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5화 (35/315)

# 35

035. 고집스럽게 생겼다 (3)

마른침을 삼킨 손도운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심이십니까? 대표님?”

놀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더 얇아지고 높아져서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손도운을 힐끔거렸다.

스윽.

천중명은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명은 그나마 체면을 지키려는 40대 중반이었는데, 그의 맞은편에 있는 30대 초반 남자는 껄렁대는 눈빛이었다.

“왜?”

눈짓으로 만류하는 40대를 외면한 채 30대 초반의 남자가 걸쭉한 한 마디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불편하게 뭘 그리 힐끔거려?”

“아저씨?”

“그럼 가자미라고 불러? 이쪽 보다가 눈 돌아가겠어.”

40대 중반의 남자가 “그만해.”라는 말과 함께 맞은편 남자의 옷깃을 당겨댔다.

“너, 내가 여기 사장님 때문에 참는 줄 알아.”

“안 참으면 어떻게 할 건데?”

“뭐? 그런데 이…!”

콰다당!

거칠게 일어난 남자가 천중명의 왼쪽 어깨를 잡아당겼다.

흡연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달려온 상태였고, 40대 중반의 남자가 말리기 위해 중간에 끼어들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일어섰다.

“이 옷 비싼 거다. 찢어지면 너 좀 곤란할 거야. 그리고 말야.”

눈과 눈이 딱 마주친 상태에서 건네는 말이었다.

이런 거 얼마든지, 언제든지 피할 마음 없는 천중명이어서 꿀릴 것도 없었다.

“태어날 때 너처럼 키가 작을 수도 있고, 못 생길 수도 있고, 목소리가 이상할 수도 있어. 그걸 뭘 그렇게 힐끔거려?”

“미안합니다. 우리가 실수했습니다.”

“사장님!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이 사람이 그래도? 그만해!”

말리는 40대의 태도가 진지해서 천중명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점잖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과할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천중명의 말을 들은 40대 중반의 남자는 손도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가 실수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여전히 가느다랗고 높은 음색으로 손도운이 사과를 받아들이며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불만 가득한 30대의 남자를 40대 중반의 남자가 데리고 나가고, 흥미를 잃은 흡연실의 시선들이 제자리를 찾은 다음이었다.

“대표님은 아까 같은 다툼이 무섭지 않으세요?”

손도운이 나직하게 물었다.

솔직히 인상은 그가 더 험악했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성정은 또 차분한 모양이었다.

“부당한 일이잖아요. 손 선생님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대놓고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건 안 되는 거잖습니까.”

“정말 그런 이유로 그러신 거라고요?”

“그럼 뭐 때문에 그랬겠어요? 자, 이제 공장 이야기나 다시 하시죠.”

담배를 집어 들던 손도운이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은 담배 안 하십니까?”

“합니다. 그냥 손 선생님이 연배가 있으셔서 나중에 피울까 하는 겁니다.”

“그런 거라면 같이 태우세요. 담배는 함께 피워야 맛이 더 나는 거 아닙니까.”

자꾸 내미는 담배를 더는 거절하기 뭐해서 결국 둘이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사람 참, 담배를 입에 물자 달달한 커피가 생각났다.

“커피도 한 잔씩 하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대표님.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허름한 양복 차림의 손도운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동작으로 천중명을 막아섰다.

한 잔에 300원이라면 그리 큰 부담은 아닐 거다.

“알았습니다. 그럼 같이 가세요.”

함께 움직인 천중명은 손도운이 사는 커피를 자판기에서 꺼내 들었고, 둘이서 그렇게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를 피우는 동안, 묘하게 둘 사이가 좀 더 친숙해진 느낌이었다.

“대표님. 제가 원하면 미니멈 개런티를 주실 수 있습니까?”

담배의 끝자락을 빨아들였던 손도운이 어렵게 질문을 꺼내 들었다.

“얼마나 드리면 만족하시겠어요?”

“저기….”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손도운은 자꾸만 망설였다.

“판매액의 절반을 달라던 분이 뭘 고민하세요? 말씀하신다고 다 드릴 것도 아닌 데 깎기 전에 가격 부르는 느낌으로 시원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래야 나중에 후회라도 없지요.”

손도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시선이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마지막까지 금액을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미니멈 개런티를 받으면 그거로 끝인가요?”

