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66화 (66/315)

# 66

066. 어떻게 된 거야? (2)

평창동으로 향하는 길에서 곽대출은 나사 하나쯤 잃어버린 사람처럼 히죽거렸다.

“정말 선영 씨를 두고 나랑 지리산에 갈 생각이셨다, 이거지? 회장님?”

“사골도 아닌 걸 왜 자꾸 우려먹으려고 그래? 좋은 건 한 번으로 끝내.”

“예, 회장님.”

결국, 비슷하게 웃어준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호득과 윤만석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30년 가까이 의지하던 윤만석이 강승애에게 갔다면 가슴을 후벼낼 정도로 아픈 일이 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대출아. 평창동에 도착하면 정문에서 기다리지 말고 함께 들어가. 아버지와 이야기하겠다고 하면 그런 때만 거실에서 기다리고. 알았지?”

“어? 본부에 내 자리 만들어준다면서요? 주인영 매니저가 오면 나도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회장님아?”

“시끄러워! 내가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것 같냐?”

“어? 꼭 이렇게 나올 필요까지는 없잖습니까? 회장님?”

둘이서 킬킬거린 다음이었다.

“자, 이제는 강승애와 천상기의 목줄을 조이는 일도 좀 봐야지?”

혼잣말을 뱉어낸 천중명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유진교에게 먼저 전화를 넣었다.

- 유진교입니다.

간장 게장에서 풍기는 은은한 생강 향처럼 유진교의 음성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평창동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곳에 들른 뒤에 잠시 뵙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 지금 평창동에 있습니다.

잊고 있었다.

유진교가 천호득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략 10분이면 도착합니다. 그럼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평창동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네.”

“윤 실장 일 때문일까?”

“복잡한 일들이 많으니까 겸사겸사 방문했을 수도 있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승용차는 평창동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게 말 끄는 거 안 좋아하는데 한마디만 더 하자.”

산을 타는 것처럼 쭉 뻗은 길을 올라가는 승용차 안에서 천중명은 입을 열었다.

“비겁하게 조용하게 사라지는 일만은 없자.”

천중명이 곽대출의 뒤통수를 향해 다짐을 던졌을 때였다.

앞 유리를 통해 저택이 보였고, 승용차를 발견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정문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영 씨와의 데이트에도 딱 달라붙어 드리지.”

“에이, 나쁜 새끼.”

“히히히.”

해괴한 웃음을 터트렸던 곽대출이 마술처럼 표정을 바꾸었고, 곧바로 직원들이 다가왔다.

그들에게 차를 맡긴 천중명과 곽대출은 곧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에서 현관까지 꽤 길게 걸어간다.

그렇게 현관에 들어서는 천중명을 메이드 복장의 직원들이 맞아주었다.

“총수님은 어디 계시죠?”

“1층 서재에 계십니다.”

“어머니는요?”

“주방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그럼 먼저 총수님을 뵙고 나오죠.”

곽대출에게 쉬고 있으라는 눈짓을 한 천중명은 1층의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 거실을 가로지르는 참이었다.

계단 아래의 식당 공간에서 이은명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그래요, 어서 와요. 차 한잔 줄까요?”

“제가 가서 마시겠습니다.”

곽대출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주방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언제 왔니?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지나는 길에 들렀어요. 아버지 뵙고 가려고요. 잘 어울리시네요.”

이은명은 스웨터 아래로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돋보이는 느낌의 발목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편해서 입긴 했는데 아버지는 싫으신 모양이야. 네가 보기에는 괜찮아?”

이은명이 웃는 얼굴로 건넨 말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조건 없이 주는 어머니의 애정이 담뿍 담겨 있어서, 천중명의 가슴 한쪽이 커다랗게 울렸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그냥 보기 좋아서요. 아버지 먼저 뵐게요.”

“그래.”

몸을 돌리는 천중명의 등을 이은명이 쓸어주었다.

시선에서 본 애정 때문인 모양이었다.

등을 쓸어주는 이은명의 손길이 천중명의 감정을 분명하게 흔들고 있었다.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천중명은 곧장 천호득의 거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장만섭이는 어디 있지?

