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252. 양손을 보여드리지요 (1)
어둠을 잡아먹은 동그란 백색등이 하얀빛을 뿌려대는 곁에서 촛불만큼 작은 전구들이 평창동 저택의 운치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원의 안쪽 테이블에 앉은 윤만석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공사를 승인할 때는 세상이 다 그랬어. 산업은행에서 대출도 받아야 했고, 건설협회에서 보증서도 끊어야 하고, 돈이 어디 한두 곳에 들어갔어야지.”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그게…….”
심통 맞은 얼굴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천호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사가 중단되었다는 말이 들리고, 그 때문에 회장이 출장까지 간다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 그런데 어제 회장이 들이닥친 거야.”
들이닥쳤다는 표현이 우스웠던 모양인지 윤만석이 억지로 웃음을 눌렀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 돈 욕심, 자리 욕심은 없는데 아버지 욕심이 있다면서 돌아올 때까지 건강해져 있으라고 하지 뭔가.”
“그래서 말씀을 못 하셨습니까?”
“떡국 먹으러 가자고 했어. 그때 말할 생각이었거든.”
결국, 윤만석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
“총수님이 다른 분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볼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 해봤습니다.”
“눈치를 보기는 누가 눈치를 봐! 비자금 때문에 윤성일이 그 사달이 났는데 내가 비슷한 문제를 안겨주게 생겼으니 미안해서 그런 게지!”
울뚝 특유의 성깔을 부렸던 천호득이 커다랗게 숨을 내뱉었다.
“몸은 아프지, 심정은 조마조마하지. 제대로 웃지도 못하겠더라고. 회장이 눈을 똑바로 뜨고 정말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답을 해?”
“당시에는 그게 관행이었다고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버티던 계열사 회장들 목이 죄 날아갔어!”
“아무렴 재계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총수님을 생각하는 분이 험한 말이야 하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후! 그런데 미안하잖나. 윤성일을 그렇게 만든 회장에게 내가 흙가루를 끼얹는 꼴이니까.”
고개를 두어 번 저은 천호득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내렸다.
“그룹의 분위기는 어떤가? 대송에서는 반발이 있을 것도 같은데?”
“횡령과 배임으로 반항하던 임원들을 정리하는 단계여서 당장은 더 잠잠합니다.”
“노조는 별개로 움직이잖나?”
“정직원으로 전환된 노조원들과 기존의 노조원 간에 분란이 있어서 회장에게 대들 여유는 없습니다.”
“하아. 알고 그런 건지 아니면 우직하게 바른길을 택해서 하늘이 돕는 건지, 당최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지경그룹 임원들의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게다가 직원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감싸는 오너입니다. 게다가 대송그룹은 윤병지 회장에게 맡겨서 신임회장에게 대들 명분조차 없습니다.”
“대송자동차그룹은?”
“그게 절묘합니다.”
천호득이 궁금하다는 의미를 담아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리콜을 시행한 게 워낙 컸습니다. 내부고발자들을 따로 포상했고, 직원들을 새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비스센터에는 안전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발견하면 비용에 신경 쓰지 말고 직원의 판단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지시가 내려간 뒤여서 오히려 신임회장을 따르겠다는 분위기입니다.”
“그 짓을 하는데 돈이 7조 원 넘게 없어졌어! 그걸 벌려면 차를 몇 대나 팔아야 하는지 짐작이나 하나?”
그것만큼은 못마땅했던지 천호득이 불뚝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경영을 하자는 건지, 자선사업을 하자는 건지 모를 지경이니! 다 좋은데 그런 점은 좀 고칠 필요가 있어.”
“총수님. 작년에 대송자동차그룹에서 침수되었던 차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다음 날, 밴드사 임직원과 가족에게 30만 원 할인한 금액으로 모조리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 2백 대입니다. 그 차가 요즘 로또로 불립니다.”
“로또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천호득이 또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차적을 조회해서 신차 가격으로 되사준다는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1년 전 차량이라면서? 그것도 물에 빠졌던 차를?”
“그 일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송자동차를 사겠다는 대기고객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믿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면 대송자동차그룹이 어떤 차를 내놔도 신임회장을 믿고 구매하겠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는 좋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윤만석을 노려보던 천호득이 느닷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회장이 비자금을 알게 되면 화를 많이 내겠지?”
