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51화 (251/315)

# 251

251. 내가 저렇게 살았던 거구나 (2)

7시 50분에 공항에 도착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탑승권을 받기 무섭게 곧바로 출국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두바이 공항에서의 수속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천중명과 유진교 모두 노트북이 담긴 서류 가방과 옷과 양말 등이 담긴 가방을 기내로 들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아랍에미리트 항공사를 선택했다.

1등석을 위한 입구에서 펑퍼짐해 보이는 재킷과 치마, 빵을 엎어놓은 듯한 독특한 모자, 그 모자에 연결된 하얀 스카프 차림의 승무원이 천중명과 유진교를 맞았다.

“이쪽입니다.”

담당 승무원이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오른쪽으로 음료와 물, 그리고 맥주가 담긴 개인용 바, 정면에는 컴퓨터가 있었고, 그 아래로 발을 뻗어 올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스웨덴에 가는 비행기에서 경험해 보았다.

자리에 앉은 천중명이 능숙하게 제공된 슬리퍼로 갈아신자 너트와 주스, 시원한 물수건이 나왔고, 그 사이 안전을 위한 방송이 앞의 모니터에 올라왔다.

이륙한 비행기가 안정을 찾기 무섭게 테이블을 펼친 천중명은 노트북을 올리고 USB를 꽂았다.

“회장님. 어제 지시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유진교가 손가방에서 또 하나의 USB를 건네주었다.

10시간의 비행이었다.

위성전화기를 통한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어서 비행하는 동안에도 급한 보고서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승무원이 권하는 간식 메뉴를 거절한 채 천중명은 노트북의 모니터에 올라온 내용에 집중했다.

지경그룹만 5조 원이 넘는 공사였고, 대송그룹의 공사까지 포함하면 8조 원에 달하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당장 투입되는 공사비의 절반은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았으며, 공사 진행을 10단계로 나누어서 매 단계 60퍼센트 수준의 기성을 받는다.

공사중단 사유는 안전 점검이었다. 그것도 세부적인 조사를 통해 안전하다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로 기간은 소위 엿장수 마음대로의 수준이었다.

실적을 쌓는 일은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두바이 현장을 통해 얻는 경험도 앞으로 지경건설이 발전해 나가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러나 이따위 터무니없는 이유로 공사가 중단될 만큼 허술한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천중명은 눈썹을 매만지며 관련 서류에 집중했다.

음료를 권하던 승무원이 다가왔다가 유진교가 가로젓는 고갯짓에 조심스럽게 물러날 정도로 천중명의 집중력은 무서웠다.

**

천상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경저축은행에서 부리던 박무일 전무가 반쯤 사기꾼이 된 얼굴과 눈빛으로 소파에 있었다.

“회장님. 복귀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천상기를 살핀 박무일이 들고 온 가죽가방에서 투명한 비닐 케이스를 꺼냈다. 앞면에 ‘단 하나의 기회’라는 글씨와 그 아래로 ‘콤플렉스 몰 제안서’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추진하는 시행물건입니다.”

천상기의 앞에 제안서를 펼친 박무일이 입지가 어쩌고, 총 공사비가 어떻고, 건설사는 어디를 생각 중이라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회장님. 제가 현금 30개와 가장 목 좋은 자리 두 개를 따로 챙겨놓겠습니다.”

30억 원의 뒷돈을 제시하는 박무일의 탐욕을 접하는 순간, 천상기는 가장 먼저 역겹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저렇게 살았던 거구나.

저렇게 더러운 눈과 얼굴을 하고.

“박 전무.”

“예, 회장님. 제가 이 프로젝트를 정말 잘 준비해서…….”

“나는 당분간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할 계획이 없으니까 다른 곳을 알아봐.”

답을 들은 박무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하시면 좀 더 챙겨드리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성공하는 겁니다.”

“그렇게 성공할 프로젝트라면 다른 곳도 알아보겠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박무일이 대놓고 볼을 씰룩였다.

“회장님. 저는 정말 회장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내가 입을 뻥긋하면 회장님이 앉아계신 그 자리도 끝입니다! 예!”

“그럼 그렇게 해.”

원체 성격이 강했던 천상기였다. 그걸 증명하듯 그는 박무일의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내주니까 사람이 말랑말랑해진 줄 아는 모양인데 나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누가 끝인지?”

참 오랜만에 천상기의 성격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가서 해보라니까!”