“오셨습니까?”

그때 곽대출이 들어간 식당에서 장만섭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달려 나왔다.

“너는 뭘 또 먹고 있어?”

거기에 장만섭을 향한 곽대출의 타박이 연달아 들려서 들여다본 것만큼이나 주방 상황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똑똑.

천중명은 서재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이 열렸고, 유진교가 인사했으며, 그 뒤로 책상 앞의 의자에 앉은 천호득이 보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천중명이 안으로 들어가자 천호득이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난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만난다는 여자는?”

천호득이 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의논드릴 게 있어서 온 거라 다음에 함께 오겠습니다.”

“의논?”

“예.”

천호득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볼 때 문이 열렸고, 중년 여직원이 차를 놓아주고 나갔다.

“그래, 무슨 일이냐?”

“윤 실장이 병원에 있습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천호득의 눈빛을 봐서는 아직 연락을 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왼쪽 눈과 오른쪽 손목, 발목을 잃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하는 것을 염려해서 집에 있는 걸 병원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누가 그랬어? 강승애야? 아니면 둘째야?”

“두 사람이 함께 그런 것 같습니다.”

당장에라도 그 연놈을 잡아 들이라고 고함을 칠 것처럼 천호득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병원은?”

“방지병원입니다.”

“크흠.”

천호득의 불편한 심정이 그가 쏟아낸 헛기침 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틈을 타고 내려앉은 침묵의 휘장을 밀쳐내며 천중명은 유진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부장님. 국세청장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국세청장? 조세원이 말이냐?”

“예. 단둘이 만나서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천호득이 눈동자만 움직여서 유진교의 답을 요구했다.

“말이 나올 상황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비공식적인 자리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천호득이 불쑥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 끝났으면 병원에 가자.”

그리고는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서 몸을 일으켰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만 봤습니다. 의식이 돌아오면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기다리셨다가 그때 가십시오.”

“그럴 게 뭐 있어? 가 있다가 정신 돌아오면 바로 보면 되지.”

지금처럼 고집을 피우는 천호득을 이기기는 어렵다.

“그럼 15분만 기다려주세요. 밖에 잠깐 지시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너는 알아서 움직여. 네 말대로 의식도 안 돌아온 인간을 몰려가서 들여다볼 일이 뭐가 있어? 여차하면 병원을 옮길지 모르니까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그러니 우선 일 봐.”

말을 마친 천호득이 뭐하느냐는 의미의 시선으로 유진교를 보았다.

“제가 총수님을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유진교까지 이렇게 나선 걸 더 어떻게 말리겠나.

“그럼 상황 봐서 저도 들를 테니까 먼저 가보세요.”

“올 거 없다니까.”

고집을 피워도 당장 천호득은 휠체어에 옮겨 타는 것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천중명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 앉은 천호득의 무릎에 유진교가 담요를 올려주었다.

서재를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기 장만섭 좀 불러주세요.”

“네.”

거실에 서 있던 여직원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뒤에 급하게 장만섭과 곽대출이 나왔다.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숙인 장만섭이 얼른 천호득의 휠체어 뒤로 움직였다.

“병원에 간다.”

“예, 총수님.”

장만섭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싶을 정도로 기운차게 휠체어를 밀어 현관으로 움직였을 때, 이은명과 여직원들이 주방에서 나왔다.

천호득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거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니?”

“윤만석 실장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렸거든요. 잠시 들렀다 오시겠대요.”

이은명에게 상황을 설명한 천중명은 고개를 돌렸다.

“곽 이사. 아까 명단에서 본 세 사람 좀 불러줘. 2층 서재에서 볼 테니까.”

“예, 회장님.”

식당으로 들어서는 곽대출을 돌아본 이은명은 또다시 궁금한 얼굴이었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시간 될 때 직원들 면담을 하려고요.”

적당하게 답을 한 천중명은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

‘오늘의 아침’ 현충기는 화가 솟구치는 단계를 지나 아예 허탈해진 심정으로 회사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열 계단 정도를 올라가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좌절과 분노 속에 동료들을 처박은 서수미는 뜻밖에도 준비해 두었던 커피를 내미는 여유를 보였다.

