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6화 (36/315)

# 36

036. 피에 적셔진 것처럼 보였다 (1)

빌라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곽 부장은요?”

“아직 안 오셨습니다.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마시고 왔어요. 서재에 있을게요.”

천중명은 물 한 병을 꺼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거실에 김순례가 있어서 아무래도 편하게 통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친 천중명은 곧바로 유진교에게 전화를 넣었다.

- 유진교입니다.

“전무님. 김상용 부사장의 해임이 결정되었답니다. 내일 이천을 방문해서 남은 문제들을 정리할 생각인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유진교는 예상대로 함께 움직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럼 8시에 뵐까요?”

- 그 시간에 빌라로 찾아뵙겠습니다.

“네. 내일 뵙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천천히 물을 마셨다.

유진교는 확실히 힘이 된다.

아직 특별히 보여준 능력은 없지만, 툭툭 주는 조언이나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내놓는 답이 그랬다.

게다가 그룹 관계자들에게 있어 유진교라는 존재는 천호득이 천중명을 지켜보고 있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잘하고 있는 건가?”

좌충우돌하고는 있다만, 아직 커다란 실수는 없었다.

서재의 창밖에 펼쳐진 하늘로 기다란 솜구름이 가닥가닥 늘어서서 바람에 밀려가는 시간이었다.

천중명은 멍하니 그렇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운에 기대 달려왔다.

천상기와 강승애의 더러운 거래를 알게 되었고, 어천수의 꼼수 덕에 투자를 확정했으며, 허선영의 아픔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그런 요행이 없더라도 경영을 제대로 할 능력이 필요했다. 지경그룹이라는 발판을 딛고 일어서 진정한 천중명의 그룹을 만들려면 말이다.

중요한 문제도 남았다.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작 무얼 해야 행복해지느냐의 문제였다.

그룹을 만들어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더니 지금의 천봉서와 천상기처럼 자식 놈들이 서로 죽고 죽이려 든다면 그게 무슨 행복이겠나.

천중명은 노트북을 켠 뒤에 메모장을 열었다.

직원들을 전부 정직원으로 돌린 것, 손도운과의 계약, 김순례에게 주 5일 근무를 부탁해서 수입을 늘려준 것.

적고 보니 전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일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서는 뭘 해야 하지?”

타다다다닥.

천중명은 키보드를 두드려 메모장에 ‘허선영’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대상이 좀 달랐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선영이 행복해 하는 일이 천중명이 바라는 행복이었다.

“기가 막히네.”

결론을 내리려고 보니 어쩐지 집을 담보 잡혀가며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었던 곽대출의 모습과 꽤 비슷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내가 그럴 때 정말 행복해지는지.”

천중명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유진교의 번호를 다시 눌렀다.

- 유진교입니다.

“전무님. 총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 네?

그가 놀라는 건 처음이었다.

“총수님을 뵐 일이 있다는데 뭘 그렇게 놀라세요?”

- 무슨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전무님께야 말씀드릴 순 있지요. 대신 전무님이 들으시면 총수님께는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 후우. 대표님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시군요.

한탄 같은 유진교의 대꾸가 먼저 건너왔고,

- 총수님께 여쭤보고 바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원하던 답이 있었다.

**

도깨비 출신 장만섭은 동기였던 곽대출이 항상 무섭다.

기 때문이었다.

막무가내지, 독기 뿜어내면 살모사도 깨물어 죽일 정도지, 그렇다고 힘으로 누를 수도 없지, 거기에 어떻게 된 인간이 후진이란 말은 아예 삶아서 먹어버렸는지 꼭지가 돌면 항상 끝까지 달려들지.

하여간 장만섭은 곽대출이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너는 저리 가 있어.”

그런 곽대출이 눈에 독기를 담은 얼굴로 장만섭에게 고갯짓을 했다.

삼성동 서울 병원 맞은편의 자그마한 커피전문점 테라스였다. 커피전문점 안으로 들어간 장만섭은 창을 통해 테라스에 마주 앉은 곽대출과 황성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난합니까?”

“나야 만섭이 소개로 왔을 뿐이오.”

