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내 목숨 9999 (2)
[18:42]
정말 친절하게도 이 게임 초월 능력에는 전자시계까지 부착되어 있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내 죽음의 시간이 끝이 났다.
[최현 Lv.1
체력: 150/150 마나: 10/10 기력: 30/30
힘: 10 민첩: 10 지능: 10
(사용 가능 포인트: 0)
라이프 : 9824개]
평소처럼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건 같았지만, 오늘은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의미 없이 죽음을 반복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이곳에 갇히고 나선 매일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다.
덕분에 게이트의 지형이나 환경은 금방 외울 수 있었다.
초월 능력은 애초에 게임 시스템을 현실로 가져온 듯한 느낌이라 익히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날 죽였던 데스나이트에 관한 건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들이 산더미였다.
이 게임 시스템이 내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즉, 진짜 게임처럼 수치에 따라서 모든 게 적용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어깨를 공격했을 때, 다리를 공격했을 때, 머리를 공격했을 때 상대방이 입는 대미지는 모두 다르다.
공격이 들어가는 것, 그리고 공격을 회피하는 것 역시 게임처럼 확률로 벌어지는 게 아니다.
오직 내 판단과 행동, 적의 판단과 행동으로 매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내가 점찍은 데스나이트를 만난 횟수는 14번.
입힌 대미지는 25.
남은 체력은 7164.
286일 반복하면 데스나이트 한 마리를 잡을 수 있는 건가.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보급형 마력 검
협회에서 제작한 헌터들을 위한 보급용 검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가성비가 뛰어나다.
공격력+2 내구도 17/30]
무기도 문제였다.
지금은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을 쓰고 있지만, 보급형인 만큼 내구도가 단숨에 줄어든다.
마력 검의 내구도가 다 떨어지면 그 후에 어떻게 싸울지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라이프를 겨우 4862개만 소모하고 잡는 게 가능하다.
겨우…. 겨우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린 나는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나마 치명타를 입히면 3배까지 대미지가 올라간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드디어 미쳤구나. 저 괴물들이랑 진짜로 싸우려고 하다니.”
하늘을 보고 있던 내 시야에 빼꼼 오크의 못생긴 얼굴이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몸을 옆으로 돌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힘들게 ‘블루 라벨’인 데스나이트를 잡는 것보다, ‘오렌지 라벨’인 오크를 잡는 게 더 쉽잖아.
1레벨이라도 오른다면 분명 앞으로 데스나이트랑 싸울 때 도움이 되겠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오크를 가만히 바라봤고, 오크는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마라. 괜히 나 적으로 돌려서 좋을 거 없으니까.”
“…….”
눈치 빠른 놈.
“이성이 없는 데스나이트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거든. 무엇보다 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서 시간이 지나면 체력이 다시 차니까. 허튼수작 부리면 나도 너 방해한다.”
오크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이 말한 것처럼 데스나이트는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무려 25라는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던 것도, 처음 공격할 때 항상 큰 움직임으로 시작한다는 규칙을 알아낸 덕분이었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나를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내가 널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너도 나랑 싸울 이유는 없다고.”
“친하게 지낼 이유도 없지.”
“…재수 없는 자식.”
그렇게 중얼거린 오크는 나랑 조금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너는 왜 자꾸 나한테 와서 껄떡대냐?”
“거참…. 말 한번 예쁘게 하네. 혼자서 5년 동안 여기 갇혀 있어 봐. 너였어도 나 따라다니면서 구경했을걸.”
“…….”
오크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11일째인데도 외롭고 쓸쓸해서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잠깐…! 게이트가 생긴 건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3일 전이었으니까, 겨우 2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5년이 지났다는 거야?”
몸을 일으키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오크를 쏘아봤다.
헌터들의 일터이자, 몬스터들이 나오는 거대한 탑을 ‘던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인스턴트 던전이 바로 ‘게이트’다.
이 게이트는 내가 들어오기 3일 전, 던전의 2층에서 나타났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 만들어진 지 5년 정도 흐른 건 사실이야. 저쪽 동굴 벽에 매일 기록하고 있으니까 정확하다고. 아마 그쪽 세계랑 이어진 것과 이곳이 만들어진 시간은 다른 모양이군.”
그가 5년이란 시간을 살았다는 게 거짓이 아니라면 그럴듯한 얘기였다.
그보다 자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건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아무튼, 난 형씨를 제법 응원하고 있다고.”
“혀…. 형씨?”
물론… 나이로 따지면… 내가 5배나 많긴 하지만, 이렇게 우락부락한 몬스터한테 형씨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한걸.
“아쉽게도 나는 목숨이 하나라서 도와줄 수는 없거든. 뭐, 마음만은 함께 싸우고 있다는 거지.”
“몬스터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특이한 오크네.”
“다른 오크들은 이성보다 본능이 강하니까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인간에게 살의만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 아마 형씨랑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면 나도 형씨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 무엇보다 인간 고기는 생각보다 별로 맛이 없거든.”
그의 말에 갑자기 싸한 느낌에 침을 꿀꺽 삼켰다.
밤에도 쉬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건 절대 사양이니까.
“그보다 대체 어떻게 죽지 않고 계속 부활하는 거야? 형씨… 진짜 신 같은 건가?”
“…내가 신이었다면 이런 거지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진 않았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
오크는 진심으로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초월’일 거야. 던전 내부에 들어온 헌터에게서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계속 부활하는 내 능력처럼 인간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되는 거지.”
