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오크 몽둥이 (1)
백진철은 다음 날 바로 레인에 관한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레인이라는 조직이 헌터들의 능력을 뺏는 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작전에 투입된 헌터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
예상대로 헌터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분위기가 어제랑 많이 다르네요.”
“어제까진 1층 공략이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로운 불안 요소가 생겼으니까요.”
송인혁의 말에 이민하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앙그라마이뉴에 던전 공략까지 신경 쓰는데 어디서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놈들이 숨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불안하겠지.”
능력을 뺏는다는 건 많은 헌터에게 두려운 것이었다.
특히, 특수계 헌터들은 그 능력으로 헌터 활동을 하고 있으니 능력을 빼앗기는 건 그들에게 헌터로서 죽음과 같았다.
“그래도 저는 이렇게 공표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경계하고 있으면 레인이 움직이기 힘들어지겠죠.”
“맞아요. 그리고 그런 정보를 숨기고 있다가 다른 피해가 생기면 협회도 곤란해질 테니까요.”
상황이 복잡하게 물려 있어서 협회가 곤란한 것도 이해가 되고, 헌터들의 불안감도 공감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공략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채하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던전 공략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원래 최상층 공략에 투입되는 헌터는 정해져 있었다.
그땐 게이트 공략이라는 안정적인 수입이 존재했기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최상층에 갈 필요가 없었다.
“전력이 한곳에 모였으니까요. 어쩌면 내일쯤이면 1층 공략이 마무리될지도 모르겠네요.”
송인혁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다른 층에서 게이트가 발생하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공략한 층이 많아지면 다시 공략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그럼 저희도 다시 움직이죠.”
1층에 남아 있는 게이트는 이제 셀 수 있을 정도로 그 숫자가 줄었다.
우리 조를 비롯한 5개의 조를 제외하곤 모두 던전 공략조로 옮겨졌다.
“저희에게 배정된 게이트는 여기 있는 것과 2층 계단 앞에 있는 게이트, 두 개네요.”
“이제 협회에서 게이트도 정해 주는 거예요?”
“아무래도 게이트 수랑 공략조 수가 적으니까 아예 나눠 놓은 것 같아요.”
송인혁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준비하세요!”
믿음직한 사람들이랑 같이 싸울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송인혁을 선두로 푸른색의 일렁거리는 게이트에 몸을 집어넣었다.
“……!”
“이건……!”
온통 하얀 배경의 아무것도 없는 공간.
내겐 익숙한 공간이었다.
나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는 채하나 역시 바로 눈치챈 것 같았다.
“이 게이트는 뭐지……?”
“유한성이 만든 공간이에요.”
“…뭐?!”
이민하가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우리를 이쪽으로 유도한 건가.
확실히 처음 유한성에게 당해서 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왔을 때도 게이트로 들어가는 감각과 비슷했다.
“송인혁 씨, 협회에서 저희 조에게 이 게이트를 배정해 준 게 맞나요?”
“협회 신분증을 보여 줬어요. 그 신분증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협회 내부에 스파이가 숨어 있다는 거겠군.
레인이 던전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백진철의 지휘 아래에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마 신분증을 위조해서 돌아다닐 만큼 쉽진 않았겠지.
“거지 같은 면상을 다시 보니 반갑네.”
까칠하면서도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문을 열고 유한성이 들어왔다.
그는 히죽거리며 우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난 바보가 아니야. 네놈의 능력은 반드시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필요하잖아?”
“정답.”
씨익 웃은 유한성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러자 우리 뒤에 있던 문이 감쪽같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건 유한성이 들어온 문이었다.
연결되는 문을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전에 있던 공간에선 다른 헌터들이 들어온 후였으니 자신들이 있는 쪽 문을 남기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우리 다섯뿐.
그가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간다고 해도 적진 한가운데라는 말이다.
“이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네.”
“나 혼자도 이기지 못했으면서 우리 다섯 명을 상대하겠다고? 그리고 네놈들이 모았던 몬스터도 모조리 죽었잖아?”
말로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조급한 건 내 쪽이었다.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공간에 우리를 가두고 정면 대결을 할 리 없다.
무언가 꾸미는 게 있다는 거겠지.
입을 놀려서 그게 뭔지 조금이라도 캐낼 수 있다면…….
“그거야 그렇지. 지금 우리 주교님께서 열심히 다시 모으고 있긴 한데, 영 신통치 않단 말이야.”
유한성은 감정적이고 까칠한 성격이다.
이렇게 대놓고 우릴 깔보는 듯한 얼굴로 떠들어 대는 걸 보면 역시 뭔가가 있나 보군.
계획 자체를 망가뜨린 나를 보고도 저렇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다니…….
“네 말대로 우리 길드는 네놈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었지. 그래서… 네놈의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면 이제 아무도 계획을 막지 못할 거다.”
씨익 미소를 짓는 유한성을 보고 화도로 손을 가져갔다.
“레인에 내 능력을 뺏어 오라고 의뢰한 게 네놈이었군.”
“쯧, 그건 아니야. 놈들이 먼저 내게 접근해 왔다. 원래 그런 놈들이거든. 재수 없는 자식들.”
