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98화 (98/315)

# 98

098.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

TV를 보던 천호득이 상체를 불쑥 세웠고, 놀란 윤만석이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이은명과 허선영은 입을 막았고, 병실을 지키던 대원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또다시 크레인이 기울어졌습니다. 지금 크레인에 매달려 올라가는 사람이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자의 음성이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것처럼 변하는 화면에서 정장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천중명이 크레인을 올라가고 있었다.

“왜! 도대체 회장이 왜!”

천호득이 절규처럼 고함을 지를 때 카메라가 천중명의 모습을 쭉 당겨 화면에 가득 채웠다.

어깨에 로프를 가로지른 천중명의 머리가 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현재 크레인이 계속 기울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중간의 지지대가 꺾이는 소리가 계속….]

[아!]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화면이 흔들리면서 크레인이 확실하게 기울었고, 휘청한 천중명이 미끄러지면서 팔로만 매달렸다.

[사다리차를 보내라고!]

[아래에 에어쿠션을 설치해!]

고함이 여과 없이 TV를 통해 들릴 때였다.

몸을 끌어 올린 천중명이 크레인에 올라 또다시 위를 향해 움직였다.

화면이 이번엔 정확하게 천중명의 얼굴을 잡았다.

번득이는 눈, 의지를 담은 채 굳게 다문 입술이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어깨에 걸친 로프를 배경으로 강렬하게 화면에 올라왔다.

“중명 씨….”

허선영이 애타는 심정으로 부른 이름이 병실을 떠돌았다.

**

지경그룹의 모든 계열사는 업무를 중단하다시피 한 채 보도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신임 회장이 위험에 빠진 기사를 구하겠다고 로프를 어깨에 걸친 채 기울어지는 40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간다는 일이?

[현재 구조를 기다리는 크레인 기사는 지경그룹의 정직원이 아니라 하청업체에서 파견한 직원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방송은 얍삽하게도 신임회장이 구태여 저럴 필요까지 있느냐로 분위기를 갈아타고 있었다.

지경화장품, 냉동창고, 그 외의 계열사에 있는 직원들 모두 멍한 얼굴이었다.

“회장니-임!”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가 저 깊은 곳에서 토해내는 듯한 절절한 음성으로 천중명을 부를 때였다.

[아!]

기자의 탄식과 함께 또다시 크레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뒤늦게 달려온 방송사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설치하느라 안전요원들과 실랑이를 하는 장면도 TV에 모두 담겼다.

**

천상기는 간절한 심정으로 깍지 낀 두 손을 책상에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저 개새끼를 사고로 데려가십시오. 위아래 모르고 설친 놈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혼자 잘났다고 설치면 어떤 꼴이 되는지를 남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십시오.”

그의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TV에서 [아!]하는 기자의 탄식이 들렸다.

천상기가 홱 시선을 들었을 때 천중명은 한쪽으로 기울었던 몸을 다시 바로 세우고 있었다.

“그냥 떨어져, 이 새끼야! 네가 무슨 영웅이라고! 뚝! 어? 뚝 떨어져서 죽어버리라고! 그럼 내가 무덤 하나는 진짜 화려하게 꾸며줄게.”

천상기의 간절한 바람이 그의 오피스텔 공간에 울렸다.

**

10미터쯤 남았다.

아직은 고스란히 남은 태양을 등진 채로 천중명은 꾸역꾸역 위로 올라갔다.

휘이이이이이잉-.

아래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천중명을 흔들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다.

바보 같은 일이기도 했다.

올라오기 직전에 “하청직원입니다, 회장님”하는 소장의 말도 분명하게 들었다.

그래서 뭐?

파견 나온 하청직원의 목숨은 정규직에 비해 싸게 쳐도 된다고?

회장이니까 모른 척하다가 후하게 보상이나 주고 끝내라고?

끄드드등! 끼이이-익!

크레인이 기울며 전해지는 진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몸이 휘청한 뒤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천중명은 다시 대롱대롱 크레인에 매달렸다.

저 아래에서 비명이 달려들었고, 저 멀리 아득한 바닥에서 에어쿠션을 설치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끄으응!’

천중명은 턱걸이하듯 몸을 끌어올렸다.

비싼 구두는 바닥이 미끄러워서 더 지랄이었다.

“회장니-임!”

옥상에서 곽대출이 짐승처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같은 모습이었다.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옥상의 입구에 한쪽 끝을 묶은 로프를 몸에 감고 있는 모습까지.

“기다려! 내가 반드시 너에게 간다. 저 양반하고.”

혼잣말로 대답한 천중명은 꺾여서 옆으로 틀어진 크레인을 타고 움직였다.

**

TV 화면에 나온 천중명은 크레인의 꺾인 부분을 넘어서 운전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요!”

지켜보던 지경화장품 직원 중 한 명이 외치자,

“회장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누군가 좀 더 큰 소리로 바람을 전했다.