“미니멈 개런티는 최소의 매출을 보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익금이 미니멈 개런티를 넘어서는 시점부터 다시 이익금을 가져가셔야죠. 그래야 공평하지요.”

답을 들은 손도운이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시면…. 저기, 미니멈 개런티로 15억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는 정말이지 어렵게 금액을 제시했다.

너무 불렀나?

그냥 5억이라고 할 걸 그랬나?

손도운의 눈빛과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특허권의 권리를 지경화장품으로 넘기는 조건입니다. 이익이 15억 미만이면 미니멈 개런티로 끝이고, 15억을 넘기는 순간부터 매월 정산 이익의 15퍼센트를 지급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예?”

“다시 말씀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15억을? 그러니까 그 미니멈 개런티를 15억, 미니멈 개런티로 15억을 주시겠다는…?”

손도운은 미니멈 개런티 이후의 조건 따위 생각도 못한다는 투였다.

“대표님? 아직 800억 주문도 확인 안 하셨잖습니까? 그게 깨지면 미니멈 개런티도 없어집니까?”

“손 선생님.”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손도운이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이잉.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문자가 들어왔다.

슬쩍 시선을 내린 액정에 천상기의 이름이 있었고,

[김상용 부사장의 해임이 결정됐다. 직원 교체 건은.]

문자의 앞부분이 보였다.

이 정도면 됐다.

당장은 애타게 기다리는 손도운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800억 매출 건은 처음 들었습니다. 솔직히 확인해봐야 할 일이구요. 만약 그 계약이 실제로 이뤄지면 그 역시 이익의 15퍼센트를 매월 정산해서 드릴 겁니다.”

“매월 정산이요? 광고비나 홍보비가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처리하시려는 건지?”

“이번에 개발하신 제품에 관한 회계를 따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전체 생산 물품 대비 인건비와 재료비, 고정비를 따로 뽑고, 처음 투자 금액이 커서 서너 달 이익이 없을 텐데 그동안만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하아.”

손도운이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한 긴 숨을 토해냈다.

“진짜 그 조건이면 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사라질지도 모를 꿈을 움켜쥐려는 사람처럼 천중명의 확답을 요구했다.

“이 제품이 제대로 성공한다면 지경화장품은 꽤 큰 성장을 이뤄낼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표이사가 돼서 처음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손 선생님의 제품인 것에 감사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처럼 손도운은 멍한 얼굴이었다.

“화장품 개발에 전념하신 분과 손잡은 것을 말합니다. 이 제품을 시작으로 앞으로 손 선생님이 개발할 제품도 가능하면 제가 맡고 싶습니다.”

감동 반, 아직 돈을 받지 못한 상황이 불안한 얼굴로 손도운은 자꾸만 숨을 토해냈다.

“잠시만요.”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이중성 부사장의 번호를 눌렀다.

- 이중성입니다.

“천중명입니다. 부사장님.”

손도운이 혹시 이 일이 빨리 진행되는 건가, 진짜로 이뤄지나 하는 기대감에 바라보는 앞이었다.

“투자 확정 소식은 들으셨죠?”

- 예. 그룹 기획실에서 전환사채를 발행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상용 부사장의 해고 소식을 들었구나.

비단 200억 원의 자금 확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이중성 부사장의 음성이 너무 고분고분했다.

“손도운 개발자분과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미니멈 개런티 15억, 제품 생산부터 신제품 회계를 따로 뽑아서 매월 이익의 15퍼센트 지급의 조건입니다. 나머지 세부 사항은 부사장님이 관리해서 이사들이 진행하게 하세요.”

- 아, 예.

무언가 말을 하려던 이중성이 답을 꺼내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손 선생님 번호 아시죠? 계약은 가능하면 이틀 안으로 마치시고, 미니멈 개런티를 바로 지급될 수 있도록 하세요.”

- 대표님. 그게 미니멈 개런티를 지급한 선례가 없어서 그룹에 법률 자문도 구해야 하고, 또….

“대표이사인 내가 15억의 투자를 결정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중성의 말이 바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아까 내가 지시한 대로 처리할 것으로 알겠습니다. 혹시 그룹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주시고요.”

-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들으셨죠?”

“예! 예, 대표님!”

한껏 올라온 감정을 누르느라 손도운의 음성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들렸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손 선생님.”