“함부로 말씀드린 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어떡해서든 살아보려는 건데 한 번쯤 도와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후-!”

비굴한 표정의 박무일을 향해 천상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땀 흘리며 벌어. 이렇게 되지도 않는 사업계획서 들고 다니면서 일확천금 노리지 말고.”

처참한 표정으로 제안서와 천상기를 번갈아 보던 박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안서 가져가.”

그리고 그런 그에게 미련이 남지 않도록 천상기는 눈짓으로 제안서를 가리켰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박무일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천상기의 방을 나섰다.

명동과 종로, 강남의 몇몇 커피 전문점에 나가면 저런 제안서 들고 돌아다니는 인간들, 하루에도 천 명쯤 만난다.

몇조 원이 찍힌 가짜 잔액 증명서를 보여주는 사기꾼도 있고,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려는데 공군 기지에서 직접 보았다며 돈을 준비하라고 꼬드기는 인간도 있다.

저런 걸 들고 왔다는 것은 인생 한 방이니까 하나만 걸려라, 하는 부류에 박무일이 포함되었다는 의미였다.

천상기는 책상으로 옮겨가 어제와 오늘 온 메모들을 보았다. 주가조작을 전문으로 하는 부티크, 아직 계열사에 살아남아 있는 몇몇 임원들의 전화 연락이 전부였다.

“그동안 참 한심하게 살았었네.”

천상기는 결재해야 할 서류를 펼쳤다.

이렇게 저축은행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아직 하늘이 천상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니 한 푼이라도 허투루 나가는 것은 없는지, 대출 서류에 눈감아 준 부분은 없는지를 꼼꼼하게 살필 참이었다.

오늘로 이틀째이고, 랠리가 끝나려면 이제 13일 남았다.

‘나 진짜 열심히 산다.’

천상기는 서류에 집중하기 위해 연필까지 집어 들었다.

**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는 트럭 안에서 강갑수는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크아아-앙! 철컹! 크아-앙!

오르막을 오르며 엔진이 거친 음을 토해낼 때였다.

앞쪽의 트럭에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며 머리와 몸통이 휘청했다.

끼이익! 철컹! 크아앙!

강갑수가 탄 2호차가 옆으로 비켜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끄드등!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다시 머리와 몸통 부분을 구부리며 앞을 막았다.

끼기기기긱!

핸들을 급하게 튼 드라이버가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강갑수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가 X자 벨트에 묶여 뒤로 돌아왔다.

‘이거 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일부러 앞길을 막았다는 것쯤 충분히 알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막아선 트럭 앞에 또다시 거양자동차의 트럭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의심할 나위 없었다.

민가가 도로의 좌우에 있었다.

여기에서 일을 벌이면 반드시 눈에 뜨인다.

혹시 민가에서 놈들이 튀어나오나?

좌우를 힐끔 살핀 강갑수는 일부러 운전석과 조수석의 사이 의자 앞에 오른발을 걸쳐놓았다.

언제고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갖추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번득이는 눈으로 좌우를 살핀 강갑수가 오른쪽의 민가를 향해 눈을 찌푸릴 때였다.

크르릉! 철컹! 크르르르릉!

앞의 트럭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고라 이거지? 까불지 말라고?

천천히 움직이는 트럭 안에서 강갑수는 입술 한쪽을 늘이며 웃었다.

잘 모르나 본데, 도깨비는 건드리면 안 돼요.

여기에는 없는데 따블을 좋아하는 대왕 도깨비가 사막이 시작하는 앞에서 기다린다니까.

사고를 치려면 지금 아니면 힘들어.

크아앙! 철컹! 크아아-앙!

곽대출을 떠올릴 때쯤 2호 트럭은 이미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유럽의 햇살은 어쩐지 살갗이 따갑도록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 따가운 햇살을 보면서 강갑수는 까맣게 탄 천상기를 떠올렸다.

발목에 날카로운 칼을 매달고 사는 강갑수와는 멀찍이 떨어진 삶을 사는 그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았다. 배에 올랐다가 떠나기 직전에 자갈을 밟으며 달려와 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잘 지내냐, 형? 나도 잘 지낸다.’

꾸역꾸역 문어와 라면, 삼겹살, 김치를 입에 욱여넣던 천상기를 떠올리며 강갑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

두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천중명은 유진교와 함께 수속을 마치고 곧바로 입국장으로 나섰다. 손에 든 가방이 전부라 짐을 찾기 위해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천중명이 입국 게이트를 나선 직후였다.