[이제 10미터 안쪽입니다. 문제는 옆으로 완전히 눕다시피 한 운전석의 문이 바닥으로 향해 있어서 어떻게 기사를 나오게 하느냐입니다.]

방송국은 그사이 카메라를 더 설치했는지 다른 방향에서 천중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상에서 높이가 30미터쯤 됩니다. 아! 또다시 지지대가 꺾이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회장님!”

비명 같은 여직원의 외침이 쏟아져 나왔다.

**

황성규와 팀원들은 우르르 모여서 벽의 중앙에 있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팀장님은 저런 분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함께 화면을 지켜보던 문상훈이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솔직히 저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런 분이라면….”

말을 하던 황성규가 듬직한 눈빛으로 화면을 다시 보았다.

“목숨 걸고 따를 만한 분인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말에 동조하듯 둘러싼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구조에 성공한다면 위기를 통해 단박에 영웅이 되겠군요.”

“저런 일에 직접 나설 경영자가 또 있을까? 위기를 통해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영웅이 될 사람이기에 위기에 빛을 발하는 거라고 봐야지.”

두 번째로 고개를 끄덕인 팀원이 시선을 들었을 때 천중명은 크레인의 운전석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

바람이 거세게 불어 천중명의 머리칼과 로프를 있는 대로 흔들었다.

천중명이 운전석에 다가갔을 때, 옆으로 완전히 누운 운전석 안에서 기사는 쇠로 된 프레임을 밟은 채 애처롭게 있었다.

“창문을 열어!”

천중명이 고함을 지르는 고함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쿵쿵쿵!

천중명은 운전석의 창을 두드렸다.

기사가 몇 번인가 열려고 힘을 썼으나 창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으로 꺾이는 과정에서 프레임이 뒤틀린 모양이었다.

염병! 이쯤에서 쉽게 해결해 주면 오죽 좋겠나.

천중명은 픽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에 메고 왔던 로프의 끝을 풀어서 운전석의 아래에 매듭을 지었다.

와라, 비겁한 고난아!

떼로 오든, 순서 정해놓고 오든, 다 덤벼라.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너는 절대 날 이긴 게 아닐 테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반드시 일어설 거니까.

로프를 묶은 천중명은 그 끝을 잡고 곽대출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끄드드드등! 끼기기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커다랗게 크레인이 휘었고, 천중명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들릴 때였다.

“끄응!”

크레인 아래로 늘어진 로프에 매달린 천중명이 바람에 흔들렸다.

운전석에서 오히려 2미터쯤 아래였다.

“헉! 헉!”

힘이 부족했다.

이 몸뚱이가 가진 힘을 다 썼는지 팔이 자꾸만 후들거렸다.

천중명은 오른발로 로프를 감은 뒤에 왼발로 그걸 지지하면서 손을 당겼다.

“이익!”

그리고 다시 운전석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문을 열어!”

이번에도 천중명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게 분명했다.

공포에 사로잡혀서 눈에 초점마저 제대로 못 잡는 것처럼 보였다.

한 줄 로프에 매달린 상태였다.

휘이잉! 휘이이이잉-!

바람이 거센 속에서 천중명은 그네를 타는 것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휘이익! 휘이이익!

몸을 흔든 천중명은,

터억!

한순간 운전석의 끝부분을 왼손으로 잡았다.

오른손에 로프를 감았고, 왼손으로는 운전석의 끝으로 나온 프레임 부분을 붙들었다.

“끄응!

로프를 서서히 풀어가며 천중명은 운전석의 프레임을 잡고 움직였다.

“문을 열라고!”

쾅쾅쾅!

천중명이 무섭게 노려보며 머리로 유리를 들이받은 다음이었다.

기사가 몸을 웅크려 숙인 뒤에 문고리를 만졌다.

덜컹!

문이 열렸다.

“후우!”

숨을 조절한 천중명은,

와락!

오른손을 문의 안쪽을 향해 밀어 넣었다.

터억!

운전석의 프레임과 문에 천중명이 매달렸을 때 아래쪽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강 왔다.

‘대출아! 부탁한다!’

원래 계획했던 방법이 뒤틀려서 지금은 곽대출이 도움이 절실했다.

어차피 믿을 놈은 곽대출밖에 없었다.

**

곽대출의 눈을 본 대원들이 이를 악물었다.

“좀 부탁합시다! 나 이거 발설하면 최악에는 처벌받는데! 내가 해군특작부대 출신이거든! 북파공작원! 그러니까 이번 한 번은 내 말 좀 들어줘요!

금방에라도 이빨로 목줄을 물어뜯을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곽대출이 으르렁거렸다.

“이 엿 같은 나라가 나 같은 놈에게 해 준 게 니미! 병장 제대증 하나야! 6년을 훈련했는데! 그러니까! 당신들은 누구보다 내 심정 잘 알 거 아냐!”

곽대출의 간절함이 대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다.

