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독에서 살아남기 (1)
저주……?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다시 봐도 시스템 창엔 ‘검은 새의 저주’라는 글자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저주라니?! 형씨 괜찮은 거야?”
저주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몸의 변화를 살폈다.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을 착용했는데 저주에 걸리다니!
이런 법이 어딨어?!
[검은 새의 저주
이 게이트를 공략하기 전까지 장비를 해제할 수 없습니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동안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주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이 갑옷을 벗을 수 없다는 건가.
다른 스킬은 몰라도 라이프 파워를 쓸 수 없는 건 내게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2배나 능력치를 올려 주는 라이프 파워가 없으면 게이트를 공략할 때까지 라이프를 2배 더 쓰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이번 게이트만 공략하고 나면 그 후엔 장비를 자유자재로 착용할 수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이 정도 저주는 저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번거롭긴 해도 스킬을 사용하고 장비를 바꾸는 걸 반복하면 큰 핸디캡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 게이트를 공략해야 한다는 거네.”
“그러게. 지금 남아 있는 라이프로 공략하는 게 가능할까?”
20개의 라이프를 쓴 지금, 내 라이프 개수는 690개. 아까 라이프 파워를 쓰면서 5개를 소모했고, 게이트에 들어와서 죽은 게 20번이었으니까.
“형씨, 역시 나도 같이 싸우고 싶은데.”
“너무 위험하다니까. 나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나도 알아. 하지만 형씨 말대로 계속 위험하다고 이러고만 있으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어.”
조곤조곤 말하는 발렌의 목소리가 유난히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발렌을 게이트에서 데리고 나온 건 난데, 그 이후로 발렌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지 못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위험하다며 매일 시스템 안에만 가둬 놓고 있었다.
“형씨가 상처 받지 않길 바라지만, 이렇게 보호받으면서 지내는 것보다 싸울 땐 싸우면서 살고 싶어. 만약 그러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형씨 마음은 알아. 하지만 나도 형씨와 같이 싸우고 싶다고.”
발렌을 앞에 소환했고,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했다.
발렌은 내게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내가 의지하고 유일하게 날 지탱해 준 게 바로 발렌이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만약 발렌이 없었다면 나는 그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했을 거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강했지만, 그보다 발렌의 자유를 빼앗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로는 발렌이 원하는 대로 해. 내가 필요할 땐 발렌의 힘을 빌려줘. 하지만 너무 위험한 상황에선 무리하지 말고.”
“당연하지, 형씨!”
우린 오랜만에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쉽지 않은 게이트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발렌이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사라지고 든든하다.
스킬을 쓸 수 없는데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자, 그럼 일단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우선인데.”
“그건 그렇고, 책 진짜 많네.”
방에 있는 커다란 책장은 물론이고, 바닥과 책상에도 책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읽고 싶어서 책을 펼쳐 봐도 룬 문자로 쓰여 있어서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형씨! 이쪽으로 와 봐!”
책장을 훑어보고 있던 내게 발렌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가 책상 위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해서 들고 있었고, 책 표지에 그려진 건 다름 아닌, 에이션트 골렘이었다.
“에이션트 골렘? 그 녀석에 관한 책인가?”
“아무래도 이 게이트에 나오는 몬스터를 분석해 둔 책인 거 같아.”
“뭐?! 발렌, 너 룬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거야?!”
내가 깜짝 놀라며 묻자, 발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야. 문제는 해석이 된다고 하기엔 너무나 드문드문 읽을 수 있다는 거야. 몇몇 글자는 읽을 수 있는데, 대부분은 전혀 모르겠어.”
“그래도 그거 엄청 대단한 거야!”
발렌은 게이트에서 생겨난 몬스터라서 룬 문자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건가.
던전과 게이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이 많다.
몬스터들이 룬 문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지.
지금까지 사람이 이렇게 몬스터와 친구가 되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니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 읽을 수 있었으면 아까 벽에 적혀 있는 것도 읽었을 거야. 안타깝게도 거기 있는 단어는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이 책은 어떤데?”
“사실 보이는 몇 개의 단어를 이어 붙여서 추리하는 정도야. 골렘… 팔… 관절… 여긴 대충 각 부위를 설명하는 것 같은데?”
발렌이 책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에이션트 골렘의 그림이 그려진 곳이었다.
부위마다 뭐라고 룬 문자가 적혀져 있었는데 발렌이 말한 게 그런 설명인 듯했다.
문득 검은 새의 비명이라는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발렌이 조금이라도 룬 문자 해석이 가능한 걸 알았다면 읽어 달라고 했을 텐데.
“동력원… 에이션트 골렘이 움직일 수 있는 동력원은 몸에 새겨져 있는 룬 문자라고 하네.”
“뭐?! 팔에 있는 그거?”
일반 골렘과 에이션트 골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룬 문자였다.
에이션트 골렘이 움직일 때마다 룬 문자가 푸른색 빛을 뿜어내는데, 그게 설마 놈의 동력원이었을 줄이야.
“동력원을 직접 공격하는 것으로 큰 대미지를 입힐 수 있고, 양쪽 팔을 다 잘라 버리면 골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
“그게 정말이야?!”
“아마 그런 내용인 것 같아. 확실하진 않아.”
책 내용을 전부 알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정보도 엄청나게 귀중했다.