유한성은 평소처럼 미간이 깊게 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뒤에서 구경이나 해 보실까.”
끼이익.
유한성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자, 다시 문이 열리고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저놈들이 레인인가요?”
송인혁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용물이 보이진 않지만, 놈들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굳이 이런 상황에서 유한성이 가짜들을 데리고 올 이유는 없었다.
3명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로브를 살짝 거두었다.
“최현 씨를 보니까 잘린 곳이 다시 아려 오는군요.”
“……!”
로브 안쪽엔 팔이 있어야 하는 곳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정면 승부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현 씨에게 당하기만 해선 자존심이 상하거든요.”
그는 잘리지 않은 팔을 들어 옆에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이쪽은 최현 씨의 수술을 담당할 저희 길드의 ‘퀸’입니다.”
“…….”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저 사람이 퀸인지는 알 수 없다.
최윤수가 기습해 왔을 때도 능력을 통해 킹인 것처럼 속였다.
퀸에게 능력을 뺏는 힘이 있다면 굳이 이런 곳에 위험하게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의심하시는 건 좋지만, 그러다가 정말 능력을 뺏길지도 모른다고요.”
킹이 내 머릿속을 읽고 있는 듯 말했다.
그에겐 이 사람이 퀸이라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어필할수록 오히려 의심할 수밖에.
“그리고 이쪽은 저의 오른팔인 ‘비숍’입니다. 여러분을 상대해 줄 겁니다.”
덩치가 커서 옆에 있는 킹보다 머리가 2개는 차이가 났다.
“마력계, 치유계, 그리고 초월 능력자까지…. 이번엔 제대로 한탕 하겠군요.”
킹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다른 조원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떨어지지 마세요. 놈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바로 능력을 뺏기진 않겠죠?”
설소은이 두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윤수는 능력을 뺏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어요. 그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순식간에 능력을 뺏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처음에 퀸이 내게 접근해서 능력을 뺏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내게 이상한 약을 먹이려고 했다.
분명 이유가 있겠지.
부웅-!
“온다!”
‘비숍’이라고 불린 덩치가 큰 그는 손에 묵직한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파앗!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우리 바로 옆에서 튀어나왔다.
쩌엉-!
“……!”
그가 송인혁을 향해 언월도를 힘껏 내리쳤지만, 옆에 있던 이민하의 방패에 막혀 버렸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여도 상관없다는 건가.
“순간 이동…! 다들 조심해요! 떨어지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놈을 향해 바로 화도를 뿜어냈다.
카각!
언월도의 몸통을 옆으로 꺾어 공격을 막아 낸 그는 다시 눈앞에서 사라졌다.
“보기와 다르게 성가신 능력을 가지고 있네요.”
칠흑의 묵갑을 착용하면 나도 단숨에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쿨타임이 있어서 저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번 사용할 수는 없었다.
송인혁의 말처럼 그의 능력 때문에 우리는 움직이기 까다로워졌다.
우리는 반응할 수 있겠지만, 채하나나 설소은을 노리고 들어오면 위험할 수 있다.
“제가 해 볼게요!”
설소은이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며 무언가 중얼거렸고, 이내 그녀 앞에서 파도가 일었다.
촤아악!
앞으로 나아가며 그 기세를 더한 파도는 마치 쓰나미처럼 그들을 덮치려 했다.
“이런, 안되지.”
따악!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유성이 손가락을 튕겼고, 설소은이 만든 쓰나미 앞에 거대한 문이 생겨났다.
촤아악!
문이 파도를 집어삼킨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공간 안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문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안형석은 한유성이 만드는 공간의 총면적은 제한되어 있다고 했다.
무한한 감옥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제가 저 비숍이라는 놈을 처리할게요. 다른 분들은 여기서 떨어지지 말고…….”
“안 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민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리 말했잖아. 이제 허락 안 해 줄 거라고. 놈들이 노리는 건 너야. 다른 둘의 능력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이민하는 평소와 달리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녀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이었는데, 지금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못 본 사이에 그녀도 성장한 거겠지.
“알겠어요. 그럼 어쩌죠?”
“나랑 송인혁 씨는 놈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 우리가 비숍을 처리할 테니까 너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엄호해 줘.”
이민하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재밌군요. 저희 간부들은 오직 실력으로만 뽑힙니다. 얕보시면 곤란해요.”
쿠웅!
비숍이 언월도를 바닥에 찍어 누르자, 묵직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거슬리는 것부터 처리해 드리죠.”
송인혁이 이민하 뒤에서 사슬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파앗!
다시 모습을 감춘 비숍이 이민하 뒤에서 나타났고, 사슬을 팽팽하게 당긴 송인혁이 그의 언월도를 막아 냈다.
카가가각!
몸을 휙 돌린 이민하가 반격하려는 순간, 비숍의 모습이 사라졌다.
“…! 최현 씨!”
카앙!
역시 두 사람을 노린다는 건 페이크였나.
놈의 공격을 화도로 막아 내고 한 걸음 물러났다.
“이중 트랩이라고 아냐?”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유한성의 손바닥이 푸른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