“불 끄러 달려가서! 창 깨트렸다고 물어주고! 화재 뒤에 길바닥에 퍼져서 라면 먹는 당신들은 내 마음 알 거 아니냐고! 장비 없어서 당신들 돈으로 사야 하는 당신들은 알 거잖아!”

으르렁대던 곽대출이 주변에 있던 구조대원을 둘러본 뒤에 “퉤!”하고 침을 뱉었다.

“못하겠으면 놔둬, 씨발! 나 혼자라도 할 거니까!”

곽대출이 기다란 사다리의 끝을 붙든 직후였다.

“해봅시다! 합시다!”

나이 있는 대원이 이를 꽉 깨문 채로 곽대출의 곁으로 움직였다.

“처벌이 두려운 사람은 물러나! 나는 한다!”

그가 곽대출과 함께 기다란 사다리 끝을 들었을 때였다.

“사람 구하는 일에 물러나면 그건 소방관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보다 젊은 대원이 달려들었고,

“내가 소방관이 될 때 맹세했거든요! 내 앞에서 절대 누군가 혼자 죽게 두지 않겠다고요!”

그 또래의 소방관이 또 달려들었다.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사다리의 끝을 어깨에 걸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고,

“저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저의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여 주소서!”

그 옆의 소방관이 다 함께 후렴구처럼 악을 썼다.

“얼른 올라가요! 너도 올라가!”

소방관 한 명이 외치자 곽대출과 대원 한 명이 그 기다란 사다리의 끝으로 올라갔다.

“묶었어요?”

“됐습니다!”

곽대출의 고함이 들린 다음이었다.

“가자! 하나! 가자! 둘!”

사다리가 허공을 향해 길게 나가고 있었다.

“신의 뜻에 따라 제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소서!”

끝에 매달린 두 사람을 향해 소방관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어지고 있었다.

**

올라가지 못하게 통제한 탓에 방송 카메라는 아래에서 화면을 잡았다.

[옥상에서 구조용 사다리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와 대원이 사다리 끝에 서 있습니다!]

곽대출과 대원은 길게 이어진 사다리의 반쯤 낮춘 자세로 서 있었다.

안전장치라고는 사다리 끝에 감은 로프가 전부였다.

밑에 도착해 위를 바라보던 주인영은 입을 틀어막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바보같이 우직한 남자!

독하기 그지없다가도 주인영의 얼굴만 보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그래놓고도 좋아한다는 말조차 쉽게 못 하는 사람이 사다리 끝에서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이사님! 나 고백할 거니까 꼭 무사히 와요!’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주인영이 간절한 바람을 안고 곽대출을 바라보았다.

**

천중명은 매달린 상태에서 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팔이 후들거리는 것이 가장 두려웠는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얼른 내려와!”

그나마 운전석 안에 대고 지른 고함이라 기사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깨를 잡아! 그리고 등에 매달려!”

쭈뼛쭈뼛 자세를 낮춘 기사가 프레임을 밟으며 천중명의 등 쪽으로 움직였다.

끄드드등.

그사이에도 크레인이 기우는 섬뜩한 소리가 연신 울렸다.

“서둘러!”

겁에 질린 기사가 한쪽 손을 천중명의 어깨에 걸칠 때였다.

끄드드드등! 끼기기기기기-잉!

크레인이 거세게 흔들렸다.

“으아아아!”

아래로 떨어지던 기사의 상체가 천중명의 어깨로 쏟아졌다.

“끄으으!”

가장 먼저 어깨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손가락이 뜯겨 나가는 통증이 달려들더니 곧바로 팔이 후들거렸다.

“잘했어! 그대로 내 등에 업혀! 천천히! 괜찮아! 우리 살아서 돌아갈 거야!”

천중명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딸이 셋이나 있다면서! 노모도 계시고!”

“예!”

“그러니까 꽉 잡아!”

와락!

기사가 천중명의 등에 매달렸다.

“커헉!”

얼마나 긴장했는지 천중명의 목을 감은 그의 팔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부인이 아래에 와 있더라고!”

“예?”

“부인이 지켜보고 있다고! 그러니까 버텨!”

말을 마친 천중명은 왼팔을 힘껏 밀쳤다.

휘이이익! 터억!

“끄아-!”

노렸던 대로 운전석 끝에 나온 고리에 손가락이 걸렸는데 대신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회장니-임!”

그때 곽대출의 고함이 저 멀리서 들렸다.

10미터쯤 아래였다.

맹수를 잡을 때 쓰는 것처럼 둥그렇게 밧줄을 걸어놓은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있었다.

“씨발!”

꼭 이렇다.

쉽게 되는 게 없다.

어깨에 힘을 담기 위해 천중명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이제 오른손에 감아놓은 로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끄드드드등!

그 순간이었다.

꽈등! 꽈드드등!

크레인의 중간이 부러진 것처럼 운전석이 아래를 향해 훅,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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