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9화 (99/315)

# 99

099.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3)

주황색으로 바뀐 햇빛이 가장 먼저 천중명의 눈에 담겼다.

그 아래로 마감 공사를 남긴 아파트의 꼭대기들이 솟아나듯 올라왔으며, 이어서 거대한 괴수의 잘린 머리처럼 크레인의 운전석이 옆을 스쳐 아래로 내려갔다.

기우뚱!

등에 매달린 기사의 무게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허공에서 앞으로 숙이려던 천중명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시 아파트의 꼭대기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고, 주황색 햇빛과 짙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퍼드드드득!

옷깃이 휘날리는 소리,

휘이이이익!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을 때, 천중명은 픽 웃었다.

참, 염병같이 살았다.

휘이이이익! 꽈아악!

기사가 천중명의 목을 조르다시피 매달려서 물구나무를 서듯 머리를 아래로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운 거 없다.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채 운명이 흔드는 끈에 매달려 춤추는 피에로 인형 같은 삶일지 모른다.

대출이 새끼, 엄청 혼란스러울 텐데!

퍼드드드득! 휘이이이이잉-!

천호득과 이은명은 얼마나 상심할까?

허선영은 또 어떻고?

머리가 아래로 있어서 저 아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넘어진 크레인이 죽은 뱀처럼 늘어졌고, 에어쿠션이 있었으며, 고개를 모로 돌린 사람들도 보였다.

여기서 죽으면 너는 좋겠지?

고난이란 놈과 천상기? 그렇지?

“야! 회장님아! 이거 봐!”

그때 천중명의 따귀를 갈기는 것처럼 곽대출의 고함이 들렸다.

휘이이이익! 퍼드득! 퍼드드득!

그 직후에 놈이 내민 기다란 막대기도 보였다.

획! 꽈악!

천중명은 오른손을 막대기의 끝에 달린 고리에 밀고 목을 감고 있는 크레인 기사의 팔목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터억!

걸렸다! 걸었다고!

휘처-엉!

고리에 손목이 걸린 직후에 떨어지던 몸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렸고,

콰드득!

이어서 어깨가 완전히 빠졌으며,

으드득! 드드드득!

“끄으-!”

팔꿈치와 손목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살려주세요-오!”

왼손에 붙든 기사의 고함도 생생하게 들렸다.

“끄으! 끄으-으!”

고통을 이기기 위해 천중명은 고개를 떨군 채 이를 드러낼 정도로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

천중명이 크레인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은명은 털썩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른 의사를 불러!”

윤만석의 지시에 대원이 뛰어나가려는 때에 곽대출이 길게 잡고 있는 막대기의 끝에 천중명이 매달렸고, 곧바로 TV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원거리의 소리를 잡는 마이크를 통해 천중명 회장의 말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방송에 이용하려는 기자의 말을 들은 직후에,

“나쁜 사람들!”

이은명의 머리를 받쳐준 허선영이 화를 참지 못하고 거친 말을 쏟아냈다.

“후우-.”

옆의 침대에 앉은 천호득이 쏟아낸 아픈 신음이 그의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

곽대출은 도깨비 출신이었다.

한눈에 천중명의 오른팔이 망가진 것을 알았다.

굳이 도깨비가 아니어도 지금 막대기의 끝 고리에 손목이 걸린 천중명의 오른팔이 한눈에 보기에도 길게 늘어나 있었다.

“이걸 몸에 감아!”

곽대출은 막대기의 끝에 매달았던 로프를 옆의 구조대원에게 건넸다.

“서둘러요!”

사다리의 끝을 붙잡은 대원들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중이었다.

멀리서 구급대의 사다리차가 오고 있었지만, 이번에 에어쿠션과 중간에 넘어진 크레인이 장애물처럼 양쪽 길을 막고 있었다.

“됐어요!”

구조대원이 노란색 테두리가 둘린 구조복 위에 매듭을 묶었다.

곽대출은 고개를 돌려 옥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뛰어내릴 거야! 충격이 클 테니까 준비해요!”

답은 없었다.

그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구조대원들의 거친 눈빛만 보였다.

저대로 두면 천중명은 구조 사다리가 오기 전에 떨어진다.

이 상태에서 옥상으로 사다리를 당기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크레인 기사가 떨어질 거고.

곽대출은 사다리의 끝에 서서 천중명의 왼손에 매달린 기사를 노려보았다.

이런 각오였었나?

마지막 훈련에서 뛰어내리자고 멱살을 잡았을 때의 심정이?

죽어도 밀리기 싫었던 거지.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겨내고 싶었던 거고.

“간다!”

로프의 끝은 사다리에 걸었고, 반대쪽은 곽대출의 허리에 걸었다.

