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1 vs 길드 (4)
화도가 뿜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커… 헉!”
바닥에 쓰러지는 붉은 로브의 남자를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싸우고 있다.
아무리 베고 도망치길 반복해도 계속해서 쫓아왔다.
[최현 Lv.53
체력: 1851/5350 마나: 285/530 기력: 11/30
힘: 126 민첩: 85 지능: 62
(사용 가능 포인트: 14)
라이프 : 1821개]
기력이 상당히 깎인 상태라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놈들은 마치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처럼 나를 쫓고 있었다.
통신계 능력을 이용해서 내 위치를 공유하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가며 압박해 오고 있다.
다수를 한 번에 상대하는 건 버겁지만, 하나씩 덤비는 건 내 상대가 되질 못 한다.
포위망이 워낙 두텁고 커서 빠져나가는 건 무리다.
이젠 나답게 싸우는 수밖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어떻게든 이겨 주마.
“주변에 인간들이 잔뜩 깔려 있어. 숫자가 너무 많아.”
“알고 있어. 잘 봐 둬,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니까.”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바로 앞을 지나가는 헌터에게 뛰어내리며 등에 화도를 꽂아 넣었다.
“크아악!”
그의 비명을 듣고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붉은 로브의 사람이 활시위를 당겼고, 바로 인벤토리에서 칠흑의 묵갑으로 갈아입었다.
파앙!
그가 쏜 화살은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블링크로 단숨에 그의 뒤로 이동한 나는 등을 길게 베어 냈다.
“커헉!”
“이쪽이다!”
“뒤는 바다야! 몰아넣었어!”
그들 말대로 이쪽은 바다라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활을 들고 있던 남자의 로브를 벗겨 내서 급히 도망쳤다.
“로브를 갖고 도망쳤어!”
“놈이 우리로 변장할 수도 있다. 조심해!”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은 확실하게 믿는다.
라이프 섀도우.
나와 똑같이 생긴 분신이 허겁지겁 바다 쪽으로 뛰어갔고, 그사이 나는 로브를 입고 내 분신을 쫓았다.
“여기야! 이쪽으로 간다!”
내 목소리를 들은 다른 헌터들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바로 앞에 내가 만든 분신이 도망치는 걸 보고 아무런 의심 없이 그를 쫓기 시작했다.
“몰아넣어! 여기서 처리한다!”
분신을 쫓느라 진짜인 내게 완벽하게 등을 내주고 있었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허리춤에서 화도를 빠르게 뽑아내며 그들의 무방비 상태인 등을 그었다.
쌔엥-!
화왕이 훑고 지나가자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쓰러졌다.
“크어억! 대… 대체 왜… 무슨 짓을…….”
“아아, 제가 공을 세워야 포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일부러 공격한 헌터들을 기절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헌터들을 선동하는 데 필요한 존재니까.
휙 돌아선 분신은 나를 향해 공격해 왔고, 자연스럽게 화도를 들어 분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
카앙!
경쾌하게 울리는 검의 소리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은 내 앞에 검을 마주하고 있는 게 분신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할 거다.
그대로 다시 분신이 도망치며 내가 그걸 쫓는다.
로브를 쓴 채로 슬그머니 분신을 쫓는 걸 멈추고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분신은 필요 없다.
내 정보가 알려지기 전에 서둘러 포위망 반대쪽으로 이동하여 숨을 돌렸다.
“후우… 역시 숫자가 너무 많네.”
답답한 붉은 로브를 벗어 던지고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이제 내부에 변절자가 있다는 것도 통신계 헌터를 통해 알려지게 된다.
내가 로브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으니 아직도 누군가 변절자가 숨어 있는 건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다.
분신은 끝까지 도망치다가 싸우고 죽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다.
그리고 본체인 나는 죽은 뒤 부활한 연기를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형씨, 엄청난데?!”
“그래 봐야 제자리걸음이야. 이 계획을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선 반드시 그 여자를 처리해야 해.”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
그 능력은 너무나 위험한 능력이다.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이 세계의 균형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로는 한 번에 조종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에 한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세뇌한 몬스터는 지속 시간 없이 계속 조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게 아니라면 200마리가 넘는 몬스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지속 시간이 상당히 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여자 주변엔 블루 라벨 몬스터가 깔려 있어.”
“…그게 가장 큰 문제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좋은 여자다.
애초에 그러니까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겠지.
지금 내 목표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움직이지 않은 채 완벽히 주변을 방어하고 있다.
“자, 그럼 어떻게 뚫어 볼까.”
처음부터 블루 라벨의 몬스터까지 조종할 수 있었던 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초월 능력은 기본적으로 ‘성장’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강화되어 더 강한 능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능력이 무서운 것이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정말 아르티아 같은 몬스터까지 조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여기서 끝을 내야만 한다.
“가장 먼저 빈틈을 만들어야겠어.”
“빈틈?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거지. 정확히는 나보다 자신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일단 지금까지 계획은 성공적이다.
대부분 인원이 분신을 쫓아 해안가로 향했고, 정신 나간 배신자 연기를 한 덕분에 여러 명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
즉, 이쪽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줄어 있다.
스킬창을 열어 보면 분신의 체력과 기력 같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신이 죽은 뒤 10분이 지나고 움직인다.