“그러니까요. 그렇게 나오신 분이 내가 모시는 분을 꼭 봐야겠다는 건 뭐고, 또 그렇게 보더라도 마음이 내켜야 일을 하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거무튀튀하니 노동일 잘하게 생긴 황성규는 곽대출의 독기 서린 눈에도 그다지 밀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봅시다, 곽 형. 도깨비 출신이라니까 근성은 내가 인정합니다. 모시는 분을 챙기는 자세도 다른 말 할 필요 없고요. 그런데 나도 딸린 식구들이 있어요. 그것도 여섯이나.”

황성규는 느긋하게 말을 풀어놓았다.

“나야 잘못돼도 쇠고랑 차면 그만이요. 하지만 날 믿고 따라와 주는 애들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잘못될 일이 뭐가 있어요?”

아직 독기 가득한 곽대출을 향해 황성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찾을 정도면 막말로 남의 속옷 색깔까지 알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나도 내 애들 데리고 목숨 걸 분인지 아닌지 정도는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선금을 원하는 거면….”

“돈은 우리도 그리 아쉽지 않아요.”

곽대출의 말을 황성규가 적당하게 자르고 들어왔다.

“정보란 넘기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또 나는 우리 애들과 함께 숨겨진 마지막까지를 찾아서 넘겨야 합니다.”

“그래서요?”

“그러니 그 모시는 분을 한번 뵙자는 겁니다. 내가 애들 데리고 의지할 분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결정이 서니까요.”

곽대출이 불편한 심정을 대신해 헛기침을 먼저 쏟아냈다.

“만약 만나고 난 뒤에 일 못 하겠다고 하면 내가 모시는 분만 외부에 알린 꼴이 됩니다. 정보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되고요.”

“그렇긴 하지요.”

뜻밖에도 황성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곽 형. 내가 여기 나올 때 곽 형의 뒤를 모르고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는 곽대출의 면상을 검지로 밀어내는 듯한 질문을 꺼내놓았다.

“모시는 분도 압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거절하고 끝냈을 텐데, 최근에 그분의 행보가 워낙 독특해서 한번 만나나 보자는 생각에 나온 겁니다.”

뒤를 캤다는 말에 곽대출의 고개가 삐딱하게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총수님을 모시는 윤만석 실장이 내 선배쯤 됩니다. 천봉서라고 큰 아드님을 따르는 애들은 경찰 정보과 출신이고, 둘째 아들을 따르는 친구는 군 정보계열이고요.”

천봉서도 조직이 있다고?

곽대출의 표정을 읽은 황성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복잡하더군요. 며느님은 친정 쪽에서 또 국정원 퇴임자를 고용했습니다. 원래 그런 일 할 친구는 아니었는데 친척 관계라 거부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걸 다 조사했다는 겁니까?”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 선에서 모두 걸리니까요.”

곽대출의 놀라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황성규가 말을 이었다.

“전처럼 여자나 꼬드길 분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거고, 최근에 보여준 행보라면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가 하는 겁니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황성규의 말에 곽대출은 끄덕일 뻔한 고개를 억지로 붙들었다.

“그러니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지금처럼 따를만한 분으로 남을지는 만나봐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곽대출은 결국 황성규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유진교가 정한 약속 장소는 뜻밖에도 삼성동의 탄천이었다.

- 30분 뒤에 건너편 주차장에 있는 야외극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올림픽대로는 늘 막힌다.

그러니 차를 가져가면 5분에서 10분, 느긋하게 걸어가면 대략 15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입은 천중명은 담배와 라이터, 지갑, 휴대 전화기를 들고 서재를 나섰다.

“나갔다 올게요.”

“오래 걸리십니까?”

“시간 되면 먼저 가세요.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요.”

김순례와 인사를 나눈 천중명은 종합운동장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었다.

300만 원쯤 하는 정장에, 70만 원짜리 셔츠, 또 100만 원이 훌쩍 넘는 벨트, 200만 원대 구두를 신었다.

귀찮아서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집에 있는 시계 중에 가장 저렴한 것이 대략 700만 원 수준이었다.

느닷없이 받아들이게 된 이런 삶이 아직 행복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걸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야외극장 자리에 도착한 천중명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10분쯤 지난 뒤에 천중명의 뒤에서 승합차가 멈추었고, 뒤쪽 문에서 유진교와 윤만석이 문에서 내렸다.

입을 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한 다음이었다. 당연하게 차에 오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천호득이 차에서 내렸다.

캐시미어 셔츠에 코듀로이 바지, 그 위에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복장이었다.

“좀 걸을까?”