그 상태에서 곽대출은 다이빙하는 사람처럼 아래를 향해 뚝 떨어졌다.

휘이익!

단박에 천중명을 지났고, 곧바로 크레인 기사의 앞에 도달했다.

와락! 덥썩!

곽대출은 크레인 기사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휘처엉! 콰드득!

“씨바-알!”

허리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잡았어! 당겨! 잡았다고!”

곽대출이 악을 바락바락 쓰고 난 직후였다.

“당겨! 하나! 당겨! 두울!”

드드득! 드드득!

사다리가 옥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에 쏠려서 눈알과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상태에서도 곽대출은 겨드랑이에 끼운 팔의 힘을 더 주었다.

“제발 좀 빨리 당겨!”

“하나! 두울! 하나! 두울!”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그리고 마침내 사다리가 멈췄다.

“곽 이사를 먼저 당겨!”

“회장님부터 올라오세요!”

“기사가 위험해! 그러니까 곽 이사를 먼저 당기라고!”

천중명의 고함이 곽대출의 귀에 분명하고 들렸고,

휘익! 철렁! 휘익! 철렁!

대원들이 당기는 만큼 곽대출의 몸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덥석!

누군가 곽대출의 허리띠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고개를 든 곽대출의 눈에 천중명의 눈이 분명하게 들어왔다.

“이 꼴통 회장님아!”

왜 그랬는지 곽대출이 고함을 버럭 질렀고,

“끄으! 직원이 죽는 걸 그냥 지켜볼 수는 없잖아!”

고통을 이기기 위해 처참하게 변한 얼굴로 천중명이 대꾸했다.

“당겨!”

누군가의 고함이 들린 직후였다.

옥상의 난간에 걸린 곽대출의 몸 아래로 구조대원의 손이 뻗어가서 악착같이 안고 있던 크레인 기사를 끌어올렸다.

“와아아아-!”

그 직후에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회장님! 조금만 참아!”

몸을 일으킨 곽대출이 달려들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 없었다.

이미 옥상에 다 들어온 사다리 끝에서 천중명이 어깨를 붙들려 올라오고 있었다.

“와아!”

“와아아-!”

또다시 함성이 연속으로 들려올 때 천중명은 옥상의 벽에 기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와 늘어진 팔을 왼손으로 감싼 채였다.

“에이, 꼴통 회장.”

“미친 새끼.”

구조대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오간 다음이었다.

“담배 가진 거 있냐?”

천중명이 질문을 던졌고, 곽대출이 시선을 들어 대원들을 보았다.

“소방관에게 담배와 불을 달라시는 건 아니죠?”

처음 돕겠다고 나섰던 구조대원이 웃으며 답을 건넸다.

완벽하게 주황색으로 변한 햇살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려 왼편으로 그려낸 시간에 천중명은 고개를 젖혀 옥상의 담벼락에 기댔다.

**

방송에 고스란히 나왔다.

“곽 이사를 먼저 당겨!”

“회장님부터 올라오세요!”

“기사가 위험해! 그러니까 곽 이사를 먼저 당기라고!”

구조대원을 향해 외친 천중명의 고함이 말이다.

곽대출이 옥상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이 꼴통 회장님아!”

“끄으! 직원이 죽는 걸 그냥 지켜볼 수는 없잖아!”

곽대출의 고함에 천중명이 지른 대꾸도 모두 TV에 나왔다.

지켜보던 계열사 직원 중에 여직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박수를 쳤고, 남자 직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숨을 자꾸만 거칠게 뱉어냈다.

**

황성규의 팀원들은 모두 일어서 있었다.

그리고 천중명이 구출된 직후에 힘이 빠진 사람들처럼 털썩 소리가 나게 의자에 앉았다.

“목숨 걸고 모시고 싶은 분입니다.”

문상훈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동을 전했을 때 황성규는 말없이 TV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청업체 파견직 직원을 구하겠답시고 부러지는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는 회장이라니?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는데 반대로 지금 천중명은 완벽한 리더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매달릴 거다. 저분이 아니면 우리 계획을 완성시킬 수 없다.”

“필요하시면 저희도 가서 매달리겠습니다.”

황성규의 혼잣말을 대원들이 받았다.

**

이은명이 깨어났을 때 이번엔 천호득이 뒤로 넘어갔다.

긴장이 풀리면서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온 저혈당 쇼크였다.

급하게 주사제가 링거 줄에 꽂히고, 링거액을 쥐어짜듯이 쏟아 붓고 나서야 그는 겨우 안심할 수 있는 혈압을 찾았다.

힘겹게 눈을 돌린 그의 앞에 윤만석이 있었다.