윤만석은 대답 대신 밀려난 어둠만큼이나 진한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 청장을 만나기 위해 출발할 시간이었다. 최근에 이상하게 귀가 가려운 경우가 잦았다. 오른쪽 귀를 두어 번 털어낸 천중명은 가방에 계약서를 집어넣었다.
정희배 총괄사장이 앞서고, 천중명과 유진교가 그 뒤를 따라 객실을 나섰으며, 로비에서 통역을 위해 기다리던 직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내가 회장님을 모시고 갈 테니 뒤쪽에 직원들과 함께 오세요.”
“예, 사장님.”
30대 후반의 통역 직원을 직원에게 보낸 정희배가 대기하던 S500의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천중명과 유진교, 조수석에 정희배가 타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길가에 아랍어로 쓰인 간판과 하얀 원피스를 입은 남자들이 아니라면 삼복 더위가 맹렬하게 기승을 부리는 날, 대구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천중명은 창밖을 보는척하며 뒷좌석에 앉은 유진교를 살폈다. 1등석을 타고 왔다고 해도 10시간을 비행하고 쉬지 못한 채 다시 나선 참이라 혹시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30분가량 도로를 안정적으로 달린 승용차는 족히 50층은 넘어 보이는 건물 앞에 멈췄다.
입구에서 내린 세 사람이 현관에 들어섰을 때 직원들과 통역 직원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정장 차림의 남자직원이 다가와 정희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장님. 이쪽입니다.”
통역 직원을 포함해 네 명이 아랍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43층에서 내렸다.
복도를 거쳐 들어선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의 사무실은 전망이 엄청났다. 그리고 그다음은 쓸데없이 넓고 화려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점은 개인의 취향이니 굳이 탓할 바는 없었다.
“잠시 기다려달랍니다.”
아직은 정희배가 말을 전해주었다.
천중명이 창을 왼편에 둔 자리에 앉자, 좌측으로 유진교가 우측으로 정희배와 통역이 앉았다. 크림을 잔뜩 넣은 진한 커피, 대추야자, 뜬금없는 녹색의 포도가 나온 다음이었다.
안쪽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머리띠에 흰색 두건과 원피스 차림의 남자가 수행원 셋과 함께 들어섰다.
사진에서 보았던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였다.
그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지 곧장 천중명을 향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천중명입니다.”
“환영합니다,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입니다.”
둘이서 먼저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진에서 본 인상이 오히려 좋았구나 싶을 정도로 마타르는 부리부리한 눈매와 거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저와 함께 온 그룹발전본부 유진교 본부장, 이쪽은 아랍에미리트의 정희배 총괄사장입니다.”
뒤에 있는 남자가 나직하게 아랍어로 천중명의 말을 전해주는 동안 마타르는 유진교, 정희배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또 마지막에 정희배를 알고 있다는 투로 눈인사를 전하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카리프 마흐무드 부청장입니다.”
그런 뒤에 이번에는 마타르가 부청장을 소개해서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앉으시죠.”
마타르의 권유에 자리에 앉았고, 곧바로 아랍 직원이 천중명 일행의 앞에 있던 차를 새롭게 바꿔주었다.
“두바이는 처음이신가요?”
뒤편에 앉은 통역이 천중명의 귀에 상체를 숙인 채 마타르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첫인상이 어떻습니까.”
“도착한 지 두 시간 됐습니다. 그나마 호텔에 있느라 오가며 본 것이 전부여서 아직 뭔가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도시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분명하게 알 것 같습니다.”
첫 대화였다.
그 뒤로 날씨 이야기, 이어서 트럭 랠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10분쯤 시간을 보냈다. 대화는 계속 천중명과 마타르 사이에 오갔다.
“보자고 하셨는데?”
그리고 그 끝에서 마타르가 묵직한 눈길과 함께 질문을 건넸다.
천중명의 첫 번째 반응은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 의미를 아는 유일한 사람, 유진교가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천중명은 “가방을 이리 줘.” 하며 정희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방을 받은 천중명은 투명한 커버에 담긴 계약서 다섯 부를 꺼냈다.
투욱!
그리고는 테이블에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마타르의 시선이 계약서에서 천중명을 향해 올라온 다음이었다.
“사람을 부를 거면 정중하게 초대했으면 싶습니다.”
