해야하는 란이 있었는데, 손이 떨렸다.

통장 개설이 진행되자 내가 진짜 로또에 걸린 게 확실하다는 사실에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수령 금액이 찍힌 통장이 내 손에 들어왔다.

통장은 골드 통장이라고 해서 농협에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통장이었다.

CMA 통장도 함께 만들어주던데, 이체 한도는 1회 1억 1일 5억으로 설정했다.

그러자 주거래 은행으로 돈을 이체시킬 거냐고 묻길래 그 역시 아직 생각은 안해봤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수령을 도와준 담당자는 가급적이면 이체를 시키지 않는 게 여러모로 편할 거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

"아무래도 주거래 은행으로 갑자기 큰 돈이 옮겨지면 그쪽에서 자기네 투자 상품 관련 연락을 계속해서 할 겁니다. 시스템이 그래요."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당첨금액은 1,928,246,542원.

끄트머리 떼고 19억.

소득세, 지방소득세 포함해서 세금으로 6억이 나갔다.

그래도 웃음밖에 안나오지, 없던 13억이 한방에 꽂혔는데.

"저기, 화장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볼일을 보겠다고 화장실을 찾은 건 아니다.

1,324,925,855원이 찍힌 따끈한 당첨 수령 통장을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이 필요했을 뿐.

담당 직원이 보는 앞에서 확인을 해도 될 일이지만,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기쁨을 만끽하며 혼자 느긋하게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변기 뚜껑을 닫아놓고 그 위로 앉아 수령 통장을 확인했다.

"후우..."

1,324,925,855원.

일십백천만...천만, 일억, 십억...13억...

난 몇 번이나 통장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선 이미 주말동안 충분히 생각을 해봤다.

그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

막상 13억이 생겨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다는 거다.

지금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 안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큰 돈인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금액은 아닌 거 같다.

오늘만 해도 이미 나만큼 가지게 된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다.

그것도 이 좁은 당첨자 대기실이라는 공간 안이서만.

아마도 로또 1등 당첨을 확인하고 지난 이틀 사이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보며 나도 모르게 돈에 대한 개념이 확 달라져버렸고, 또 간이 부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13억이 통장에 들어왔다고 해서 현재의 삶이 크게 바뀔 거 같지도 않았다.

물론 어느정도 바뀌기야 하겠지.

하지만 아예 다른 클라스의 인생으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현실적으로.

매주 만 원을 주고 내가 샀던 건 정말 로또에 걸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그 만 원으로 한주를 버틸 에너지였다.

요즘은 영화도 극장에 가서 제 돈 주고 보려면 그 정도 돈은 줘야하지 않나?

로또는 내게 딱 그정도 의미였다.

큰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주의 힐링.

통장은 서류 가방에 넣어놓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저 이제 가봐도 되는 겁니까?"

"진짜 금융 상품 상담 한 번 안 받아보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점심 시간 전에 회사 복귀를 해야해서요.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난 아까 여자에게 받았던 명함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여자 역시 강요할 마음은 없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로또 당첨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후우..."

난 농협을 빠져나와 혹시라도 누군가가 멀리서 숨어 날 지켜보지는 않을까란 말도 안되는 걱정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숨을 한 번 크게 내뱉았다.

그리고 곧바로 회사에 복귀를 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팀원들이다.

이런날 로또에 걸렸다는 말은 못하더라도 맛있는 밥 한끼 정도는 사줘야하지 않겠나.

그런데 사무실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20분 정도나 더 남아있는 시간이었다.

뭔가 싶어서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함께 사무실을 쓰는 영업1 팀 대리에게 우리 팀원들이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양 대리님이 다 데리고 점심 먹으러 가는 거 같던데요?"

"네?"

난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요?"

"10분? 20분? 정확하게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마 그쯤 됐을 거예요."

난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왔다.

그리고 영업2 팀 팀장이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 팀장."

"네, 손 팀장님."

"그...팀원들 신경 좀 써야겠다."

"..."

"아무리 위에서 부서별로 자율적인 업무 시간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배려지. 그 배려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쓰나? 다른 부서 사람들 다 일하고 있는데, 한 명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11시 20분에 단체로 우르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세상에 어딨어?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팀장 주도 하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팀장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야."

부끄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운 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결단을 내려야 할 거 같았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행동은 치솟고 있는 분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진행됐다.

곧바로 박기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팀장님 전화받았습니다.

당황한 음성이 확실했다.

물론 내가 사무실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밖에서 개인적인 업무 다 보고 전화를 건다는 뉘앙스로 통화를 이어갔다.

"오늘 오전에 별 일 없었죠?"

-네, 별 일 없었습니다.

"특이사항도 없었고?"

-네.

"아침에 전달했던 것들은 다 마무리 했어요?"

-어...아직 다 못했습니다. 퇴근 전까지는 마무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기태 씨한테 찾아놓으라고 했던 자료가 그렇게 많았나? 오전 두 시간 정도만 바짝 집중해서 찾으면 찾을 수 있는 내용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

-네?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냐고.

-...

"지금 다 어디에 있어요?"

-네?

"지금 다 어디에 있냐고!"

내가 친 고함 소리에 다른 부서 사람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중에는 내가 잘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 팀장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응원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부족한 리더쉽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질 정도로 난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쾌하고 또...속된 말로 쪽팔렸다.

"다 튀어와."

-...

"내 말 안 들려? 다 튀어오라고, 지금 당장. 10분 준다. 1분 늦을 때마다 퇴근 시간 30분씩 늘어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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