“총수님! 정신이 드십니까?”

“우리 회장이 살아난 거 맞지? 그렇지?”

“예. 지금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천호득이 기운 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또 배우는군.”

이유를 묻기 어려워서인지 윤만석은 의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게 있어.”

천호득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

크레인 기사가 먼저 실려 내려갔고, 다음으로 천중명이 들것에 실렸다.

“나는 괜찮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던 곽대출이 말과는 달리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검사는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허리잖습니까?”

몇 년은 함께 일한 것처럼 뜻이 통하는 구조대원의 말에 곽대출이 픽 웃었다.

그렇게 그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곽대출이 구조대원의 어깨에 팔을‘ 걸친 자세로 옥상의 입구를 향해 걸을 때였다.

“이사님!”

주인영이 눈물범벅인 얼굴로 옥상 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괜찮으세요?”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며 곽대출은 또 픽 웃었다.

“이리와. 얼른 이쪽 좀 부축해줘.”

왼팔은 구조대원에게, 오른팔은 주인영에게 걸친 곽대출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땀 냄새 날 텐데?”

“아니요. 아니에요.”

곽대출의 상체를 꽉 안다시피 부축한 주인영의 답이었다.

슬쩍 시선을 들어 곽대출의 얼굴을 보았던 구조대원이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씨익 웃었다.

**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쁨과 좌절을 맛본 천상기는 한참을 넋이 나간 얼굴로 있었다.

완벽하다고 할 함정이었다.

불쌍한 크레인 기사가 방송 중에 사망하면서 무리한 공사를 진행하라 했던 신임회장 천중명은 천하에 죽일 놈이 되어야 했다.

다음으로 저축은행에서 터지는 금융 사고를 통해 함부로 임원을 교체한 그의 서투름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숨 쉴 틈 없이 마약 사건이 터져주면 게임 끝나는 일이었다.

하늘이 어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왜 신은 저런 악한 인간을 살려서 천상기에게 이리도 아프고 서러운 좌절과 시련을 안겨준단 말인가?

“후우-.”

천상기는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시련이 있으면 무릎을 꿇을지라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두고 봐. 이 개망나니.”

포기하기에 지경그룹은 너무나도 욕심나는 보물이 아닌가 말이다.

천상기는 이를 악문 채 TV 화면을 노려보았다.

천중명의 활약상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간사한 새끼, 야비한 놈!

TV에 나오는 것을 알고 저런 쇼를 만들어내다니!

천상기는 또다시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

병실에 누운 천중명은 들어서는 유진교를 보며 픽 웃었다.

“좀 어떠십니까?”

“이럴 때는 걱정하는 표정쯤 만들어서 오셔야죠.”

“그렇습니까?”

천중명의 농담에 유진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직원들 앞에서 억지로 버티던 표정이 천중명의 농담에 풀려나가는 모양이었다.

“낮에는 아버지가 입원하시더니 저녁에는 제가 입원했네요.”

“수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절했어요.”

“예?”

“끼워 넣었거든요. 이렇게 하는 게 빠르게 회복될 것 같아서요.”

유진교는 아예 기가 막힌 사람의 표정이었다.

“회장님.”

그런 뒤에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천중명을 불렀다.

“진심으로 낮에 보이셨던 모습대로 지경그룹을 이끄실 생각입니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천중명은 유진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직원들이 행복한 지경그룹을 만들겠다는 회장님의 의지가 변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던 천중명이 먼저 픽 웃었다.

“회사를 위해 정열을 쏟아낸 직원들이 행복하지 못하면 우리 지경에 미래는 없습니다. 물론 지경이 무너진다고 해도 총수님과 우리 집안, 일부 임원들이 배고플 일은 없겠죠.”

묵직한 얼굴의 유진교 앞에서 천중명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내가 물러나는 게 옳습니다. 그룹이라는 특이한 형태에서 그룹 회장의 역할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오른손을 보호대에 감싼 채 천중명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얼마나 가져야 행복한 건지 모르겠지만, 직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계약직이나 파견직 따위의 편법으로 가로채면서까지 벌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내가 제시하는 첫 번째 길입니다.”

천중명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물러나세요.”

누군가의 음성이 복도를 울리고 병실로 들어왔다.

천중명이 문을 슬쩍 바라볼 때였다.

“밖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습니다. 곽 이사 역시 비슷한 상황이어서 당장 회장님을 뵈러 오지 못했습니다.”

“곽 이사는 어디에 있나요?”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우선 주인영 과장이 데리고 갔습니다.”

무언가 짐작한다는 투로 유진교가 미소를 보여주었다.

어쩐지 음흉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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