놀란 시선을 바닥에 내린 채로 통역이 빠르게 말을 전했다.
“계약서에 적힌 약점이 많아서 공사를 중단시키고 여유를 부리는 모양인데, 우리 지경의 법무팀이 한 가지 조항은 제대로 작성했더군요.”
가뜩이나 강한 인상의 마타르가 입을 꾹 다물고는 천중명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중명은 저 표정이 윤성일의 독기에 비하면 아직 어설프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이뤄놓은 공사에 대해 기성금을 포기하면 이미 통과한 공사와 공사중단에 대한 손해를 묻지 않는다.”
천중명 역시 마타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든 한국 기업이 리베이트 따위에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두 번째, 손을 내밀려면 양손을 내미세요. 무기를 든 손을 뒤에 감추지 말고.”
“내가 무기를 감췄다고 했습니까?”
창밖으로 사막 위에 높다랗게 솟은 건물들이 화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져 있는 안쪽에서 천중명은 다시 한 번 아까와 비슷한 웃음을 보였다.
“공사를 중단하면 달려올 거라는 것쯤 짐작하셨을 텐데? 아니라면 오히려 실망스러운데요?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유진교 본부장, 이곳 총괄사장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결정했습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널따란 마타르의 집무실이 고요했다. 그의 옆에 있는 카리프 마흐무드 부청장이 마른침을 삼킨 직후였다.
“지경그룹은 공사를 중단하겠습니다. 계약서에 있는 조항대로 지금까지 해왔던 기성은 포기할 것이고, 이후 리베이트와 관련한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 이 조건은 대송그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송은 계약 내용이 다릅니다.”
“손해배상을 해야 하더군요. 다음 단계로 예정된 기성을 완성하든가, 그에 상응하는 공사비를 부담하든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원하는 방식을 정해서 알려주세요. 돈인지, 공사인지.”
깔끔하게 말을 건넨 천중명은 좌우를 둘러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교가 점잖은 태도로 몸을 일으킨 반면, 정희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블루크루드에 관한 협상을 이야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지분참여와 블루크루드가 양산될 때까지의 원유 수급 등을 발전적으로 의논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이대로 돌아가면 철부지 회장이 결국 커다란 사고를 쳤다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떠들 미친 짓이라는 것쯤 충분히 짐작한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공식 입장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발표하고, 계약해지 역시 공식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나 천중명은 단호하게 말을 건넨 뒤에 몸을 돌렸다.
공사를 중단하라고 통보하면 주르륵 달려와서 애걸복걸 매달릴 거라 기대했겠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천중명은 매출을 위해 무릎을 꿇으려던 지경화장품 강남스퀘어 매니저 김민희를 떠올렸다.
여기에서 천중명이 매달리면 정희배는 절대 그 무릎을 펴지 못한다. 총괄사장이 그런 상황에서 직원들은 어떤 꼴을 당할까.
문을 나서자 정희배가 움직였고, 그보다 빨리 아랍 직원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주었다.
리베이트를 먹겠다고 엉터리 계약을 체결한 벌이라고 생각할 참이었다. 손해를 감수하고, 언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이곳에서, 이 끔찍한 더위 속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공사 따위 그만둔다.
정희배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가운데,
때앵.
빠르게 올라온 엘리베이터에서 알람이 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천중명 회장님.”
도넛에 묻은 설탕처럼 아랍어 억양이 담뿍 담긴 우리말로 뒤편에서 천중명을 불렀다.
아랍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기다리는 앞에서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마타르를 바라보았다.
당장 지경건설이 어렵겠지만, 그룹은 그럴 때 힘을 모아 견딜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회장의 일이다.
누구도 내 직원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수모 따위 블루크루드가 양산화된다면 다시는 겪지 않는다.
“내 태도에 오해가 있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다가온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가 난처한 얼굴로 먼저 사과를 전했다.
정희배가 천중명과 마타르를 번갈아 본 직후였다.
“양손을 보여드리지요. 우리는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정희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사를 시작해 주시겠습니까?”
정희배가 시선을 퍼뜩 돌렸고,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괄사장은 먼저 가서 공사를 시작해.”
천중명의 지시를 들은 마타르가 만족한 미소를 그려냈다. 지금부터 네 사람이 마주 앉아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할 때라는 의미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