자리에서 일어나 내민 천중명의 오른손을 손도운이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천중명은 왼손을 그의 손에 얹고는 웃었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어천수의 판단에 의존한 결정이라,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이 제품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제품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손도운은 분명 다음 제품에서 그 손해를 보상해 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다음으로 지경그룹이 이런 개발자에게 15억 정도 투자하는 것이 사회적 의무라는 생각도 있었다.

거기에 막말로 내 돈이냐 하는 뻔뻔한 배짱도 있었고.

세상에 없던 꼴통 재벌이 되겠다는 각오라면 또 이런 투자쯤 과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살펴 가십시오. 저는 담배 하나 더 피우고 가겠습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손도운을 두고 천중명은 담배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천상기의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천중명이 휴대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모르는 번호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 김상용입니다.

걸걸한 냉동창고 부사장의 음성이 천중명을 찾았다.

“말씀하세요.”

- 정말 이럴 겁니까?“

“뭐를요?”

- 나를 해고했다던데 이건 아니잖습니까? 내가 이 회사를 일으킬 때 벽돌 한 장, 철근 하나까지 모두 내 손을 거쳤다니까요.

사정은 급하지만,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다는 김상용의 헛된 자존심이 그의 음성에 고스란히 실려 넘어왔다.

“부사장님. 이미 결정 난 일입니다. 얼른 짐 싸서 나가세요.”

- 날 이렇게 대하고도 회사가 온전히 운영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천중명은 픽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삼성동 지하철 입구쯤이었다.

“하시고 싶은 대로 해보세요. 참고로 내가 부사장님 라인 싹 정리할 거거든요. 거기에 그동안 숨겨둔 비리가 있었다면 소송할 거니까 그것도 각오하세요.”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끊고요.”

천중명이 김상용의 말을 잘라낸 직후였다.

- 나는 천상기 회장님이 지시한 대로 한 죄밖에 없다니까요.

뜻밖의 말이 건너왔다.

- 윗선에서 시키는데 그럼 내가 어떡해야 합니까?

요 개새끼들이 진짜!

짐작은 했지만, 막상 김상용의 입을 통해 사실을 듣고 나자 같잖아서 소리 없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시키는 대로 해서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면 항의도 그쪽에 하셔야지요. 괜히 이쪽저쪽 싸움 붙일 생각이었다면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냉정한 천중명의 대꾸에 말문이 막혔는지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한 한숨이 들렸다.

“바쁘니까 이만 합시다. 내일 오전에 들를 거니까 그쪽에 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쫓겨나면 직원들 보기 부끄러울 거잖습니까? 끊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다시 빌라를 향해 걸었다.

햇볕에 서늘한 바람이 어우러져 걷기에 참 좋은 오후였다.

삼성동의 호텔을 지난 천중명은 도로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렸다.

**

삼성동 호텔의 7층 커피숍이었다.

“바로 거절하던데?”

서수미가 맞은편에 앉은 오지은을 향해 어렵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코리아클럽이라는 이름이 안 통했으니까, 남은 건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는 수밖에 없어.”

“그럼 그렇게 해.”

“그게 내 맘대로 쉽게 되니? 후처에서 나왔다고 해도 천중명은 로열패밀리야. 잘못 건드렸다가 지경그룹의 광고 잘리면 내 목이 더 빨리 잘려나가.”

오지은에게 말을 건넨 서수미가 커다란 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도움 못 돼서 미안하다.”

“얘는! 그렇다고 그걸 뭘 꺼내고 그래? 취재할 때마다 아쉬운 적이 많다며?”

입술을 삐죽이던 서수미가 슬쩍 봉투를 집어서 다시 백에 넣었다.

“취재비가 따로 없어. 요즘 언론사들은. 그런데 이상한 법 만들어서 밥도 못 얻어먹게 하니까 진짜 죽을 맛이야.”

“고맙다. 날 믿어줘서.”

“다들 너처럼 뒤탈 없을 거라 믿는 곳의 도움으로 겨우 버텨. 기자라는 자존심 아니라면 이 짓 못 한다.”

불만 가득한 서수미의 푸념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

“수미야.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 안 되면 허선영, 그 계집애라도 꼭 터트려 줘. 내가 제대로 인사할게. 응?”

“흐음.”

애교를 피우다시피 매달리는 오지은을 서수미가 심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1