인사하는 천중명을 향해 천호득이 물이 합쳐지는 곳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천호득은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어쩐 일로 보자고 했어?”

“불편하시면 차에서 말씀드려도 됩니다.”

“됐어. 이렇게 걷는 날도 있어야지.”

고집스러운 눈으로 앞을 바라보는 천호득의 눈에 옅은 반가움이 스쳐 지나갔다.

천중명과 이렇게 걷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천중명은 처음으로 천호득도 사람이었구나, 이 양반도 자식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나 보구나 싶었다.

천호득과 함께 걸었다.

그 뒤를 유진교와 윤만석이 따랐고, 좀 더 바깥쪽에서 짙은 정장 차림의 남자 다섯이 움직이고 있었다.

“요즘은 어때?”

“보고받으시는 대로 좌충우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재미없지.”

이 양반이 아픈 여자아이와 곽대출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천호득은 인자한 표정이었다.

“좀 앉을까?”

그가 가리켰던 곳까지 채 반도 걷지 못했다.

그런데도 천호득은 방향을 틀어서 강을 향해 놓인 벤치로 움직였다.

“하. 모처럼 강을 보니 좋구나. 근처에 적당한 곳을 하나 사볼까? 뭐해? 앉아. 앉아서 얘기해.”

천호득이 앉기 무섭게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어깨와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유진교와 윤만석은 또 벤치 뒤에 서 있었다.

저 양반들이 천호득을 이렇게까지 따르는 이유는 뭘까?

약점을 잡힐 사람들은 아니고.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급하게 보자고 했어?”

“둘째 형이 큰형을 노리고 있습니다.”

힐끔 천중명을 보았던 천호득이 일단 듣겠다는 투로 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큰형의 처남이 국세청장의 사위인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수일 내로 큰형의 회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됩니다. 추징금이 대략 2천억 정도인데 그걸 형수의 친정에서 납부하고 대신 회사를 가져갈 계획인 것 같습니다.”

“흐음.”

천호득이 크게 놀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숨 한 번 내쉬고는 표정을 수습하는 것을 보자 확실히 지독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가 큰형을 노린다는 건 뭐야?”

“형수의 친정에서 둘째 형에게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회사를 넘기는데 협조해서 큰형을 교도소에 보낼 계획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처음 듣는 거야?

천중명이 천호득의 반응을 살필 때였다.

“큰놈은 결국 이번 일로 죽게 되겠구나.”

천호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을 알아냈을 정도라면 너도 짐작할 거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이놈이 정말 모르고 이러는 거야,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이러는 거야?

천호득은 조금 전에 천중명이 가졌던 의문과 비슷한 눈초리로 잠시 말이 없었다.

“네 큰형은 겁이 많아. 누군가 앞을 막아주지 않으면 바로 무너진다. 검찰에 끌려가 조서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아마 견디지 못할 게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천호득은 덤덤했다.

“미련한 놈. 끝내 잡혀 먹을 줄 몰랐을까?”

“이대로 지켜보실 겁니까?”

“흥. 그럼 나더러 그 멍청한 놈을 지켜주기라도 하란 말이냐?”

“구속이나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만이라도 막아주실 수 있잖습니까?”

“내가? 왜?”

천중명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이번에 지켜준다고 치자. 어차피 후계자가 결정 날 때까지 계속 이런 식일 텐데, 그 뒤는? 그때도 내가 계속 그놈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는 뜻이냐?”

“후계자가 결정 나면 끝나지 않습니까?”

천호득이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우리 그룹의 지배구조를 잘 익혀야 돼. 그룹 내 지주회사에 모든 권한이 몰려 있다. 그러니 내가 지분을 넘기는 순간, 나머지는 처분만 바라게 되겠지.”

이제야 대표이사로 임명하면서도 지경화장품과 냉동창고의 지분이 천중명에게 하나도 넘어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차라리 공평하게 나눠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후계자가 정해지는 거로 모든 것이 끝나야 그룹이 살아. 내가 죽은 뒤에 형제끼리 소송을 하게 만들면, 공연히 그룹이 엉뚱한 놈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천호득은 확실히 천봉서를 도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럴 거면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든 꼴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았어?”

석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질문을 던지는 천호득을 비추고 있었다.

“어떻게 작은놈과 형수의 계획을 알게 되었냐고?”

붉은색이어서 그럴까?

천호득의 눈이 피에 적셔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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