이걸 확 얼굴에 부어 버려?

현충기는 울컥 올라오는 속마음을 누르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제 기사, 누가 내렸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상하게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서 현충기는 내동댕이칠까 했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게 일을 왜 이렇게 만들어? 그리고 기사라는 게 상대방을 만나서 양쪽의 말을 들어본 뒤에 작성해야지, 사진 한 장으로 마약 데이트니 어쩌니 소설을 써 갈기면 어떻게 해?”

“만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거부하는 걸 어떻게 해요?”

“언제 연락했었는데?”

“좀 됐어요.”

서수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실 확인을 위해 최소한의 취재나 증거는 확보했어야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네 생각을 덜컥 올려놓으면 뒷일은 누가 책임져?”

서수미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천 회장을 물고 늘어진 거냐? 인터뷰도 먼저 시도했었고, 그 뒤에 사진 기자들 붙여놓고. 네가 그렇게 준비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찔리는 게 있는 모양으로 서수미의 시선이 슬쩍 돌아왔다.

“방법은 두 가지인데 네가 알아서 선택해. 깔끔하게 가서 사과하고 일을 바로잡는 것.”

“기자는 절대 사과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오보를 냈더라도 알 권리를 위한 거라면 절대 고개 숙이지 말라고 하셨던 분이 선배님이세요.”

현충기는 뜨거운 숨을 길게 내쉬며 울컥 올라오는 화를 삭였다.

“다음은 해고당한 뒤에 지경그룹과 소송을 하는 거, 물론 사과한다고 소송을 취하해준다는 보장은 없다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다.”

“소송하라고 하죠.”

현충기는 아예 대놓고 같잖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지닌 힘을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지경그룹이 작정하면 너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인척까지 죄다 직장을 잃을 수 있어. 법이라고는 경범죄도 조심해야 하고.”

서수미는 처음으로 기가 눌리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너 때문에 지난 7년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 성장한 우리 ‘오늘의 아침’이 당장 다음 달 급여를 걱정하게 생겼다. 그런 너를 기자로 다시 채용해줄 언론사가 있을까?”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러게 왜 그따위 소설을 네 마음대로 올려!”

기자 바닥에서 짬밥이 찰 만큼 찬 현충기였다.

서수미의 버티는 꼴과 새침하게 돌리는 얼굴을 보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너 혹시 누구 부탁받고 이 기사 쓴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저….”

“그랬네. 딱 그런 거였네. 알았다. 이제부터 나도 너 감싸는 거 그만둘란다. 어디 네 맘대로 소송도 하고, 집안 거덜 내고 원하는 대로 해 봐.”

실제로 현충기는 마음을 접었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원한으로 기자의 권리 운운하는 서수미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였다.

“사과할게요.”

몸을 돌리는 현충기의 뒤통수를 서수미가 붙들었다.

“늦었어.”

“제가 사과하면 된다면서요?”

옥상을 내려가는 문 앞에서 현충기가 몸을 돌렸다.

“그럼 왜 그런 기사를 썼는지 솔직하게 말해. 여기서 들을 거고, 네가 거짓말하거나 변명한다고 생각되면 바로 내려갈 거다. 말하기 전에 한 가지만 알아라.”

현충기는 지을 수 있는 가장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보통 그룹 홍보실은 언론사를 상대로 이렇게 나오지 않아. 특히 신임 회장이 선임된 경우에는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면 요청했지 소송을 꺼내 들지도 않고. 넌 지경그룹의 핵심 임원들이 신뢰하는 신임 회장을 제대로 건드린 거야.”

“사실은요.”

서수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건물의 저 너머로 노을이 넘어갈 때 서수미의 설명이 끝났다.

“미쳤네. 너 얼마 받았어?”

“네?”

“그 오지은인가 하는 애한테 얼마 받았냐고! 그냥 써줬다는 헛소리 지껄이면 바로 내려갈 테니까 알아서 하고!”

“천만 원이요.”

“너 자꾸 거짓말할래?”

“두 번 받았어요.”

“후우-.”

현충기는 건물을 무너트릴 것처럼 커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