“다른 몬스터들에 대한 내용도 있어.”
발렌은 한참이나 책을 들여다보며 필요한 부분을 내게 해석해 줬다.
문장에 있는 단어들만 읽을 수 있어서 그걸 이어 붙여 해석하는 게 전부였다.
그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은 이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의 종류였다.
“에이션트 골렘, 케이브 웜, 블랙 스네이크, 그리고 보스 몬스터인 모스 퀸.”
블랙 스네이크는 거대한 뱀과 같은 모습을 한 몬스터였다.
덩치가 큰데 움직임이 빨라서 위협적인 몬스터다.
블랙 스네이크가 까다로운 이유는 이빨에 가진 치명적인 맹독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맹독에 당하면 10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된다.
치유계 헌터가 있으면 독을 치료하는 게 가능하지만, 혼자서 이곳에 들어온 내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장 문제는 모스 퀸인데…….”
“강한 녀석이야?”
발렌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강한 몬스터 중 하나야. 네이비 라벨 몬스터인데, 사람과 나방이 합쳐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거든. 크기도 보통 사람이랑 비슷하고 말이지.”
“흐음… 나방이라면 분진 가루 같은 걸로 공격하나?”
“정답이야. 모스 퀸은 영악한 몬스터거든. 여러 종류의 분진 가루를 써서 상대를 무력화하지.”
차라리 독은 적에게 공격을 받지 않으면 걸리지 않아서 피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망할 분진 가루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 대미지를 입히기도 하고, 잠시 시야를 빼앗는다거나 숨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마비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듣기만 해도 성가신 놈이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거야?”
“…해봐야지.”
블루 라벨 이상의 몬스터들은 아직 협회에서도 명확한 정보들을 수집하지 못한 상태인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몬스터 자체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상대할 때도 위험 부담이 커진다.
모스 퀸도 마찬가지였다.
발견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정보도 많지가 않다.
“그 전에 에이션트 골렘이랑 다른 몬스터들을 다 처리해야 가능하겠지만.”
“잠깐, 형씨! 이것 좀 봐!”
발렌이 책을 쭉 훑어보더니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설마 이건 이 게이트의 지도인가?!”
“그런 것 같아. 우리가 이동하면서 봤던 걸 떠올리면 대충 맞아.”
게이트의 모양은 중앙 구역을 중심으로 12개의 길이 뻗어 있었다.
그리고 여러 방향으로 이어진 길이 모이는 정 가운데는 내가 몇 번이나 죽었던 곳이다.
에이션트 골렘이 지키고 있는 곳.
“우리가 죽으면서 기록한 것처럼 12개네.”
“여기가 전부는 아닐 거야. 12군데에서 다 부활했었지만, 아직 블랙 스네이크는 만난 적이 없잖아.”
책의 내용이 맞는다면 아직 가지 못한 장소가 있을 거다.
위에서 아래를 보는 평면도 아래엔 옆에서 게이트를 보는 평면도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이 방인 것 같은데.”
“그러게. 어떻게 다시 위로 올라가지?”
이 방은 12구역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내려올 땐 긴 통로를 미끄러지듯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 통로로 올라가는 건 절대 불가능해 보였다.
너무 좁고 경사가 가팔라서 기어서 올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내려올 때 시간이 좀 걸렸지?”
“바로 위라고 생각하기엔 제법 걸렸지.”
몬스터랑 싸우는 것보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더 걱정이군.
“형씨! 뭔가 오고 있어!”
바로 몽둥이를 꺼내서 움켜쥐는 발렌을 보고, 나도 에렌 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발렌의 후각이나 청각은 나보다 몇십 배는 더 뛰어났기에 발렌의 말이 틀릴 일은 없었다.
쿠구궁!
벽 쪽이 흔들리며 책장이 앞으로 쓰러졌다.
“시이익!”
“블랙 스네이크?!”
이름대로 새까만 비늘로 온몸이 덮여 있는 블랙 스네이크는 둘레만 해도 2m가 넘는 거대한 몬스터였다.
갈라진 혓바닥을 앞으로 날름거리며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발렌,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혼자 상대해야 할 것 같아.”
“…알겠어. 일단 빠져 있을게.”
블랙 스네이크의 독은 너무 위험하다.
한 번만 물려도 우린 해독할 방법이 없으니 죽는 거나 다름없다.
블랙 스네이크가 나온 뒤쪽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그렇게 된 거군.
동굴에 구멍을 뚫고 돌아다녀서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거였어.
블랙 스네이크도 블루 라벨의 몬스터다.
아마 한 번 죽는 거로 이길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지금은 스킬을 쓸 수 없는 디버프까지 있으니 이놈을 죽이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게 틀림없다.
“차라리 잘됐어. 이 녀석에게 죽으면 다른 데에서 부활할 테니까.”
목란을 실전에서 좀 더 연습해 볼 기회가 생겼다.
아무리 이론과 수련을 통해 연습한다고 해도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블랙 스네이크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혔고, 내 공격에 반응하듯 놈이 몸을 세웠다.
묘한 긴장감과 살기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씨이잇!”
“……!”
“으아아악!”
순간 뒤쪽에서 들린 비명에 고개를 홱 돌렸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다른 블랙 스네이크가 발렌의 다리를 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