“흐음…. 확실히 부활하는 건 엄청난 능력이긴 한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초월이라는 현상은 헌터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초월을 겪은 헌터는 못해도 A급까지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었고, 현재 SS급 4명도 모두 초월 헌터였으니까.
매일 데스나이트에게 죽는 것만 본 오크 입장에선 그다지 부럽지 않은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헌터라도 실수 한 번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목숨을 갖고 있다는 건 누가 뭐래도 사기였다.
그리고 인벤토리, 레벨, 필드의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게임 시스템 창까지…. 이 모든 게 초월 능력의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어쩌면 나도 A급 헌터가…….
“자, 형씨도 이것 좀 드쇼.”
오크가 품에서 잘 말린 육포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아니…. 난 딱히 막 배가 고프진 않아서…….”
꿀꺽.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보이자 입안에 절로 침이 맴돌았다.
배가 고픈 것과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는 다르군.
“그러지 마시고, 줄 때 받으라고.”
육포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오크가 내 손에 억지로 육포를 쥐여 주었다.
두툼하고 큼지막하게 만든 육포는 불그스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상한 고기는 아니겠지? 사람이라든가…. 너희 오크라든가….”
“거참!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 이곳에도 여러 동물이 살고 있다고. 우리처럼 동물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리 잡아먹어도 수가 줄지 않더군.”
오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 육포를 잘근잘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오!”
입안에 넣자마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맛이었다.
적당히 질기고 절묘하게 간까지 되어 있었다.
[수제 육포
오크가 만든 수제 육포다.
멧돼지를 잡아서 암염으로 간을 한 고급 요리
기력+10 회복]
호오…. 고급 요리라…….
기력이라는 건 아무래도 움직이거나 활동을 하며 소모하는 수치인 듯 보인다.
부활하면 항상 30으로 채워져 있어서 딱히 부족함을 느낀 적 없었다.
요리를 먹으면 회복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정보군.
“그보다 진짜로 데스나이트랑 싸울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니까.”
나 역시 그가 큰 의미 없이 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계속 덤비면서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데스나이트의 움직임 같은 건 신경도 못 썼는데, 막상 제대로 마주하니 놈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두 번째 공격을 피한 적은 없지만,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는 건 금방 익숙해졌다.
“오랜만에 음식을 먹었더니 라면 생각나네.”
“라면? 그게 뭔데?”
“아…. 넌 모르겠구나. 던전 밖에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있거든. 인간이 만든 음식들은 여기서 네가 먹는 육포랑은 차원이 다르게 맛있지.”
그렇게 말해 봐야 가난한 나는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을 뿐이다.
하지만 딱히 라면이 질린다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라면이야말로 서민들의 배를 채워 주는 친구니까.
“매콤하고 알싸한 국물에 쫄깃하고 탱탱한 면발을 후루룩……!”
손으로 젓가락 모양을 만들어서 먹는 시늉을 하자, 오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내가 육포 줬으니까 만약 나갔다가 다시 오면 꼭 가져오라고!”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무기를 구할 수 있을까?”
내 물음에 오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말이지…. 간단한 둔기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정말?!”
“뭐, 형씨가 필요하다면 만들어 줄 수도 있어. 어려운 건 아니니까. 대신! 나중에 꼭 라문, 주는 거다?”
“라면.”
“그래. 라면.”
피식 웃음을 흘리곤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져서 자리에 누웠다.
300일이 가까운 시간 동안 오늘 같은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겨우 한 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린다.
그로 인해 얼마나 내가 강해질지, 그 후에 다른 데스나이트를 모두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해야만 한다.
***
아침에 눈을 뜨자 오크 녀석은 온데간데없었다.
쳇…. 의리 없는 자식.
몬스터라고 반드시 서로 우호적인 건 아니지만, 데스나이트는 다른 몬스터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 그럼 오늘도 보람차게 죽어 볼까.
아직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리 어제 표시해 둔 데스나이트를 찾아야만 놈에게 조금이라도 더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이쪽이야!”
“……?!”
오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했잖아. 응원하고 있다고.”
크윽…. 이 자식…! 보기랑 다르게 의리 넘치는 놈이잖아?
“갑옷에 파란색 표시가 되어 있는 놈이지? 이쪽으로 쭉 가면 있다고.”
“난 또 어디 도망친 줄 알았더니…….”
“기껏 도와줬더니 말하는 거 하곤.”
“나중에 나가면 라면…. 꼭 먹여 줄게.”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린 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해가 뜨지 않았을 때 놈을 공격하면 즉시 반격을 해 오기에 먼저 공격해 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철컥… 철컥…….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데스나이트는 바로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후우웁!
“드루와!”
터엉!
역시나 놈은 저만치부터 검을 휘두를 자세를 잡으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첫 번째 공격은 단순하다.
검을 위로 쳐들었을 때는 수직으로 내리치고, 옆으로 들고 있을 땐 횡으로 긋는다.
쐐액-!
역시……!
몸을 아래로 숙여서 검을 피한 뒤, 놈의 목을 향해 힘껏 검을 찔렀다.
파앙!
[-3]
정확히 투구와 갑옷 사이로 검이 파고들었지만, 바위를 찌른 것처럼 오히려 내 손이 아팠다.
첫 공격에 날 죽이지 못한 데스나이트는 바로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젠자앙!
부웅-
“……!”
운 좋게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두려움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캉!
다시 한번 놈의 어깨 쪽을 검으로 힘껏 후려쳤다.
[-1]
체력이 깎인 수치와 함께 이번엔 정확히 놈의 검이 내 복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보였다.
[System : 새로운 스킬 ‘긴급회피’를 획득하셨습니다!]
[Game Over
System :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