“회장님. 아랍에미리트 총괄사장 정희배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정희배가 곧바로 다가와 천중명과 유진교에게 차례대로 인사했다. 좀 놀았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강한 인상과 체형을 지녔고, 딱히 흠잡기는 어려운데 어딘가 이죽거리는 말투였다.

“우선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천중명의 가방을 받아든 그가 입국장 바깥으로 움직였다.

대기하던 S500에 오르자 승용차가 바로 출발했다.

차에 탈 때까지 훅 더위가 달려들고, 승용차나 건물에 들어서면 에어컨의 서늘함이 감싸는 것은 한국의 여름과 비슷했다. 다만 두바이는 그 정도가 몹시 강한 느낌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전통 가옥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도로를 30분쯤 달린 승용차가 비틀린 사각 모형의 호텔에 들어섰다.

정희배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곧장 객실로 올라갔다.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것은 물론이고, 한쪽에 회의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탁자가 놓인 꽤 고급스러운 객실이었다.

천중명과 유진교가 테이블에 앉자 정희배가 익숙한 태도로 음료와 물을 준비해 놓아주었다.

“커피를 한잔 마실 수 있을까?”

“주문하겠습니다.”

전화를 들어 아랍어를 쏟아낸 정희배가 테이블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지금이 오후 2시 7분입니다. 마타르 카히로 모하메드 청장을 방문하기 위해 3시 30분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는 가장 먼저 시간과 일정을 알려주었다.

“통역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분위기가 변했다든가, 추가된 정보나 자료는 없었나?”

“회장님이 오신다는 말에 공사가 재개될 거라 기대하는 것 말고 다른 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유진교의 질문에 정희배가 연달아 별거 없는 답을 내놓았다.

“정희배 사장. 계약서에 불리한 조항이 많던데 아랍에미리트 현장은 다 이런 불리함을 안고 공사를 수주하나?”

천중명의 질문에 정희배가 유진교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딩동댕동.

그에게 잠시 시간을 주겠다는 것처럼 벨이 울렸다. 호텔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따르면서 짧은 여유가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에 세 개의 공사를 수주한 분이 고 천봉서 회장님이십니다.”

자리에 앉은 정희배의 답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커피를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굉장히 진하고 강렬해서 긴 비행에 지친 정신을 번쩍 깨워주는 느낌이었다.

“이면 계약이 있다면 솔직히 말해줬으면 싶어. 내가 알아야 마타르 청장을 만나서 망신당하는 일이 없지.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니니까 아는 대로만 알려줘.”

“그게…….”

망설이는 정희배를 천중명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제 직급에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기성의 60퍼센트를 공식적으로 받고, 나머지에서 일부를 지정한 계좌로 보낸다는 것 정도만 눈치챘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사가 완공되었을 때, 수익이 비잖아? 어차피 회계에서 비는 40퍼센트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기성을 지급할 때마다 10퍼센트를 커미션으로 따로 받고, 나머지 30퍼센트는 하자이행 보증금으로 묶어둡니다. 회계 장부로도 이상이 전혀 없습니다.”

“대송도 그렇게 하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희배의 말을 들은 천중명은 다시 커피를 가져가 마셨다.

어떻게 된 게 그룹이란 의미가 눈만 돌리면 돈을 빼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임으로 전락한 건지, 들여다보면 볼수록 고개가 절로 저어질 지경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하자이행 보증금도 3년이 지나면 본사에 입금해야 하는데? 이건 어떻게 넘어가지?”

“연결 회계를 이용합니다. 실제로 하자가 일어나지 않지만, 이쪽에서 인건비와 유지관리비로 털어냅니다.”

“40퍼센트를 전부?”

“커미션으로 받은 10퍼센트를 털어내면 회계 기록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회장님. 그 외에 저 같은 현장 책임자가 얼마를 더 털어내느냐에 따라 인사고과가 달라집니다.”

대강 분위기는 알았다.

“아직 시간이 있지?”

“예, 회장님.”

시간을 확인한 천중명은 대송에서 보내준 자료와 공사를 완전히 중단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손해에 관한 서류를 펼쳤다.

뒷돈을 요구하는 기업의 오너라니?

그 돈을 주면서 그들이 얼마나 비웃었을지를 생각하자 천중명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심정이었다.

“후-.”

바로잡아야 할 일들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