“…운이 좋게도 근처에서 부활했나 보군요. 저희 길드원들에게 들키지도 않았고.”
“원래 운이 좋은 편이거든.”
씨익 미소를 짓고 그녀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부활하자마자 정신 차리기 전에 공격해 오면 그대로 다시 죽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 절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 리 없죠.”
“저 여자 뒤쪽에 몬스터가 5마리 정도 있어. 그리고 앞에 모래사장에도 숨어 있고.”
아주 주변에 몬스터로 도배를 해 놨군.
그래도 발렌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들었다간 몬스터 먹이가 되었을 테니까.
“이제 겨우 한 번밖에 못 죽였잖아? 내 라이프가 몇 개인지도 모르면서 계속해 보겠다고?”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건 최현 씨일 텐데요. 인원이 늘어나면 최현 씨가 죽을 때마다 모든 장소에서 기다렸다가 죽일 수 있어요.”
확실히 그건 내 초월 능력의 약점이다.
죽고 나서 10분이 지나면 신체가 정해진 공간의 랜덤 위치에서 재생된다.
그와 동시에 정신도 들지만,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몽롱한 상태다.
물론 ‘즉시 부활’과 ‘지정 부활’을 얻기 전의 얘기지만.
쿨타임이 있다고 해도 이 두 개의 스킬이 있으면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결국, 그 계획에서 당신만 없어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 아니야?”
“주교님!”
뒤에서 다른 헌터들이 허겁지겁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서둘러 주교라고 불린 여자 앞을 막아섰다.
“바보 같은 말이네요.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죠.”
“그러지 뭐.”
트드듯!
라이프 룰렛을 써서 활시위를 당기자, 그녀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도 놀라는 게 보였다.
빛으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은 충분히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라이프 룰렛의 최고 대미지를 먹인다고 해도 사람이 한 번에 죽진 않는다.
지금 라이프 룰렛을 꺼내서 보여 주는 이유는 그녀가 좀 더 많은 것을 경계하길 바라니까.
보여 줄 수 있는 패는 전부 보여 주면서 내가 숨기는 게 없다는 느낌을 풍겨야 한다.
파앙-!
손을 떠난 화살은 그녀 앞을 막아선 헌터의 가슴에 꽂혔다.
“…재주가 많은 분이군요.”
“그런 말 자주 듣는 편이긴 해.”
지금 여기에 온 건 이기기 위함이 아니다.
확실한 한 방을 만들기 위한 빌드 업이라고 해야 하나.
타다닷!
모래사장을 가로질러서 앞으로 달려들었다.
파앙!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 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위로 튀어 올랐다.
크래퍼.
“최현 씨가 제게 닿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린 라벨 몬스터로 게가 인간으로 변한 듯한 모습이다.
온몸이 단단한 껍질로 덮여 있었고, 양손은 집게가 달려 있다.
악력이 강해서 집게에 집히면 바위도 으깨 버릴 수 있다고 한다.
“그건 지켜봐야지.”
정면으로 달려들어 크래퍼의 가슴을 향해 화도를 찔러 넣었다.
제1공식, 목란.
파악!
“……!”
크래퍼는 내 공격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가슴이 뚫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집게로 내 몸을 잡았다.
이내 뒤쪽에서 헌터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처음부터 크래퍼는 미끼였나.
보여 줄 수 있는 건 전부 보여 준다.
칠흑의 묵갑을 꺼내 입으며 단숨에 블링크로 이동했다.
“너무 뻔히 보이는 수네요.”
촤아악!
그녀 뒤쪽 바다에서 나타난 스킬라가 물을 잔뜩 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묵직한 몸으로 들이받아서 나를 쓰러뜨린 뒤 스킬라의 몸에 자라 있는 뱀의 머리들이 내 팔과 다리를 물었다.
“영리하신 분이군요.”
칠흑의 묵갑과 화도를 빼앗길까 봐 빠르게 인벤토리로 집어넣었다.
다른 것보다 칠흑의 묵갑을 뺏기면 정말 방법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럼, 다시 도전하시길.”
그녀는 자신의 검을 뽑아 친절하게 내 목을 베어 버렸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는 것과 함께 스킬을 발동시켰다.
[System : ‘지정 부활’을 발동하셨습니다!]
[System : ‘즉시 부활’을 발동하셨습니다!]
평소 죽었을 때와 달리 바로 정신이 들며 상체를 일으켰다.
“커헉! 컥!”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목이 잘리는 감각에 양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며 눈물을 삼켜 냈다.
손이 떨리는 걸 보고 스킬이 제대로 발동했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까지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안가 절벽 바로 아래였고, 모퉁이만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무서운 인간 같으니.
내 목을 베어 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정 부활과 즉시 부활을 동시에 쓰면 원하는 곳에서 바로 부활하는 게 가능하다.
즉, 이 두 스킬의 콤보는 순간 이동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쿨타임은 1시간.
앞으로 1시간 뒤에 마무리를 짓는 거다.
“최현! 너 괜찮은 거야?!”
“아……?”
“아… 가 아니라! 괜찮은 거냐고. 채하나라는 분에게 얘기 다 들었어.”
머릿속에 들려오는 이신예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채하나가 무사히 밖으로 나가서 안전한 곳까지 갔다는 것에 안도했다.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앙그라마이뉴 길드 마스터인 ‘유한성’이 그쪽으로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